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하지만, 천칭이 내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정도로는 부족하다. 나에게 분위기가 다소 유리해졌다 해도 필요한 건 확실한 한 방이다.
헤로스가 약해졌다고 하지만, 이렇게 서서히 무너뜨리는 방식으로는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계속해서 호흡을 통해 마력을 끌어모으고 있다고는 하지만, 카루토스 타카운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몇 시간 대치한다고 끝날 상황이 아니다. 호흡과 함께 마력을 끌어모은다고 해도 모으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헤로스가 약해지기 전에 내 몸의 마력이 먼저 고갈될 것이다.
― …….
“크흐.”
녀석이 내지른 숯덩이에 휘감긴 화염을 분신으로 제거하자, 곧장 클로에가 손을 내밀어 그 숯덩이를 잡는다. 거대한 숯덩이가 품고 있는 파괴적인 힘이 클로에의 몸에 그대로 흡수된 다음, 다시 방출된다.
― 이년이.
그 충격에 헤로스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려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녀석에게 파고들었다.
“받아봐.”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자, 헤로스가 휘둘러지는 검을 막아내기 위해 다시 숯덩이를 휘두른다. 다시금 휘감긴 화염은 내 검에 의해 무력화되고, 검과 숯덩이가 부딪치는 순간 나는 벽해의 피를 통해 검에 실린 힘을 확 줄였다.
이전이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개수작이었겠지만, 클로에의 도움을 받고, 성역화로 인해 다소나마 약해진 지금이라면 통할 것이다. 50일에 걸친 카얀과의 싸움 덕분에 나름대로 이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일부러 이런 순간이 오면 쓰기 위해서 그전까지는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으니까, 녀석도 예상하기는 힘들겠지.
틱, 하는 소리와 함께 힘이 확 줄어든 검이 헤로스의 숯덩이를 건드린다. 검을 막아내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던 헤로스의 자세가 무너지고, 나는 녀석의 목줄기를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먹혔나?
으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를 찌르는 느낌은 있었지만, 내가 공격하는 데 성공한 것은 헤로스의 손이었다.
“젠장.”
다른 걸 찌르고 싶었는데. 하지만, 상처 입은 헤로스의 손은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자르는 데 성공한 건 저 망할 놈의 뼈다귀뿐이 아니니까. 그 뼈다귀를 구성하고 있는 마력까지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이래버리면……!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헤로스가 내 팔뚝을 잡아 그대로 몸에서 뜯어낸다. 지독한 격통이 팔을 타고 전해진다. 나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헤로스와의 거리를 벌렸다.
― 네가 내 손을 가져갔으니, 나 또한 네 팔을 가져가리.
헤로스는 뜯어낸 팔을 저 멀리 던졌다.
나는 그 말에 뜯어져 나간 팔뚝을 바라봤다.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태초마의 손 하나를 못 쓰게 만드는 대가로 팔 하나 정도는 뜯어져 나갈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런 희생을 각오한 건 다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벽해의 피 덕분에 팔이 뜯어져 나간 어깨에서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지혈할 필요는 없지만, 팔을 하나 잃었다는 건 손을 하나 잃은 것 이상으로 전투력의 손실을 가져오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벽해의 피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저 멀리 바닥에 떨어진 내 팔뚝을 분신을 활용해 집어 든 다음 내 쪽으로 던졌다. 팔을 받아든 나는 헤로스의 이어지는 공격을 피하며 뜯어져 나간 팔뚝을 어깨에 가져갔다.
“흐으으…….”
뜯어져 나간 팔뚝이 어깨와 맞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벽해의 피가 어깨를 타고 뜯어져 나간 팔뚝 쪽으로 피를 공급한다. 혈관이 손상되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벽해의 피는 혈관을 따라 흐르는 게 아니다. 자신이 마땅히 흘러야 할 장소를 따라 흐른다. 그리고, 피가 흐른다면 마력도 흐른다.
마력이 흐를 수 있다면, 만록의 심장이 품은 마력이 상처를 다시 이어붙일 수 있다. 혈액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 뜯어져 나간 팔의 모세 혈관과, 어깨의 모세 혈관을 잇고, 그 와중에 작살난 신경과 어깨의 신경이 서로 맞춰지도록 그 위치를 바로잡는다. 수천, 수만 개의 가느다란 실로 팔뚝과 어깨를 다시 연결시켜 단단히 고정시키는 느낌이다.
잠깐 사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상처가 회복된다.
“이 정도면, 이미 사람은 아니군.”
나는 벽해의 피와 만록의 심장이 빚어낸 기적 같은 치료에 작게 감탄하며 다시 양손으로 검을 꽉 잡았다. 뜯어져 나갔던 통증은 아직 남아있지만,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뜯어져 나갔던 손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고 있다.
― 네놈.
헤로스는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자, 이제 어쩌실까.”
헤로스는 한 손을 다쳤다. 그리고, 마력으로 구성된 헤로스의 몸은 삭풍의 족쇄로 인해 상처 입은 이상 다시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나와 같은 묘기는 부릴 수 없다.
이제, 팽팽하던 싸움은 이제 분명히 내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군 헤로스. 슬슬 내 새끼들을 노려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
내 말을 들은 헤로스가 한 손으로 숯덩이를 휘둘렀다. 퍼져나가는 화염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몇 조각의 불티만 남기고 무지막지한 화염이 사그라든다. 이어서 나를 향해 덮쳐든 헤로스는 쉬지 않고 공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알게 된 것, 배우게 된 것을 생각해야 한다. 방어를 한다면 공격을 보는 게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본다. 반격이 없는 방어는 한계가 있다. 나는 이어지는 헤로스의 공격을 분신을 통해 차단하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틈을 노렸다.
백색의 화염이 휩싸인 채, 재와 화염을 뿌리는 헤로스의 위세는 분명히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래서, 전장의 악마 헤로스. 네가 볼 때 이 승부가 어떻게 될 것 같나?”
헤로스의 공격을 향해 나는 양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굉장한 충격이 달리지만, 최소한 헤로스가 양손으로 휘두를 때와 같은 압도적인 충격은 아니다.
나와 헤로스가 서로 대치하는 와중, 클로에가 녹아내려 대리석으로 변한 대지에 검을 박아넣고, 각도를 조절해 그대로 폭발시킨다. 충격파와 함께 헤로스의 몸을 박살난 파편들이 휩쓴다.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하겠지만, 대치하는 와중에 공격을 받으면 집중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이제 한 방, 딱 한 방이면 된다. 저 망할 놈의 해골에게 치명상 한 방만 박아넣으면 되는데. 한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확실한 빈틈이 발견되지 않는다.
세 명의 정령이 선물한 능력과, 엘렌과 마법사들이 시전한 성역화, 거기에 클로에의 도움까지 받고서도 확실한 한 방이 부족할 정도다. 한 손을 못 쓰게 하는 건 성공했지만…… 아무래도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좋게 끝나면…….”
팔 하나 정도 타서 사라지는 정도겠지. 잘못되면 공멸이고. 각오가 필요한 행위였지만, 애초에 이 상황까지 오는 것도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헤로스에게 달려들었다.
안 아프게, 몸 성히 끝나는 방법은 없다. 내가 달려들자, 헤로스는 곧장 자세를 잡고 나를 향해 숯덩이를 휘두른다.
여태 동안은 헤로스가 공격하면 나는 그 공격을 분신으로 막아냈다. 그렇게 이어진 싸움이었다.
계속 그렇게 움직이니, 제대로 치명상을 먹일 수 없는 거다.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숯덩이를 무시하며, 나는 분신을 만들어 녀석의 가슴을 노리고, 허상으로 배를 노렸다. 동시에 내 검은 녀석의 머리통을 노린다.
― 이 자식이.
방어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내 움직임을 알아챈 헤로스는 그 찰나에 오히려 휘두르는 숯덩이에 더 힘을 밀어 넣은 모양이다.
내 공격과 헤로스의 공격, 둘 중에 어떤 게 상대에게 먼저 닿을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내 검은 헤로스의 머리를 노리고, 헤로스의 공격은 내 몸통을 박살내기 위해 접근한다.
0.1초도 되지 않는 극히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휘둘러지는 헤로스의 손이 가까워질수록, 뻗어 나가는 내 검이 헤로스의 머리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이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공격의 결과가 선명해진다.
이건…… 공멸이다. 헤로스의 머리통이 내 검에 꿰뚫리는 것과 녀석의 공격이 내 몸을 후려치는 행위는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머릿속에 씨팔,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헤로스가 휘두른 숯덩이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 궤도가 확 틀어져 바닥에 처박혔다. 동시에 내 검은 헤로스의 머리통에 박혀 들었다.
“클로에, 이 미친년이!”
방금 전 비명은 클로에의 것이다. 헤로스의 머리통에 검을 박아넣은 나는 재빠르게 비명이 들린 쪽에 쓰러져 있는 클로에를 분신으로 집어 저 멀리 던졌다. 동시에, 헤로스의 머리통을 찌른 검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클로에가 던져진 방향으로 달렸다.
바닥에 처박힌 헤로스의 숯덩이에서 아까와 같은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불기둥이 확 솟구쳤다. 분신을 사용해 검에 휘감긴 화염을 지우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불기둥은 처음에 봤던 그 광경처럼,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는다.
“크후…… 으후…….”
클로에는 바닥에 쓰러진 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헤로스가 휘두른 숯덩이를 발로 찍어눌러 궤도를 바꾼 모양이다. 그 대가는 당연히 엄청났다.
희귀하기 짝이 없다는 금속을 박아넣은 신발은 시뻘겋게 달궈져 있었다. 녹아내리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다. 녹아내렸으면 신발을 신은 다리를 통째로 잘라내야 했을 거다.
신발만 저 꼴이 난게 아니다. 오른 다리를 감싸고 있던 갑옷의 가죽 부분은 잿더미로 변해있었고, 철은 신발과 마찬가지로 녹아내려 클로에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불태웠다.
저런 불기둥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힘을 품고 있던 숯덩이를 향해 발을 휘둘렀으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억지로 신발을 벗겨내자, 군데군데 검게 타버리고, 터진 물집이 가득한 발이 드러난다.
“그것보다, 헤로스.”
클로에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구긴 채 시선을 돌려 헤로스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머리통에 검이 박힌 채 가만히 서 있는 헤로스가 보였다. 헤로스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이 빠른 속도로 흩어지는 게 보인다.
“발, 땅에 닿지 않게 조심하고 있어.”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의 레이피어를 일단 손에 쥔 채 천천히 헤로스에게 다가갔다.
삭풍의 눈 덕분에 보인다. 헤로스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마력이 빠르게 흩어지고 있다. 얼마 가지 않아, 이 녀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세상에서 흔적을 감추는 것뿐이다. 지옥에 있는 헤로스의 본체는 다치지도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전장의 태초마로서 영원히 군림하겠지.
― 네 녀석의 후손은 누가 되었건, 나와 계약한 자들로 하여금 철저히 파멸시킬 것이다.
“나도 충고 두 개 정도 해줄까.”
나는 녀석의 머리통에 박힌 검을 뽑아내 그 목뼈를 치고, 머리통을 집어 들고 눈을 마주쳤다.
“나중에는 어중이떠중이들 시켜서 되도 않는 수작 부리지 말고, 먼저 모습을 드러내.”
내가 벽해의 피를 얻기 위해 움직일 때 헤로스가 강림했더라면 나로서는 답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건 헤로스다.
― 그래…… 네 녀석의 후손을 파멸시킬 때는 반드시 고려하도록 하지.
“두 번째로, 그런 건 입에 담지 말고 속에 품고 있어.”
말을 마친 나는 녀석의 이마에 남은 칼빵 자국을 검지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그런 걸 미리 알려주면 대비하게 되거든. 이제 회색 서약에 ‘내 후손은 물론이고, 연관된 지인에게 어떠한 종류의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추가하면 끝이잖아?”
녀석을 이리저리 바라보던 나는 픽 웃으며 말했다.
“전장의 태초마라서 그런 건가? 이런 쪽으로 머리 쓰는 일은 영 잼병인 모양이군.”
천천히, 헤로스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흐려지는 해골을 바라보던 나는 휙 하고 그 두개골을 던져 버렸다. 두개골은 바닥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헤로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검을 박아넣고 몸을 지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