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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40화 (240/275)

240화

몰튼브라운 숲으로 향하며, 나와 세자는 쉬지 않고 수정구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병력은 보내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태초마 헤로스가 자리 잡고 있을 확률이 높다. 보통의 병력이라면 몇만을 때려 박아도 헤로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의미 없는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 그렇다고 그냥 둘 수는 없지 않나. 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내 입지가 흔들릴 거야. 솔직히 말해, 이 이상으로 내 지위가 흔들리는 건 받아들이기 힘드네.

이미 나를 비호하는 과정에서 세자의 지위는 충분히 손상된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왕국 안의 한 마을 백성들이 전멸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기는 곤란하겠지.

세자의 다소 격양된 목소리에 나는 차분하게 타이르는 어조로 대답했다.

“지금 제가 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잠시 침묵했다.

― 그래, 대외적으로 자네는 지금 내가 지시한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 중으로 되어있지.

그래도 머리가 굴러가는 편이라서 다행이네. 나는 이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자 저하께서 저에게 무슨 임무를 비밀리에 지시했는지도 미리 입을 맞춰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로스의 토벌이라는 임무라면, 세자가 비밀리에 지시하기 충분한 사안이다.

― 교단 쪽에서는 왜 자신들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게거품을 물 텐데.

“그 치들은 저를 악마와 계약한 놈이라고 몰고 가지 않았습니까. 신뢰할 수 없는 게 당연하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해당 정보는 공유하지 않는 게 당연하죠. 게다가….”

오히려 나중에 일이 다 끝났을 때 교단에게 할 말이 생기게 될 테니 더욱 좋다. 내가 악마와 계약한 녀석이라면, 헤로스를 막는 게 아니라 그에게 힘을 보태는 게 정상이잖아. 내가 악마와 계약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때 몰튼브라운 숲 인근에서 헤로스와 싸운 것은 좋은 근거가 될 거다.

내 설명을 다 들은 세자가 후우, 하는 소리를 냈다.

― 세자 노릇도 해먹을 만 한 일이 아니야. 요즘 들어 특히 더 그렇군.

“큰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큰 난관을 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하잘것없는 것들뿐이다.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티슈나,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은 것들뿐이지. 뭔가 제대로 된 걸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들어야 한다.

― 동의하네. 큰 난관이라. 까놓고 말해서 큰 난관을 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인 것 같네만.

“세자 저하께서 위험을 감당할 생각으로 저를 지원해주시지 않았다면 저 또한 곤란했을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건 저뿐이 아닙니다.”

세자도 나름의 곤란을 겪고 있고, 로델린도 힘든 생활을 유지하는 중이다. 나를 쫓아 온 클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엘렌도 마찬가지다.

―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 자네의 말대로 별도의 조치는 취하지 않겠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하들이 반발하면 그저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 정도의 대답만 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 그 정도는 나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어 이 사람아. 그냥 두면 아주 내 식단까지 짜줄 기세군.

“아침에는 오트밀과 삶은 달걀, 샐러드에 사과 정도가 좋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런 망할, 너는 한 나라의 세자에게 말 사료를 먹일 생각이냐.

아, 생각해보니 그렇겠네. 이 시대에 귀리는 한 나라의 왕족이 먹을 만한 물건으로 생각되지는 않는 법이지. 게다가 롤러 압착 같은 방법도 개발되지 않았을 테니 그 식감과 맛도 엄청날 테고, 소화도 잘되지 않을 거다.

“검소한 생활을 하신다면 백성들도 세자 저하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니면 자기들과 같은 수준이라 생각하고 기어오를 수도 있지.

틀린 말은 아니다. 계급사회에서는 당연히 귀족의 생활과 평민의 생활은 의식주에서부터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해야 한다. 그게 귀족의 위엄을 살리는 일이고, 평민들로 하여금 귀족에게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 죄송할 것까지 있나. 그냥 농담이었을 텐데.

사실 농담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하하 웃었다. 잠깐의 웃음 끝에, 세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 이길 자신은 있나?

“반반 정도를 예상하시면 됩니다.”

내 말에 세자가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 도박을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 편인데.

그런 것치고는 나 하나 믿고 걸어놓은 판돈이 굉장한데.

“반반 정도면 완전히 못 할 만한 도박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 그건 그렇지. 대충 도박장에서 카드놀이 하는 승률보다는 높군.

말을 마친 세자는 방금보다 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기지 못한다면, 왕도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게. 차라리 거기에서 죽어야 할 거야. 이 나라의 차후 수백 년이 자네 손에 달려있네. 승리를 손에 넣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자네가 있을 자리는 이 파이크 왕국에 없어.

저 말에는 분명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세자가 나에게 친근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잔정에 휘둘릴 만한 인간은 아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헤로스를 이기지 못한다면, 왕도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이대로 영영 실종되는 편이 세자에게 더 낫다. 최소한, 돌아오지 않는다면 교단에서 내가 악마와 계약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수습하는 편이 위태롭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하는 데 성공할 확률이 있다.

― 패배하면, 자네는 이 나라의 배신자가 될 거야. 아니, 나부터 나서서 그렇게 만들 거야. 로델린 레드우드 또한 더 이상 비호 하는 일이 없을걸세.

“그렇겠지요.”

차분한 대답을 들은 세자가 말을 이었다.

― 나를 비정하다 생각하게. 내가 이 나라의 세자로서 성인식을 받았다는 것은 그런 뜻이니. 버려야 할 상황에서도 버리지 않고 붙드는 것은 미련일 뿐이야.

잠깐의 침묵 뒤, 세자가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실패해도, 그대를 추격하지는 않을 거야. 모습을 감추고, 첫눈이 내리기 전까지 죽은 듯이 살게. 그대라면 그 정도의 능력은 있을 테지.

나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실패는 생각하지 않을 거다. 헤로스와 마주치면, 나는 이기겠다는 생각 하나로 싸울 거다. 그러지 못하다면, 내 손에 쥔 검은 부러질 것이다. 이전에 그랬듯이.

― 내가 해줄 말은 이걸로 끝이네. 무운을.

“감사합니다. 이긴 다음 당당하게 연락드리겠습니다.”

― 기다리고 있지. 다음에 나와 그대가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수정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왕궁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상황일 거야.

그걸로 세자와의 대화는 끝났다. 나는 수정구를 집어넣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오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몰튼 브라운 숲 인근의 마을까지는 아직 며칠 남았어요.”

“도착하면, 여관에서 맛있는 거라도 좀 먹고 푹 쉬자고. 간만에 고기가 땡기네.”

큰 싸움을 앞에 두었다면, 역시 고기가 최고지. 풀떼기나 달걀 부스러기 같은 걸로는 매가리만 빠질 뿐이다.

“아예 부탁해서 값을 치르고 돼지 한 마리를 준비할까요?”

“둘이서 돼지 한 마리를 다 처먹자고?”

내 말에 클로에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남기면 버리죠.”

“이 시점에도 밥을 굶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내 말에 클로에가 하하, 웃은 다음 대답했다.

“저희가 안 남긴다고 그 사람들의 배가 차는 것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남겨서 마을 사람들이 나눠 먹도록 하는 편이 더 좋을걸요.”

“세상에, 먹고 남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주자는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얼굴을 팍 구기고 대답했다.

“그럼 그냥 빵 쪼가리에 훈제 청어나 뜯으시던가요.”

그럴 수야 없지. 그런 걸 먹고 싸우면 이길 싸움도 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돼지 한 마리 가격이 얼마나 하려나.”

그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마을 어귀에 진입했다. 물론, 신분을 감추기 위해 후드를 눌러 쓴 채였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면 교단 친구들이 굉장히 좋아할 테니까.

이전에 베로나 제국에서도 그랬지만, 얼굴을 가리고 누구에게 들킬까 봐 걱정하며 돌아다니는 꼴이 마치 연예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네.

적당한 여관에 자리 잡은 우리는 음식을 시켰다.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사자고 한 건 그냥 농담이었고, 그냥 육류 위주의 식사가 우리 앞에 놓였다.

“광대가 죽었을까?”

내 말에 클로에가 포크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겠지.”

광대도 살아있을 거다. 나는 그 말에 접시 위에 올려진 고기를 자르며 대답했다.

“살아있다면, 네가 상대해야 할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우와,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미친놈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데.”

“설마 이 상황에 투정 부리지는 않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이긴다, 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붙들어 놓는 거라면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괜찮겠어? 그 얼굴이 반쪽이 난 여자에게도 패배했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태초마를 소환했잖아요. 그 정도의 일을 해낸 다음에 지치지 않았을 리가 없죠. 순식간에 원래 컨디션을 찾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약해져 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그렇다면, 클로에가 버텨 줄 수는 있을 거라고 기대해 볼 만 하지.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에는 근거가 충분해 보인다.

“그럼, 그 광대에 대해서는 맡겨두마.”

어차피 싸움이 시작되면 나는 헤로스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을 거다.

“헤로스와 싸우는 와중에 뒤통수를 맞으면 난 끝이야.”

저항할 방법이 없다. 클로에가 광대를 막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다 끝나고 나면 월급은 올려주시겠죠.”

클로에의 말에 나는 혀를 차고는 한마디 했다.

“월급만 오르는 선에서 끝나지는 않을걸.”

내 말에 클로에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상여금은 넉넉할수록 좋아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려니, 옆 테이블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한다.

“사제님 말씀 들었어? 그 마틴 레드우드가….”

그 이야기를 들은 클로에는 입으로 가져가던 물잔을 잠깐 멈췄다.

“악마와의 계약이라니. 난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군그래.”

다른 녀석의 말에 처음 말을 꺼낸 녀석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사제님께서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젠장, 나라 굴러가는 꼴이 아주 말도 아니군그래.”

그러던 와중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녀석이 그쪽을 향해 말했다. 얼굴이 제법 붉은 것이 술을 거하게 걸친 모양이다.

“심지어 세자 저하까지 한통속이라는 말이 있더만.”

그 말에 사람들 모두가 그를 보며 쉬이, 하는 소리를 냈다.

“교수형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요?”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세자 저하께서는 도대체 왜 마틴 레드우드를 왕궁으로 불러들이지 않는 건데?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니야?”

그 말에 그 취한 녀석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자식, 주말 예배에 가서 주워들은 소리를 아주 그대로 읊는군그래.”

“사제님이 하신 말씀이잖아! 게다가, 아주 일리가 없는 소리도 아니지. 귀족 나으리들이 아주 왕궁 앞에 진을 치고 시위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와 클로에는 잠깐 눈을 마주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자 저하랑 마틴 레드우드 님에 대한 민심이 영 좋지 않네요.”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잖아? 오늘 하루 쉬고, 빨리 몰튼포레스트로 향하자고.”

저 사람들에게 화가 난 건 아니다. 애초에, 귀족도 아닌 평민들이 세상 흘러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창구는 매일 주말 거행되는 예배 정도가 한계니까.

어차피, 다 잘 끝나고 나면 다시 뒤바뀔 여론이다. 방에 들어간 나는 내일 새벽 출발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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