236화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강함을 시험하는 이유는?”
그 말에 녀석이 프로틴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 같은 구릿빛 가슴팍을 쾅 하고 치며 대답했다.
“회색 서약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난관이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 말에 양손으로 쥔 검에 꽉 힘을 넣으며 대답했다.
“……헤로스.”
헤로스는 회색 서약으로 향하는 내 길을 막아설 것이다. 회색 서약을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강림한 헤로스다.
내 대답을 들은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으로 헤로스가 원래의 강대한 힘을 완전히 가져올 방법은 없다. 하지만, 전력을 낼 수 없다 해도 그가 지옥의 태초마인 이상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힘을 휘두른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저 말에 백 퍼센트 동감한다. 이전, 쿠르스트 산맥에서 소환된 헤로스가 뽐내던 강함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삽시간에 자신이 서 있는 일대를 포함 수 제곱킬로미터의 땅에 쌓인 눈을 다 녹여버릴 정도였으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애초에 회색 서약을 얻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는.”
“회색 서약의 사용을 막기 위해 강림한 헤로스를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레드우드의 후예, 네가 이 세상에 강림한 헤로스를 상대하기 충분한 실력이 되기 전까지는 삭풍의 족쇄는 네 것이 될 수 없다.”
출제자의 의도는 파악했다. 그러니까, 회색 서약을 사용하는 사람은 자애롭고 솔직하며 강한 사람이라 이거군. 강하다는 건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지만, 자애심과 정직함은 사람의 개성 문제잖아.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나는 자애롭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편이다.
자애로운 사람이 사람 왼팔 하나 가지고 몇 시간이고 고문하거나, 입에 구멍 난 컵을 쑤셔 박고 똥물에 익사시키려고 하지는 않잖아.
솔직함 같은 경우는, 당장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상대했던 그 반쪽 얼굴의 여자를 박살 낸 과정이 이미 구라로 점철되어 있다.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해한 모양이군. 너는 싸울 준비를 해라.”
나는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대답했다.
“옷 정도는 입혀줬으면 하는데.”
이 밝은 대낮에, 맑은 하늘 아래에서 알몸으로 싸우기에는 나도 수치심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사람인지라.
“싸우는 데 옷은 필요 없지.”
나는 그 말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렇지. 싸우는데 옷은 필요 없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게 옷이니까.”
모래밭에서 알몸으로 싸우라고? 이게 뭐 누드비치에서 발리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팍 쉬었다.
“일단, 싸우기 전에 잠깐 기다려 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카얀이 얼굴을 구긴다.
“해낼 수 없을 것 같으면 시간 끌지 말고 포기해라.”
“그런 게 아니야. 잠깐 연락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래.”
대답을 들은 카얀이 내 손에 쥐어진 수정구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기다려주지 못할 이유도 없다.”
카얀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곧장 수정구를 통해 클로에에게 연락했다.
― 마틴 님?
“무사히 도착했다. 다만, 아무래도 며칠 정도는 이 안에 머물러야 할 것 같아. 머무를 만한 장소를 찾아봐.”
― 며칠이나 걸릴 것 같은가요.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잘 모르겠다.”
― ……그렇군요. 알겠어요. 더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걸로 연락은 끝났다. 수정구를 근처에 툭 떨어뜨린 나는 검을 이리저리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사실 시간이 좀 촉박한 편이야. 가능하면 빨리 끝내자고.”
“그건 네가 하기 따름이다.”
말을 마친 녀석이 나를 노리고 대검을 휘둘렀다. 한눈에 봐도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다. 나는 막아내는 대신 피하는 걸 선택했다. 검이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허?!”
뒤이어 몰려오는 질풍에 내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간다. 착지에 성공한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바람이지만, 헤로스는 불을 쓴다. 나는 죽일 생각이 없지만, 헤로스는 너를 죽이려 들 거다. 방금, 너는 불타 죽었다.”
망를 마친 그는 머리 위로 대검을 들고 붕붕 돌리며 말을 이었다.
“대응책을 강구해라. 강한 자가 약자를 제압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반대는 지난하다.”
저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해도, 그 뒤에 몰려오는 바람이 문제다. 살의가 없는 바람이지만, 헤로스와 싸울 때는 살의가 듬뿍 담긴 폭염이 휘몰아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내가 방어하면 안 된다. 공격을 막아내고, 그 여파로 밀려드는 화염을 뒤집어쓰는 건 만들어낸 분신이어야 한다.
공격은 내가 하고,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분신은 방어에 집중한다. 그 사이, 틈틈이 허상을 만들어 적의 시선을 교란한다.
“더 빠르게 해라. 질풍처럼 빠르게, 폭풍처럼 강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같이 공격과 방어에 변화를 거듭해라.”
떠 있던 해가 저물었다. 나는 저 실피드에게 53번 패배했다.
“후우, 후우.”
“여기까지다. 오늘은 휴식하도록.”
나는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시간이 없어.”
겨울이 오는 게 문제가 아니다. 회색 서약을 빨리 얻을수록 로델린의 몸이 멀쩡할 확률이 높다. 너무 늦어진다면, 로델린의 몸 상태가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나빠질 수도 있다. 현재 그녀의 생활 스케쥴과 식단을 생각해보면, 신체에 영구적인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하니까.
“그리고 네 몸은 만신창이지. 지친 상태에서 이어지는 훈련은 몸을 망가뜨린다.”
내 앞의 모래 구덩이에 다시 물이 차오르고, 그 옆에는 빵을 닮은 짙은 갈색의 덩어리가 놓였다.
“식사하며 원기를 회복하고, 휴식해라.”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거기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겁나게 무례하네.”
사람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냥 슥 사라져버리다니. 상대가 없으면 싸울 수도 없다. 나는 멍하니 모래 위에 앉아있다 바닥에 놓여 있는 갈색 덩어리를 하나 들어 올렸다.
“모래 한 알 안 묻어있네.”
모래 위에 올려져 있는 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접시 위에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해서, 모래를 털 필요가 없었다. 입에 넣고 씹자, 빵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맛도 틀리고, 질감도 틀리다.
맛 자체는 대단할 것이 없었지만, 빠르게 포만감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신 나는 얼굴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망할, 이런 걸 만들 능력이 있으면 옷 한 벌만 주고 가지.”
나는 그렇게 구시렁거리면서 갈색 덩어리와 물을 먹어치웠다. 물은 다 들이켜고 나면 순식간에 다시 차오르고, 갈색 덩어리는 하나를 집어 먹을 때마다 하나가 더 생겼다. 식사를 마친 나는 주변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모래가 따뜻한데.”
이미 밤이 제법 깊었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사막도 제법 쌀쌀해야 하는데, 이 모래는 아직도 온기를 품고 있었다. 너무 덥거나, 너무 뜨겁지도 않다. 이대로 파묻혀서 자도 괜찮을 정도다.
“결국, 더 빨라야 해.”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내가 아니라 분신이다. 헤로스의 공격에 담겨 있는 힘과 불길을 생각하면, 분신은 공격을 한 번 막아내는 데 성공하면 바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헤로스는 공격이 막힌 다음에도 곧바로 연격을 이어가겠지.
“하다못해 카얀의 연격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데.”
내 패배는 항상 거기에서 기인했다.
분신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헤로스가 연격을 때려 넣는 속도보다 빨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분신과 나의 역할 분담이라는 방침을 유지할 수 있다.
방법을 고민하다 잠든 나는, 아침이 되자 눈을 떴다.
“일어났군.”
파묻혀 있던 모래에서 빠져나온 나는 몸에 달라붙은 모래를 털어내고 별다른 말 없이 물과 갈색 덩어리를 먹었다. 재빠르게 식사를 마친 나는 몸을 풀고 검을 손에 잡았다.
“이제 이어서 할 수 있겠지?”
“물론.”
그는 다시 양손으로 대검을 쥔다. 나도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았다. 녀석이 휘두른 검을 분신이 막아내고 사라진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참격을 다시 분신이 막는다. 점점, 휘두르는 대검의 속도가 빨라지고, 분신이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결국 분신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카얀의 공격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다.”
“망할,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검을 쥔 손에서 살짝 힘을 뺐다. 이 길이 맞는 것 같은데, 아직 뭔가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다.
계속해서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서른 번.”
분신을 통해 막아내는 건 현재로서는 최대 30번 정도가 한계다. 그 뒤에 이어지는 참격은 분신이 만들어지는 시점이 너무 늦어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해도 참격을 막아낸 다음의 여파에 나까지 휩쓸린다.
공격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나는 공격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유효타를 넣기가 굉장히 힘들다. 녀석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치명상을 입혔다고 할 만한 피해를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검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 카얀을 향해 말을 걸었다.
“뭐, 조언 같은 건 따로 해줄 생각 없어?”
“극복 방법은 스스로 생각해라. 그러지 못하면 삭풍의 족쇄를 가질 자격은 없다.”
나는 그 말에 바닥에 침을 뱉었다. 쪼잔한 녀석. 나 같으면 불쌍해서라도 뭐라고 한마디 해주겠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
“아니.”
내 말에 검을 들어 올렸던 카얀이 다시 대검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포기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치고받는 건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무식하게 계속 치고받으면서 뭔가 뾰족한 수단이 마련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근성이니 열정이니 패기니 하는 것들은 그냥, 머리로 생각하는 게 귀찮은 녀석들이 떠드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선택을 하곤 한다.
칼로 탱크 포신을 자르려고 들거나, 이전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둬서 지칠 대로 지친 투수를 또다시 선발로 뽑아놓고 근성으로 버티라 하는 감독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네.
아니 뭐, 굳이 그런 예를 들 필요도 없지.
닥치고 밤늦게까지 사람 붙잡아 놓는 게 제일인 줄 아는 회사들만 봐도 근성이나 열정 같은 소리가 얼마나 무쓸모한 생각인지는 알 수 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생각이 정리되면 부르도록.”
말을 마친 카얀이 서서히 흐릿해지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녀석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사막의 뙤약볕이 쏟아지고 있지만, 어차피 벽해의 피가 내 체온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 머리를 굴리는 데 있어 고온건조한 기후는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공격이 너무 빨라 분신으로 대응할 수 없다면.”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내가 더 잘하거나, 아니면 상대를 못나게 만들거나.
“내가 더 잘하게 되는 건 선택하기 곤란하지.”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는 내가 더 빨라지는 것도 선택해볼 만한 옵션이다. 오히려, 내 자신의 실력이 올라간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권장되는 편이지. 하지만 나에게는 여유가 없다.
지금은 야매, 또는 날빌이라고 불리는 선택지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다.
“카얀.”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곧바로 우리의 구릿빛 단백질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은 끝났나?”
“그래. 다시 한번 해보자.”
대꾸를 마친 나는 검을 들어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