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대검의 방향이 틀어진 채 모래에 박혔다. 대검이 땅에 박힘과 동시에, 휘감겨 있던 바람이 확 터져 나와 모래를 흩날린다.
휘날리던 모래가 가라앉자, 카얀의 목줄기에는 내 검이 닿아있었다.
“이걸로 첫 번째 승리다.”
이 녀석과 칼질을 하기 시작한 지 50일째 되는 날이었다. 내 말에 카얀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헤로스가 목에 검이 박힌다고 죽을 것 같나?”
“아니, 하지만 계속 유효타를 먹이다보면 그 자식에게도 한계가 오겠지.”
내 말에 카얀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려면 적어도 연속으로….”
“세번, 맞지?”
나는 약간 뒤로 빠져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시 해보자고.”
이젠 완전히 감 잡았으니까. 이제는 이게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걸 증명할 자신이 있다.
불타오르는 뙤약볕 아래에서 다시 한번 섬광 같은 검격이 우레 같은 소리를 품고 울려 퍼진다. 내 눈은 쉬지 않고 카얀의 움직임을 살피며 다음 공격을 읽고, 공격으로 전환할 시점과 방어를 취할 때를 노린다.
이어지는 싸움의 끝은 내가 마침내 세 번 연속으로 카얀에게 이기면서 그 끝을 고하게 되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나는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훔친 다음 바닥에 툭 하고 검을 버린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내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고, 나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 쏟아지는 물을 몸으로 받았다. 용광로에 들어간 쇠처럼 달궈졌던 몸이 쏟아지는 냉수에 빠르게 식어간다.
그 사이, 카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대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벌써 50일이 지났다. 네가 시간이 없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 조급한 기색이 없군.”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약간의 경탄이 느껴진다. 50일이라. 나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실제로는 안 지났잖아?”
내 대답을 들은 카얀이 움직임을 딱 멈추고 나와 눈을 마주친다.
“어떻게 눈치챈 거지.”
나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녀석을 바라봤다.
“네 말대로 50일이 지났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혀 기후 변화가 없잖아.”
제아무리 사막이라고 해도 50일이나 지나면 조금이라도 온도 변화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와 카얀이 싸우는 50일 동안 온도가 올라가는 기색도 없었고 그렇다고 떨어지는 기색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이상할 정도로 같은 온도가 유지되고 있는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
내 대답을 들은 카얀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확신에서 오는 여유였나.”
“왜, 실망했나? 조급한 가운데 평정심을 잃지 않고 인내하는 모습을 바랐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카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조급한 상황에서의 인내가 미덕이듯, 조급한 상황에서 이성을 잃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 것 또한 미덕이다.”
말을 마친 녀석은 나를 슥 훑어보고 말했다.
“이 태풍의 눈 속에서 열흘을 보내면, 태풍의 눈 밖에서는 하루의 시간이 흐르도록 조정되어있다.”
정신과 시간의 방인가. 역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나자 약간 의문이 생긴다.
“그 정도의 권능을 부릴 수 있는데 헤로스를 이기지 못한다니.”
“헤로스는 지옥의 태초마다. 따라서, 이 세계의 시간 조작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을 해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카얀과 싸운다면 헤로스가 유리하다는 건가.
“대화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이제 약속한 물건을 건네줬으면 좋겠어.”
내 목소리는 꽤나 부드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밖에서는 5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나는 엄연히 이 자리에서 저 녀석과 50일의 시간을 보냈다.
그 정도면 카얀에게 나름의 정이 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게다가,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녀석에게 배운 것도 많으니까.
“그래야겠지. 너는 삭풍의 족쇄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저 친구 입에서 자격이 있다는 소리가 나오니 상당히 기쁘군. 나는 옆에 고여있는 물을 들이켠 다음 이제는 너무 먹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갈색 덩어리를 씹어먹으며 대답했다.
“덕분이지.”
내 말에 녀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다. 네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형편없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카얀이 대답했다.
“금광석도 정제하지 않으면 돌덩이와 구분 할 수 없는 법이다.”
카얀이 한 손을 꽉 쥐자, 이제까지 우리가 머무르던 장소 외곽에 휘몰아치고 있던 바람이 더운 물속에 빠뜨린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듯 사라진다.
“받아라. 네 것이다.”
카얀의 손에는 짙은 황색의 팔찌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 팔찌를 받아 손목에 끼우려 하자, 카얀이 입을 열었다.
“한 번 끼면, 벗을 수 없다.”
나는 그 말에 이야, 하는 소리를 내고는 픽 웃었다.
“만록의 심장과 벽해의 피는 뭐 안 그랬나?”
만록의 심장은 내 심장을 다시 만들었다. 벽해의 피는 내 피를 대체했다. 피와 심장, 둘 다 내 몸에서 뜯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제 와 한 번 끼면 벗을 수 없는 팔찌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그냥 벗을 수 없는 정도라면 굉장히 안심되는데.”
심장이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감각이나, 온몸의 골수가 갈려 나가는 고통 같은 건 없다는 거잖아.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삭풍의 족쇄가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공기는 손으로 잡을 수 없으니까.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나는 그 말에 하하하, 웃고는 녀석을 바라봤다.
“신경을 갈아 끼운다는 살벌한 이야기는 하지 마라.”
내 말에 카얀이 대답했다.
“갈아 끼우는 게 아니다. 삭풍의 족쇄에 네 신경을 연결하는 거다.”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마법사들의 연결점과 비슷한 원리인 것 같은데.”
내 말에 카얀이 대답했다.
“인간 마법사들은 연결점을 활용해 대기 중의 마력을 재배열하지. 삭풍의 족쇄는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럼?”
내 말에 녀석은 내가 들고 있는 삭풍의 족쇄를 가리켰다.
“알게 될 거다.”
일단 한 번 잡숴봐, 뭐 그런 뜻인가. 내가 선호하는 전개는 아닌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일단 해보라니. 나는 손에 쥔 팔찌를 바라보다가 혀를 차고는 팔뚝으로 가져갔다.
죽거나 살거나. 확률은 50%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온몸에 짜릿한 느낌이 퍼졌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뭐야.”
내가 기대하던 수준의 고통이 아닌데. 뭐가 이렇게 맹숭맹숭….
“그럴 리가….”
없지, 씨팔.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가 산채로 눈알을 뽑아내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한다. 아니, 뽑아내는 게 아니라 압착기 같은 걸로 쥐어짜는 것 같은데! 눈깔의 먹물을 쏙 빼줄까? 라는 협박이 실제로 일어나면 당하는 사람이 받을 느낌이 이럴까?!
별안간 온몸에 쏟아진 고통은, 별안간 사라졌다. 바닥에 드러누운 나는 입에 남아있는 게거품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벼락을 한 30방 정도 더 맞는 편이 덜 괴로울 것 같잖아.
“망할, 얼마나 아픈지 세상이 흑백 화면으로 보일 지경이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이 흑백으로 보인다. 그, 1970년대 텔레비전처럼!
누워서 잠깐 시간을 보내자, 흑백으로 변했던 세상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다음은 뭔데. 내가 뭘 할 수 있게 된 건데.”
눈깔에 뻘건 무늬라도 생겨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환술을 걸 수 있게 되는 거면 좋겠는데.
“익숙해져야 할 거다.”
나는 카얀의 말에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녀석을 바라봤다. 녀석은 손에 다시 대검을 들고 있었다.
“봐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내 눈에 녀석의 팔 주변에 푸른 빛이 모이는 것이 보였다. 쿵, 하고 휘둘러진 검이 땅을 찍는 순간 녀석의 팔에 모여있던 푸른 빛이 사라졌다.
“방금 그거, 마력인가?”
내 말에 카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눈에는 이제 볼 수 없는 게 정상이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희미한 빛을 뿌리는 반투명한 실 수십 가닥이 만들어져 그물처럼 얽힌 다음, 너울거리기 시작한다. 손을 뻗자, 뭔가 단단한 저항감이 내 손에 느껴진다. 보호막?
“볼 수 있다면 만질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간섭할 수 있다.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은 벨 수 있다는 것이다.”
뭐, 그 말이 논리적으로 합당한 추론인지는 뒤로 미뤄두자고.
“삭풍의 족쇄는 형체가 없는 것들을 붙들어 강제로 형체를 부여해, 검으로 밸 수 있게 만든다. 부여된 형체는, 삭풍의 족쇄를 가진 자만 볼 수 있고, 간섭할 수 있다.”
마력만 벨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군.
나는 검을 들어 올려 그 실타래를 향해 휘둘렀다. 본디, 보호막은 물리적인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 마력으로 만들어낸 장벽이다. 칼날이 보호막을 향해 휘둘러졌다면, 보호막은 그 칼날을 막아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내가 휘두른 검에 저항은 없었다.
대신, 너울거리던 실타래들이 칼날에 잘려 흩어진다. 다시 손을 뻗어보자, 내 손을 막고 있던 보호막은 사라져버렸다.
“헤로스가 휘감고 있는 화염에도 통하나?”
“그렇다. 문제는, 네가 눈에 보이는 헤로스의 마력을 검으로 밸 수 있느냐의 여부겠지만.”
대충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드디어 오랜 숙원이 풀렸네.”
이거면 더 이상 마법에 관한 문제 때문에 엘렌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그 망할 대도서관 관장의 저택에서 어버버했던 걸 생각해보면, 삭풍의 족쇄로 인해 얻게 된 능력이 얼마나 유용한지는 굳이 실전에서 테스트할 필요도 없다.
안 그래도 공짜로 도움만 받아서 좀 미안한 감이 있었는데 이걸로 더 이상 미안할 일은 없다.
“꼭 베어야만 하나?”
“너는 검사니, 베는 행위가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수단은 상관없다.”
잡아서 뜯어낼 수도 있고, 때려 부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네가 여기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다.”
나는 그 말에 혀를 차고는 수정구를 손에 쥐고 클로에에게 연락을 취했다.
― 연락받았어요. 뭘 하고 계셨던 거에요? 연락을 취해도 수정구가 먹통이었어요.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세자 저하께 보고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뭐라고 해야 하나… 나는 고민하다가 잠시 뒤 대답했다.
“말하자면 길어. 일단, 내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서 회오리가 몰아치던 곳 중심까지 와줘.”
― 곧바로 준비해서 갈게요. 이틀 정도 걸릴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카얀을 바라봤다.
“이틀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물이랑 식량 없이 이틀 동안 알몸으로 사막의 뙤약볕을 쬐면 너 같은 존재들은 몰라도,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내 말에 카얀이 한쪽 눈을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별수 없군. 이틀 정도는 더 돌봐주도록 하지.”
그거참 듣기 좋은 소리네. 대답을 들은 나는 팔뚝에 장착된 삭풍의 족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이틀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을 테니, 내가 이 물건에 적응하는 걸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볼 수 있고, 벨 수 있다고 해도 아직 익숙하지 않다.
“그러도록 하지.”
말을 마친 카얀이 손을 들어 올렸다.
“대검은 쓰지 않겠다.”
“상관없어. 지금 익숙해지고 싶은 건 검술이 아니니까.”
대화는 끝나고, 클로에가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이틀의 시간 동안 나는 카얀과 삭풍의 족쇄를 다루는 방법에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