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43화 (243/275)

243화

하지만, 클로에는 그 고통을 억누르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흐윽, 하…….”

격렬해지던 심장의 고통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마틴 레드우드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교전 속에서 대기 중의 마력을 계속 끌어모으는 식으로 장기전을 극복했다.

하지만, 구심점이 박혀 불안정한 클로에의 심장은 그럴 수 없다. 그렇기에, 심장에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극소량의 마력만을 운용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클로에의 몸은 그 극소량의 마력만으로 이전보다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무시하고 내디딘 한 발짝. 클로에는 심장이 박살나 죽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마주한 죽음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극한의 효율.

한 줌의 마력으로도 이전과 같은 힘을 낼 수 있게 된 클로에의 심장의 마력은 다시 안정되기 시작한다.

연달아 이어지는 폭파음과 함께, 광대의 몸이 박살나 흩어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숨을 몰아쉰 클로에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숨을 몰아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서…….”

도와야 한다. 클로에는 눈을 감고 잠깐 심호흡을 한 다음 허리춤의 물병을 열어 물을 조금 마시며 몸이 조금이라도 안정화되기를 기다렸다.

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무작정 마틴과 헤로스의 싸움에 달려들면 민폐만 끼칠 뿐이다. 조금이라도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건 아니니까.”

마틴과 클로에는 함께 싸워온 시간이 있다. 당연히,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게 움직일 수 있고, 순간적으로 생긴 빈틈도 메꿔 줄 수 있다.

잠깐이었지만, 호흡을 다시 가다듬는 데 성공한 클로에가 움직이려는 순간, 하늘에서 오로라 같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역화?!”

성역화 마법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클로에는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를 확인하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갑자기 어디에서…….”

그 순간, 클로에가 가지고 있던 수정구에 빛이 흘러나온다. 클로에는 곧바로 수정구를 손에 쥐었다.

― 안녕?

“엘렌 리버플로우 양?”

목소리를 들은 클로에가 멍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조금 더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성역화는 마음에 들어?

“레드우드 부인은 어쩌고 여기에 오신 건가요?’

클로에의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 헤로스의 졸개는 둘이었잖아.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헤로스를 소환하기 위해 여기에 머무를 테니…… 로델린 부인을 보호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로 오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

클로에는 이어지는 엘렌의 설명을 가만히 듣기 시작했다.

광대가 교단에 손을 썼다는 것이 확실한 이상, 세자는 첩자가 있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한 모양이다.

병력을 보낼 수는 없으니, 성역화 마법을 시전하는 데 필요한 마법사만을 은밀히 모아서 엘렌과 함께 여기로 보낸 모양이다.

― 태초마인 이상 성역화의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을 거야. 하지만, 역시 성역화 마법의 영향을 받고 있는 헤로스를 상대하는 게 조금이나마 수월하겠지.

언데드는 아니지만, 악마인 이상 효과는 있다. 실제로, 저쪽에서 마틴과 싸우고 있는 헤로스의 몸에는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불꽃이 엉겨 붙어 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교전 중이라는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 산이 통째로 녹아내렸다가 반질반질하게 변하는 걸 보고 확신했지.

“아.”

클로에는 그 말에 수긍했다. 확실히, 그 장면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금붕어겠지. 어마어마한 일이었으니까.

― 게다가 그 뒤에는 불기둥도 하늘에 구멍을 낼 기세로 치솟던데. 담겨 있는 마력량을 보고 성역화를 준비하던 마법사들이 전부 턱이 빠질 뻔했어.

말을 마친 엘렌이 급박하게 말을 이었다.

― 빨리 마틴에게 말해, 태초마가 성역화를 무너뜨리려고 하면 최대한 막으라고. 나는 안정화를 시켜야 하니까, 연락은 여기까지.

연락을 마친 클로에는 다시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마틴에게 향했다.

* * *

대지 위에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푸른 가닥의 실이 촘촘하게 깔려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잘라야 하나 했지만, 나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나를 위협할 요소가 아닐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클로에는 광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바닥에 깔린 이 마법이 헤로스가 펼쳐놓은 것이라면 녀석을 중심으로 퍼져나가야지, 저 멀리에서 여기로 뻗어 나오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적중했다.

“이야, 하얀 불꽃이 붙으니 어디까지가 뼈인지 모르겠는걸.”

헤로스의 몸에 엉겨 붙은 백색 화염과, 하늘에 드리워진 오로라를 확인한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엘렌인가. 병력을 보내지 말라고 했더니, 세자가 이런 안배를 해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긴, 우리가 있던 사막에서 여기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으니까. 그 정도 시간이라면 성역화에 필요한 마법사들을 은밀히 준비해서 엘렌과 함께 대기시켜 놓을 시간은 충분했겠지.

물론 세자의 안배뿐 아니라, 흔쾌히 허락하고 이 사지까지 달려온 엘렌에게도 나중에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군.

― 변하는 건 없다.

녀석이 검을 들어 올린다. 의도는 명확하다. 어쨌든 성역화가 거슬리는 거겠지.

“어딜.”

나는 재빠르게 녀석에게 붙어 성역화 마법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조금이라도 어드밴티지가 생겼는데, 그걸 잃어버릴 수야 없지. 엘렌이 다시 성역화 마법을 걸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고, 헤로스가 두 번이나 성역화 마법을 허용해 줄 리도 없다.

다시 한번 바닥을 녹여 용암으로 만들 헤로스가 검을 휘둘러 용암의 파도를 쏟아낸다. 내가 피하는 틈을 노려 성역화를 박살내려는 거겠지.

그 순간 앞으로 나선 클로에가 충격파를 뿜어냈다. 밀려오던 용암이 충격파에 다시 밀려나고, 나는 성역화를 무너뜨리려 하는 헤로스를 방해할 수 있었다.

“잘했어.”

“뭘 이런 걸 가지고. 칭찬까지 해주세요.”

말을 마친 클로에의 검에 헤로스의 마력이 휘감긴다. 나는 분신을 이용해 재빨리 그 마력을 잘라냈다. 그냥 두었다면, 레이피어가 순식간에 녹아내렸을 거다.

“화염은 내가 분신으로 어떻게든 처리하마.”

“그러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피할게요. 저는 그냥 시선 끄는 용도라고 생각하세요.”

말을 마친 우리는 갈라져서 헤로스를 노리고 양쪽에서 치고 들어온다.

― 벌레가 두 마리가 된다고 변할 건 없다.

녀석은 빠르게 대검을 휘두르며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자신을 향해 덮쳐드는 화염을 확인하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훌쩍 거리를 벌려 피한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심하게 입으니, 아예 화염이 휩쓰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신발의 탄력을 이용해 재빠르게 다시 거리를 좁히며 헤로스를 신경 쓰이게 한다.

그 사이, 나도 계속해서 헤로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과정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삭풍의 족쇄로는 마력을 잘라낼 수 있어도 그 마력으로 이미 만들어진 결과물을 바꿀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건 이제 클로에가 충격파를 이용해 수습해준다.

헤로스 자체의 힘도 엄청나게 약해진 건 아니지만 성역화로 인해 다소나마 약화되었다.

방금 전까지는 가까스로 버티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 …….

마침내, 헤로스가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처음이었다. 그리고, 긍정적인 신호다. 지금 상황에서는 저런 자그마한 움직임도 콩알만큼 남아있던 희망의 불씨에 던져줄 좋은 장작거리가 된다.

그리고, 헤로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된다.

“빠질게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대답하는 대신 앞으로 약간 나선다.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헤로스와 검격을 주고받고, 잠깐 생긴 빈틈을 클로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메꾼다.

“고맙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헤로스와 검격을 나누기 시작한다. 클로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이해하고 있다. 절대로 나처럼 헤로스와 정면으로 대치할 수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잠깐잠깐 생기는 내 빈틈을 채워주는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분명히 싸움을 팽팽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그리고, 싸움이 팽팽하게 이어지면 헤로스는 성역화 마법을 박살낼 수 없고, 조금씩이지만 헤로스의 몸에 엉겨 붙은 백색의 화염은 녀석에게 차곡차곡 피해를 쌓아나간다.

이대로면, 분명히 천칭이 기울어지기 시작할 거다. 헤로스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은 여전히 강대하지만, 엉겨 붙은 백색 화염에 의해 서서히 깎여나가고 있다.

― 이런다고 네 녀석이 승리할 수 있을 것 같냐.

“아마도? 우리 서로 부둥켜안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한 번 미친 듯이 놀아보자고. 누군가는 결국 쓰러지겠지.”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검과 녀석의 숯덩이가 서로 격돌했다.

― 쓰러지는 건 네가 될 거다.

카카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숯덩이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오려고 하지만, 자연스럽게 숯덩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칼날에 베여 흩어진다. 그 상태로 분신을 만들어내자, 헤로스가 빠르게 분신의 머리통을 잡아 박살내 버린다.

동시에 녀석이 숯덩이를 쥔 손에 힘을 넣자, 내 몸이 뒤로 서서히 밀려난다.

― 이 자리에서 네가 승리한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나는 불멸이고, 네 녀석은 필멸이지. 이 세상에 나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자는 많다. 누군가 나의 힘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네 후손의 파멸을 조건으로 계약할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다리에 힘을 주고 밀려나는 몸을 버티며 대답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후손의 일은 후손이 해결해야 한다. 게다가…….

“여기에서 너한테 패하면 파멸할 후손도 태어나지 못해.”

― 네 녀석의 후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느끼게 해주겠다.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빼앗고, 제대로 사람 구실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네 녀석의 대를 끊어버리겠다.

이어지는 말들을 듣고 있던 나는 히죽 웃었다.

“전장의 태초마 헤로스. 방금 전과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서 내 패배가 확정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던 녀석이 갑자기 내 후손에 대한 협박으로 그 노선을 선회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 검은 숯덩이로 나를 돈가스 고기처럼 으깨버리려던 녀석이 왜 갑자기 저런 대사를 던질까.

서서히 자신이 불리해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거다. 성역화, 클로에의 방해, 거기에 더해 세 가지 물건으로 강화된 나까지. 아무리 헤로스가 날고 긴다 해도 결국 이 자리에 등장한 녀석은 그 강대한 헤로스의 파편일 뿐이다. 품고 있는 힘이 제 아무리 막대하다 해도 그 한계는 있다.

“너는 네 스스로 패배를 예언한 셈이다. 이 사골아.”

내 말에 헤로스의 눈두덩에서 불타던 화염이 확 커졌다. 열 받은 모양이네.

― 명을 재촉하는군.

“그 비슷한 말은 싸울 때 들은 기억이 있는데. 지금 꽤 시간이 지났지?”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패색이 짙어진 거라는 말이 있지. 면상에 뼈밖에 없어서 표정을 알 수는 없지만, 치는 대사를 통해 이 녀석도 꽤나 초조해 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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