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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42화 (242/275)

242화

쏟아지는 화염구를 검으로 전부 잘라낸 나는 다시 한번 헤로스에게 접근했다. 어차피, 거리를 벌리는 건 나에게 어떤 이점도 없다.

휘둘러지는 대검과 주먹. 한 번에 두 개의 공격을 분신으로 막아 낼 수는 없다. 휘둘러지려는 대검은 분신으로 차단하고, 주먹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들어 막아야 한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으로 주먹을 막아낸 나는 입을 약간 벌렸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내 몸이 뒤로 쭉 밀려났을 뿐이다. 충격으로 인해 눈앞이 점멸하는 와중, 내 발아래에 헤로스의 마력이 모이는 게 보인다.

“크으.”

나는 그런 신음을 내며 바닥에 검을 박아넣고 그대로 올려 그었다. 모이던 마력이 흩어졌다. 분명한 건, 내가 이러는 동안 헤로스가 놀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시선을 들자, 헤로스는 서 있던 자리에 없었다. 머리를 들어 올리자, 대검을 들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불타는 해골이 보였다.

“아주,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나는 다소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헤로스를 향해 분신을 마구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하나씩 만들어지는 분신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헤로스를 향해 연달아 달려든다. 헤로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분신들을 하나하나 주먹으로 쳐내면서, 빠르게 내 쪽으로 추락한다.

숯덩이가 땅을 내려찍자 불기둥이 성층권을 뚫어버릴 기세로 솟구친다. 이 정도면 왕도에서도 보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 불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열기가 숨을 턱 막히게 한다.

“어쩌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말한 다음 그 불기둥으로 다가가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솟구치던 불기둥은 점점 그 위세가 약해지더니, 이내 사그라든다.

“허세 부리지 마. 나한테 통하지 않는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아 이 곰탕 국거리 같은 자식아.”

내 말에 헤로스는 대답하는 대신 손에 쥐고 있던 거대한 숯덩이를 휘둘렀다. 숯덩이의 갈라진 틈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넘실거린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난타전에 땅이 갈라지고, 갈라진 땅에서는 유황불이 치솟는다. 나는 제대로 숨을 몰아쉴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헤로스와 격돌했다.

분신으로 공격을 막아내고, 쏟아지는 유황불과 불티, 재를 검으로 잘라낸다. 헤로스는 계속해서 나와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며 공격을 퍼붓고, 나는 녀석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하기 위해 기를 쓰고 앞으로 나아간다.

― 발악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군.

결국, 검격을 한 번 허용하고 뒤로 물러난 내 양팔에는 헤로스의 화염이 만들어낸 화상이 가득하다.

“원래 사람이 발악하는 모습은 다 안쓰러운 법이야.”

분신도 헤로스의 마력을 잘라낼 수 있다. 내가 만들어낸 내 분신이니까. 하지만, 헤로스는 그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빠르고 강력하다. 쉽게 풀릴 리가 없다는 생각은 추측을 넘어 확신이 되었다.

산을 통째로 녹여 도자기로 만들어 버리는 녀석과 싸우는 중이잖아.

“그리고 중요한 건, 너도 나를 아직까지 죽이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이지.”

아가리를 놀린 것 치고는 나는 30분이 넘도록 계속해서 헤로스와 대치 중이었다. 저 녀석도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를 상대하는 게 제법 까다롭다는 증거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헤로스가 지금처럼 나를 상대했다면 나는 10초도 견디지 못하고 숯덩이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해낼 수 있다는 최면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정신을 굴복하지 않게 만들 수는 있다. 그리고, 내 정신이 굴복하지 않는 한 내 손에 쥐어진 검은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 내가 건네준 검을 가지고 나에게 대치하는구나. 가소롭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이젠 내 꺼잖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가 휘두른 검이 헤로스의 숯덩이와 격돌한다. 공격은 내가 했지만, 뒤로 밀려나는 것도 나였다. 나와 헤로스가 격돌했던 자리에는 녹아내린 용암으로 작은 웅덩이가 생겼다.

― 마력으로 만들어낸 화염으로 너를 해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

헤로스가 그런 중얼거림과 함께 숯덩이를 땅에 박아넣고, 그대로 확 올려친다. 그 바람에 뒤집힌 토지가 나를 향해 쏟아진다.

“이건.”

이건 마력으로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다. 나는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그 박살난 대지의 파편들을 받아낸다. 몸을 후려치는 돌조각들이 둔중한 타격음을 낸다. 나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가 바닥을 굴렀다.

물수제비처럼 바닥 위에 튕기던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헤로스의 검이 보인다. 분신으로 숯덩이에서 흘러나오는 화염을 잘라내고, 그대로 옆으로 굴렀다.

화염이 휘감기지 않은 헤로스의 공격은 땅을 박살냈다. 퍼져나가는 충격파가 내 몸에 닿자 눈앞이 흔들린다.

“크으으.”

추가타를 허용하면 안 된다. 계속해서 분신을 만들어내며 헤로스의 공격을 늦추고, 옆으로 빠지는 허상과 함께 뒤로 빠졌다.

계속해야 한다. 결국, 저 녀석도 허상과 나를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분신과 허상도 구분할 수 없겠지. 나는 녀석의 바로 앞에 허상을 만들어 공격하는 형상을 취하게 했다. 곧바로 헤로스가 손을 뻗는다.

그때, 녀석의 뒤편에 나타난 분신이 헤로스의 목을 노린다.

한 번. 단 한 번만 제대로 때릴 수 있다면.

― …….

헤로스가 왼발을 크게 구르자 흙기둥이 치솟는다. 뒤를 노리고 달려들던 분신이 솟구치는 흙에 휘말려 사라졌다. 그 모습은 본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

“너만 그럴 수 있는 줄 아냐.”

나도 마찬가지로, 헤로스처럼 땅에 검을 박아넣고 휘둘러 헤로스를 향해 흙더미를 쏟아냈다.

― 한심하군. 네 녀석과 내가 같은 수준으로 보이나.

헤로스가 앞으로 손을 뻗자, 녀석을 향해 쏟아지던 돌덩어리가 그대로 사라졌다. 아니, 저건 쏟아지던 흙더미가 허공에서 기체로 변한 거다. 녹는 점을 넘어서, 순식간에 끓어올라 버린 거다. 나는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전 내 눈으로 본 장면은 보고도 눈알을 의심할 정도로 엄청났다.

녀석은 자신 앞의 땅을 순식간에 녹이고는, 검을 휘둘렀다. 참격을 따라 바닥에 고인 용암이 확 일어나 나를 향해 덮쳐든다. 마찬가지로, 저 용암은 마력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닥을 굴러 밀려오는 용암의 파도를 피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막을 수는 없다. 내가 삭풍의 족쇄를 통해 막을 수 있는 건 원인이지, 마력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다. 헤로스가 만들어내는 화염은 막아 낼 수 있어도, 그 화염이 녹여서 만들어낸 용암은 피해야 한다.

* * *

클로에는 검을 들어 올린 채 눈앞의 광대와 대치 중이었다.

“헤로스 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클로에는 레이피어를 연신 내지르며 대답했다.

“당연히.”

광대는 클로에의 공격을 피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저 광경을 보고도 저 하찮은 놈이 헤로스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머리는 괜히 달고 다니는 모양이군 그래?”

클로에는 광대의 가슴팍에 레이피어를 박아넣고 터뜨리며 대답했다.

“마틴 님이 이길 거야. 내가 네 녀석을 이기듯.”

클로에의 말에 광대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를 이긴다고? 나는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왔다!”

“저런, 오래 산 것 치고는 실력이 형편없네.”

클로에의 말에 광대는 손에 쥐고 있던 폭죽을 터뜨렸다. 연기와 함께 폭죽으로부터 오색 빛깔의 불꽃이 터져 나온다. 클로에는 충격파를 쏘아내 그 불꽃들을 밀어낸 다음, 광대에게 바짝 붙는다.

“이미 마틴 님은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만한 일들을 수도 없이 처리했어.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야.”

“암, 그렇게 믿고 싶겠지.”

광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헤로스와 싸우고 있던 마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클로에는 그걸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광대를 응시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네 주인이 저리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데, 너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거냐?”

“그게 마틴 님을 돕는 일이야.”

신경을 분산해서는 안 된다. 마틴은 헤로스를 상대하고, 클로에는 광대를 상대한다. 그렇게 정해놓았다. 그렇다면 클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광대에게서 시선을 떼어놓으면 안 된다. 잠깐의 빈틈이 광대로 하여금 마틴을 위협할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저거 봐, 네 주인놈은 팔 한 짝이 날아간 모양인데. 오른팔이 날아간 자리를 꽉 부여잡고 있는 꼴이 아주 가관이구나.”

머리통이 날아갔다고 해도 보지 않을 것이다. 광대는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며 흑마법을 쏟아내고, 클로에는 그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집요하게 광대를 노린다.

엘렌의 조언은 사실이었다. 광대는 이전에 마틴과 싸울 때와는 다르게 많이 약해져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속도도, 그 위력도 클로에가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다.

“할 수 있어.”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여기에서 클로에가 광대를 이기는 데 성공하면 마틴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마틴의 승률이 조금이라도 더 오를 것이다. 지금 클로에의 머리에는 그것 하나 말고는 다른 생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

극도의 집중력과, 확고한 목표 속에서 클로에의 움직임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심장의 통증이 클로에의 몸을 덮쳤다. 두근거리며 피를 보낼 때마다 심장에 박힌 구심점이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파괴하려 든다. 당장이라도 검을 멈추고 가슴을 움켜쥐고 싶은 통증.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잊을 정도로 클로에의 머리가 선명해진다.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가, 어떻게 공격해야 하고, 어디로 피해야 하는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인다.

순식간에, 광대의 몸에 레이피어가 다섯 번 박히고 폭발했다. 신체가 너덜너덜해진 광대는 당황하며 뒤로 빠진다.

“어딜…… 가려고.”

클로에의 몸이 그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해 광대에게 바짝 붙었다. 광대가 재빠르게 흑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뭔가를 해보기 전에 클로에의 레이피어가 먼저 그 손을 꿰뚫는다.

“갑자기?!”

광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검에 찔린 손을 바라봤다. 방금 전 움직임은, 광대가 설사 몸이 정상이었다 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당했을 정도로 민첩하고 정확했다.

“…….”

클로에는 그런 광대의 중얼거림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눈앞에 보이는 광대의 움직임과, 찢어질 것처럼 날뛰는 심장의 구심점에서 전달되는 고통뿐이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이 흐려지고, 다른 것들이 흐려진 만큼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선명해진다.

클로에의 상태는 마틴 레드우드가 카루토스 타카운과 싸우면서 느낀 감각과 어느 정도 유사하면서도, 크게 달랐다.

싸우면서 마력을 회복하는 게 아니다. 심장이 박살나기 직전이다. 검을 배운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고, 더 이상 마력의 운용을 포기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심장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정상이다. 심장의 마력이 날뛰기 시작한 지금 클로에가 움직이는 건 분명히 비정상의 영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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