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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39화 (239/275)

239화

이틀 뒤, 클로에가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옷은…?”

“바람에 휘말렸을 때 갈려 나갔다.”

내 말에 클로에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5일 내내 알몸으로 있으셨던 거에요?”

사실, 알몸으로 지낸 시간은 더 길지만, 어차피 설명하기도 힘든 거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클로에가 옷을 건네주었고, 나는 50일 만에 문명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50일 만에 옷을 입으면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하긴, 몇십 년을 옷을 입고 지냈는데 그게 불과 몇십일 만에 불편해질 수는 없지. 옷을 다 갈아입은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어깨를 털었다.

“이제 좀 사람 같네.”

“동감이에요.”

카얀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클로에의 시선은 내 팔뚝에 박혀 있는 삭풍의 족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마틴 님이 찾던 물건인가요?”

“그래.”

말을 마친 나는 손목에 고정된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말했다.

“브레이서는 네가 사용하면 되겠네.”

내 말에 클로에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마법은 어떻게 대항하시려고요?”

“괜찮아.”

나는 간단하게 클로에에게 삭풍의 족쇄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대해 말해주었다. 설명을 다 들은 클로에가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검으로 마법을 베서 무력화시킬 수 있다니. 그게 일반적으로 가능했다면 이 세상에 마법사들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을 거예요.”

그렇겠지. 애초에 기사와 마법사 사이에 존재하는 육체 능력의 간극은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어쨌든, 이걸로 필요한 건 다 얻었어.”

“그러게요.”

남은 건, 세자에게 연락해서 회색 서약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그곳으로 향하는 것뿐이다. 클로에에게 맡겨두었던 수정구를 받아 든 나는 세자에게 연락했다.

― 클로에 로니세라 경.

“쉰내 나는 남자 놈이 대답을 돌려드려서 죄송합니다.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내 대답을 들은 세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고양되었다.

― 이런 반가울 데가 있나. 자네가 나에게 연락했다는 건 목적한 물건을 손에 넣었다는 뜻이겠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하하하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럴 리가 없지. 자네가 염치가 있다면 실패한 주제에 그렇게 멀쩡한 목소리로 연락할 리가 없으니.

로델린의 감금 생활에 도움을 주고, 교단과 귀족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를 왕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염치가 있다면 실패했을 때 목소리가 이러면 안 된다.

“삭풍의 족쇄를 획득했습니다. 이제 회색 서약에 도착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 몰튼브라운 숲.

몰튼브라운 숲이라.

“지명이 어쩐지 모르게, 파이크 왕국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요.”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 슬프게도, 자네 짐작이 맞아. 내 나라의 외곽에 위치한 큰 숲이지. 그 숲 인근은 땅이 무르고 토질이 좋을 뿐 아니라, 지하수도 풍부해서 농사짓기 좋은 땅이야.

나는 다시 파이크 왕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베로나 제국에서 테네스 공국에 도달하고, 뒤이어 파이크 왕국이라. 정말로 이 대륙 전체를 다 돌아보는 것 같은 느낌이군.

― 인근에 적당한 규모의 마을이 하나 자리 잡고 있어. 지금의 성장세라면 2, 3년 안에는 도시로 격상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발전한 마을이지. 사람을 보내 둘 테니….

나는 거기까지 말을 들은 다음 곧장 대답했다.

“젠장, 바로 그 마을에 연락해서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대피시켜야 합니다.”

―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를 막기 위해서 헤로스가 소환될 거다. 카얀과 시렌, 에린실은 이를 예견하고 있었다.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 이전에, 쿠르스트 산맥에서는 마법사가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 이 세상에 헤로스를 강림시켰다.

즉, 헤로스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하다. 나는 세자에게 위와 같은 설명을 해준 다음 말을 이었다.

“헤로스가 소환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지, 엘렌 리버플로우 양과 잠시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 그러도록 하게. 나는 즉시 연락을 취해 해당 마을에 거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겠네.

나는 세자와의 연락을 끊고, 바로 엘렌에게 연락을 취했다.

― 무슨 일이야?

“헤로스가 소환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알 수 있어? 일반인 기준으로.”

내 말에 엘렌이 응? 하는 소리를 내고 이내 고민하다 대답했다.

―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주도한다면… 삼백 명이 필요할 거야.

대답을 마친 엘렌이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켜고는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설마.

“회색 서약이 자리 잡은 숲 근처에 마을이 하나 있어. 내가 회색 서약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헤로스가 직접 모습을 나타낼 수도 있어. 아니, 나타날 거야.”

내 말에 엘렌이 급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를 방해하던 흑마법사는 상당한 실력자였어! 해당 마을의 사람들을 희생한다면 충분히 헤로스를 이 세상에 강림시키고도 남아. 세자 저하에게는 말씀드렸어?

“그래, 내가 너와 이야기하는 동안 마을에 거주민들을 대피시키라는 지시를 내리시겠다고 했어.”

내 말에 엘렌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 서둘러야 할 거야.

엘렌과의 연락을 마친 나는 다시 세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 해당 마을에 미리 배치해 두었던 첩보국 요원들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

나는 그 말에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이미, 그 광대 자식은 마을의 거주민을 이용해 헤로스를 소환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 * *

“음흠흠~”

광대는, 나무 막대 위에 사람의 머리 수십 개를 올려놓은 다음 등짐을 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때, 봄날에 흐드러지게 핀 꽃 같지 않니?”

광대는 시선을 돌려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거기에는, 몸이 묶인 채 입에 재갈을 문 아이들이 오십 명 정도 있었다. 아이들의 바지는 이미 오줌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학, 아학!”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본 광대가 실성한 듯이 웃으며 아이 중 하나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다가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꼬마야, 저 머리통 중에 어떤 게 네 부모의 것인지 알겠니? 한 번 찾아보는 게 어때, 이 형이 좋은 선물을 줄게.”

“흐윽… 흐읍….”

아이는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몸을 떨 뿐이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던 광대가 아이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쳤다.

“대답해, 이 새끼야!”

아이의 입에서 끄으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네, 네! 네! 네!”

쉬지 않고 네를 쏟아내는 아이를 보던 광대는 이잉, 하는 소리를 내고는 아이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렸다.

“하긴, 아직 풍류를 알기에는 좀 어린 나이긴 하지.”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히죽 웃으며 아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재미는 느낄 수 있겠지. 자 잘 봐라.”

광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사람의 머리통 몇 개를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물구나무선 채 발을 이용해 사람의 머리통으로 저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어때, 좀 재미있나?”

그 말과 동시에, 아이들의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이 스르륵 풀렸다. 아이들은, 그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답하라고 했을 텐데!”

그 말에 일제히 아이들이 우는 소리로 재미있어요! 하고 외친다.

“그럼 박수를 쳐야 할 거 아니야 이 새끼들아! 무슨 관객이라는 것들이 하나하나 다 알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거냐! 박수! 쳐!”

그 말과 동시에 아이들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스르륵 풀렸다.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한 아이들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힘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환호성은 어디에 팔아먹었어!”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외쳤다. 그럴수록, 그 눈에 자리 잡은 두려움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래, 그래, 그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니 나도 기쁜데! 하학!”

광대가 꽉 주먹을 쥐자. 다시 한번 아이들의 몸이 밧줄로 단단히 묶이고, 입이 재갈로 틀어막힌다.

“그럼, 공연료를 내야겠지?”

그 뒤, 마을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살아있는 사람도 없었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도 없었다. 쌓여 있는 시체들 위에 턱을 괴고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광대의 입에서 낮은 읊조림이 흘러나온다.

“뒤집힌 별 아래 광기를 품고, 미천한 종이 주인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일만 팔천의 전장을 지배하는 분. 머리에 불을 이고 내디딘 걸음 앞에 패배 없는 분.”

마을 안에 고여있던 피에 화염이 엉겨 붙기 시작한다. 짙은 유황의 냄새를 품고, 바람 소리를 타고 희미하게 비명이 울려 퍼진다. 곧이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더해진다.

“주인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부디 정성스레 준비한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소인에게 그 위엄있는 모습의 편린을 보여주소서.”

피를 연료 삼아 마을 전체를 불사를 기세로 타오르기 시작한 불은 서서히 광대의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 안에 흐르던 모든 피와 살점들이 전부 그 화염에 의해 먹어치우고 나자. 불꽃 속에서 헤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타오르는 두개골, 눈동자를 대신한 화염. 사방으로 휘날리는 불티와 재. 손에 쥐고 있는 거대한 몽둥이를 닮은 숯. 헤로스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 기온이 치솟아, 이 대지에 자리 잡고 있던 초목들이 누렇게 뜨고, 이내 불타올라 검은 숯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헤로스 님. 부디… 용서를.”

바닥에 엎드린 광대에게는 이전과 같은 가벼움이 없었다.

― 일을 여기까지 어그러뜨려 놓고 너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냐.

“최선을, 최선을 다했습니다.”

헤로스가 손을 뻗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광대의 몸이 확 들어 올려져 허공에 매달린다.

― 전쟁은 언제나 과정이 아닌 결과를 묻는다. 너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광대의 가슴에서 들렸다. 광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광대는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내는 순간, 지금보다 더 최악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내, 툭. 하고 광대의 몸이 바닥에 떨어진다.

― 용서를 원한다면, 응당한 전공을 쌓아라.

말을 마친 헤로스는 거대한 숯덩이를 들어 올려, 가볍게 횡으로 그었다. 그것만으로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몰튼브라운 숲 외곽에 타오르는 화염이 장벽처럼 펼쳐진다.

“헤로스 님, 그… 파이크 왕국에서 이를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 이 조막만 한 나라의 전 병력이 달려들어도 나를 어쩔 수 없다.

현 상황에서, 헤로스에 대적할 수 있는 건 마틴 레드우드 말고는 없다.

― 대적할 수 있다 해도, 그 끝에는 내 승리가 약속되어있다. 그 건방진 노예는 패배할 것이고, 마땅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헤로스는 말을 마친 다음 마을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대한 돌을 향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거대한 돌이 순식간에 흐물흐물하게 녹아 용암처럼 흘러내리나 싶더니, 이내 끓어오르며 권좌의 형상으로 변한다. 그 위에 앉은 헤로스는 별다른 말 없이 대검을 권좌 옆에 둔 채 마틴 레드우드의 도착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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