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쓰러질 것 같았지만, 쓰러질 수는 없었다. 나는 클로에 쪽으로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적어도 3도 화상이었다. 그런 상처는 자연적으로 회복 되는 게 불가능하다. 마력을 쌓은 검사라고 해도 그녀의 다리를 뒤덮은 흉한 화상 자국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쇼크사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
기절한 상태다. 나는 곧장 그녀의 품을 뒤져 수정구를 확보한 다음 연락을 취했다.
― 일 처리는?
곧바로 엘렌의 대답이 들려왔다.
“끝났어. 나는 곧바로 몰튼브라운 숲으로 진입할 테니, 너는 마법사들을 이끌고 여기로 와줘. 클로에가 심하게 다쳐서 치료가 필요해.”
― 젠장, 결국 해냈구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어?
“방금 전, 불기둥이 솟구쳐 올라왔던 장소.”
내 말에 엘렌이 후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대답했다.
― 찾아가는 게 어렵진 않겠네. 그럼, 바로 이동할 테니 너도 서둘러.
“그래, 수정구는 챙겨갈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대화를 마친 나는 클로에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곧장 잿더미로 변해버린 콜튼브라운 숲속으로 향했다. 이미 회색 서약의 위치는 알고 있기에, 따로 그 석판을 찾기 위해 시간을 들여 조사할 필요는 없다.
중앙에 굉장히 깊은 석회암 동굴이 있다. 땅 아래를 타고 흐르는 탄산수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반을 녹여 만들어낸 동굴이다. 계약의 석판은 그 동굴의 최심부에 위치해 있다.
“어디 보자.”
램프 같은 건 없다. 애초에, 그런 걸 챙겨 왔었다면 헤로스와 싸울 때 안에 들어있는 등유가 한참 전에 자연발화 했을 테니까. 그나마 근처에 남아있던 삐쩍 말라붙은 나무를 긁어모은 나는 대충 횃불 비슷한 걸 만들어내고, 추가로 필요할 것을 대비해 태울 만한 것들을 더 긁어모아 대충 묶은 채 이동했다.
“이게 그 동굴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한 동굴을 찾아낸 나는 동굴 입구를 살펴본 다음 픽 웃었다. 동굴의 입구로부터 시작된 마력의 흐름이 동굴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걸 따라가면 되는 건가.
자연적으로 만들어낸 동굴 안으로 진입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서너 개의 갈림길이 나온다. 아마, 동굴 안은 이런 식의 갈림길이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길을 모른다면 여기에서 며칠을 헤매도 원하는 장소에 도달할 수 없겠지만, 나는 길을 알고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정도 횃불에 불을 붙이고 이동하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속에 자리 잡은 인위적인 구조물이 나타났다.
[팔을 집어넣고,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기다려라.]
그 문구가 자리 잡은 장소에는 커다란 문과 함께 사람의 팔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순순히 그 구멍 안에 팔을 들이밀었다. 곧바로 손목에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진다. 뭔가, 칼날 같은 것이 손목을 깊게 베고 지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미지근한 물이 내 팔이 들어간 구멍 속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헤로스를 이기는 데 필요했던 것만은 아니었잖아.”
벽해의 피가 내 몸을 돌고 있지 않았다면, 방금 전 손목이 베였을 때 팔을 빼야 했을 거다. 나는 얌전히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꽤 지나고 나자,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시렌이 아마 듣고 있겠지.”
내 몸 안에 흐르는 벽해의 피는 시렌의 감시하에 놓여있다. 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빌기로 한 소원에 내 후손들과 지인들에게 헤로스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문구를 추가로 새겨넣을 생각이다. 그게 내가 너와 한 약속을 어긴 것이라 생각되면, 지금 바로 네가 말했던 협박을 이행해. 내 몸에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으면 너도 합의한 걸로 알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한동안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별다른 몸의 변화는 없었다. 시렌이 말했던 극심한 갈증은 찾아오지 않았고, 석회질이 포함된 탄산수를 마셨을 때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좋아, 그럼.”
나는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어두운 공간 안에 들어서자,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빛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빛이 쏟아지는 장소에는 석판이 하나 서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뭔가가 숨어있거나, 이 석판을 수호하는 존재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인간적으로 그 괴물을 조지고 여기까지 도착했는데 이제 와서 뭐가 또 나오는 건 너무하지.”
게다가, 애초에 헤로스를 이기고 여기에 도착한 녀석을 도대체 뭐로 막아설 건데. 방법이 있긴 하겠냐? 계약의 석판 앞에 선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여기에 내용을 새겨넣으면 되는 건가.
검을 뽑아 든 나는 미리 정해둔 내용을 석판 위에 새겨넣었다.
헤로스와 마틴 레드우드 사이에 맺어졌던 계약은 파기된다. 헤로스는 이후 직간접적으로 마틴 레드우드의 후손 및 그 관계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금지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검으로 내용을 다 적어넣은 나는 석판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뭐야 이거, 성공한 거 맞아?”
그런 질문을 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손등에 뜨거운 고통이 달린다. 이전에, 헤로스가 나에게 자신의 각인을 새겨놓았던 자리다. 뜨겁게 불타던 손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하.”
저 서류는 내가 모를 수 없지. 이전에 헤로스가 내밀고 내가 피로 서명했던 종이다. 눈앞에 나타난 종이는, 허공에 고정된 채 서서히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서류가 타오른 자리에 헤로스의 머리통이 나타난다.
― 회색 서약에 의해… 네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마틴 레드우드는 현 시간부로 자유다. 계약은 완전 파기되었고,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않는다. 그 이외에 회색 서약에 새겨진 내용 또한 이행될 것이다.
헤로스의 불타는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었다. 아마도 분노를 담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녀석이 나에게 해를 끼칠 방법은 없다. 이내 헤로스의 머리통까지 사라진다.
“끝이구나.”
헤로스를 돌려보냈을 때도 느꼈던 감정이지만, 저 석판에 확실히 내용을 새겨넣고 그 결과를 확인하자 비로소 완전히 끝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 엄밀히 말하면 끝은 아니지.”
넘어야 하는 가장 큰 산은 넘었다. 이제 남은 건 왕도로 돌아가서 그 망할 놈의 교단 녀석들 앞에서 악마와 계약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구금되어있던 로델린을 다시 풀어줘야 한다.
물론, 그다음에는 교단도 조져야 한다. 세자가 교단의 대주교들과 맺은 약속을 실행할 때, 그 집행을 내가 하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어디, 사람 잘못 건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여기에 더 이상 볼 일은 없다. 나는 걸어왔던 동굴을 되짚어 나가며 수정구로 엘렌에게 연락을 취했다.
― 연락받았어. 일은 잘 끝났어?
수정구를 통해 전달된 엘렌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좋은 방향으로 잘 끝났지.”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의 입에서 하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 좋았어. 나는 지금 클로에가 쓰러져 있던 장소에 도착해 있으니 그리로 찾아오면 될 거야. 세자 저하께서도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텐데.
“네가 연락을 좀 취해줘.”
내 말에 엘렌이 알았다는 대답을 남긴 다음 연락을 끊었다.
* * *
세자는 수정구를 통해 엘렌이 전달한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래, 알았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마틴 레드우드에게는 수고했다는 말을 전달해라.”
― 그리하겠습니다, 세자 저하.
연락을 마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느낌이다.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강렬한 감정에 세자의 입에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좋아! 젠장맞을, 요즘 그 일 때문에 씨발 놈의 잠을 다 못 잤는데 말이야!”
세자는 그렇게 외치고는 가만히 있던 침대 위의 베개에 대고 마구 주먹질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걸로 성공이다. 마틴 레드우드에게 걸어놓았던 판돈은 그 이상의 이득을 가져왔다. 이걸로 한 방에 전부 해결될 수 있다. 저 왕궁 밖에서 기세등등하게 마틴 레드우드의 소환을 요구하는 귀족들의 아가리도 닥치게 만들 수 있고….
“대주교 놈들의 표정이 어떨지 기대되는군그래. 으하하하핫!”
세자는 웃음을 터뜨리며 찬장에서 샴페인 한 병을 꺼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린 날에 어떻게 술 한 잔 안 하고 견딜 수 있을까.
보는 사람이 없으니 격식도 필요 없고 예의도 필요 없다. 크리스털을 깎아 만든 샴페인 잔을 이리저리 살피던 세자는 픽 웃으면서 도로 잔을 내려놓고는 병나발을 불었다.
“크으, 기가 막히는구만!”
입가에 흐르는 액체를 손으로 슥 훔친 세자는 커다란 샴페인 병을 슬슬 흔들었다.
전쟁 중에 할 일이 많다는 건 다들 알고 있지만, 의외로 승전 후에 할 일 또한 많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전쟁 그 자체보다는 그 이후의 일이 더 중요한 법이다.
“손에 넣은 황금을 세공하는 순간이니까.”
세자는 다시 한번 병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들이켰다. 어차피 칼춤은 마틴 레드우드가 추는 걸로 정해졌다. 춤출 사람이 정해져 있으면, 어떻게 무대를 마련하고 어떤 방식으로 춤을 출 건지가 필요하다.
또한, 누구를 대상으로 출 것인가도 중요하다. 세자는 수정구를 손에 쥐었다.
― 세자 저하.
수정구 너머에서는 알버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궁 밖에서 시위 중인 귀족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그리고, 잠깐 나 좀 보지.”
― 명을 받듭니다.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잠시 뒤, 알버트가 세자의 궁으로 찾아왔다.
“지시한 일은?”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귀족들의 명단을 만들라 하셨다면….”
알버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곁눈질로 마개가 뽑혀 있는 샴페인 병을 확인했다.
세자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마틴 레드우드가 성공했어.”
세자의 말을 들은 알버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거 다행이군요. 앞으로의 예정을 감히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세자는 그 말에 낮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일을 크게 벌이는 편이 좋겠지. 일단,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족할걸세. 자네는 귀족들의 명단을 빠르게 파악하고, 귀족들을 선동한 자가 어떤 녀석들인지 찾아내는 데 집중하게.”
“그리하겠습니다.”
그 이외에도 지시를 내릴 사항들을 몇 개 정리해 알버트에게 일러준 세자는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알버트를 보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밖을 향해 말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문이 열리고, 시종 한 명이 허리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목욕을 할 것이다. 이후, 갈아입을 예복을 준비토록 해라.”
시종이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 쳐 문을 나갔다. 잠시 후, 향료를 넣은 뜨거운 목욕물이 준비되었다. 세자는 몸을 닦은 다음,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었다.
“외출하십니까?”
“그렇다, 준비하도록.”
“어디로 행차하실지 여쭈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세자는 시종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귀족들이 외궁의 문 앞에 머무르며 탄원한 지도 벌써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폐하를 대신해 국정을 다스리는 나로서는 이제 답을 줄 때가 된 것 같구나.”
그리고, 그 답으로부터 이어지는 결과는 밖에서 신나게 탄원하고 있는 귀족들이 원하던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외출 준비를 마친 세자는 문을 나서 외궁으로 향했다.
나팔이 울리고, 세자가 도착했다는 외침이 외궁의 정문 앞에 울려 퍼졌다. 문 앞에 모여있던 귀족들이 그 외침을 듣고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절대로 나올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세자가 여기로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