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46화 (246/275)

246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사실, 탄원은 탄원 그 자체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이러한 행위로 인해 공고해진 세자의 입지를 손상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으니까.

“세자 저하께서 오셨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대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귀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세자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의 행적을 고려해본다면 세자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귀족들이 더 많았다.

심지어,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들은 세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작물의 수확량까지 속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이 당당하게 이 문 앞에 설 수 있었던 건, 세자가 절대로 여기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자가 여기에 도착했다고 한다.

“….”

귀족들 중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세자를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세자를 지켜보며 그 성향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 귀족들이었다.

세자는 피아의 구분이 확실하다. 자신과 한배를 탔다고 생각한다면 충분한 자비와 만족할 만한 보상을 내리지만, 자신을 침몰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자는 기회가 생기는 순간 바로 숨통을 뜯어 그 명줄을 잘라버린다.

죽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가문이 다시 재기하기 힘들 정도로 짓밟아 버린다는 뜻이다.

“죽을 길에 들어선 건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몇몇 귀족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글러 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든 살아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세자가 외궁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문 앞에서 탄원을 이어가던 귀족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외쳤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원래, 이 상황에서는 세자가 고개를 들라는 지시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세자는 고개를 들라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외궁 정문에 모여 탄원을 시작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세자의 입이 열리자, 고개를 숙인 귀족들은 숨죽여 그 뒤에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세자가 여기에서 항복 선언을 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고.

“마틴 레드우드는 현재 왕도로 복귀 중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인 귀족들은 입에서 흘러나오려고 하는 한숨을 억지로 참았다.

“왕도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퍼져 있음을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 어떤 자들은 단순히 마틴 레드우드에 대한 의심을 넘어, 그를 왕도로 소환하는 것을 거절한 나의 의도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품고 있더군. 왕국의 세자에 대한 의심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이 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세자 저하, 저희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귀족들 중 제법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말하도록 허락한 기억은 없다.”

세자의 서늘한 목소리에 변호를 위해 입을 열었던 귀족은 다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소문이 퍼진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허튼 우문으로 인해 민심이 흔들리는 것은 나로서도 좌시할 수 없으니,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을 했다.”

세자는 다소 놀리는 것 같은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왕도의 광장에는 단상이 세워질 것이다.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했는지 취조하는 과정은 왕도의 모든 시민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세자에게 확신이 있다. 귀족들은 저 발언으로 인해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자신들이 잡아야 할 동아줄을 아주 단단히 잘못 잡았음을 알게 되었다.

“최대한 많은 백성들이 이를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이기에. 해당 날에는 국고를 열어 모여있는 자들에게 적절한 끼니를 제공할 것이며, 이는 취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말을 마친 세자는 히죽 웃었다.

“그대들은 이제 고개를 들라.”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귀족들이 허리를 펴게 되었다. 세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만, 왕도의 많은 백성들에게 충분한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국고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다고 세자의 명으로 베푸는 끼니가 귀리죽 같은 게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세자의 말이 품고 있는 속뜻을 모르는 귀족들은 없었다.

살고 싶으면 무리를 하건 뭘 하건 어떻게든 수완을 발휘해서 물질로 표현되는 정성을 바쳐라. 그런다고 바로 면죄부를 내려주는 건 아니지만, 적당히 팬 다음에는 용서해줄 것이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어리석은 우문을 잠재우기 위해 마련하는 자리니,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왕국의 국고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으면 좋겠군. 절대로 강요하는 건 아니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귀족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문장은 하나였다. 자발적 좋아하시네.

세자는 뭐를 얼마나 바쳐라, 언제까지 바쳐라와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마틴 레드우드의 취조 결과가 세자에게 유리하게 나온다면, 그가 칼을 뽑아 들고 귀족들을 썰어대기 시작할 때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장, 휘둘러지는 칼에 목이 들어오게 생긴 귀족들에게 있어서 세자의 별거 아닌 권유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혹시나 이번 공개 취조에 보탬이 될 생각이 있는 귀족들은 재정대신에게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면 고마울 것 같군.”

세자는 멍하니 서 있는 귀족들을 살피다가 웃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정문 앞에 모여있을 필요는 없겠군. 이제 나도 좀 조용히 잘 수 있겠지.”

세자는 다시 돌아갔고, 남은 귀족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몇몇 귀족들은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데 세자가 자신들의 기를 죽이는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고, 몇몇 귀족들은 바치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식량이나 자금을 조달해야 할지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 * *

헤로스와 싸웠던 자리에 도착하자. 엘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클로에는?”

내 말에 엘렌이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다리의 화상이 심각해.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아마 흉터는 평생 갈 거야. 정상적으로 다리를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2―3개월 정도는 생각해야 하고.”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그 정도 수준의 화상이라면 흉터가 남는 정도가 아니라 다리를 잘라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클로에의 다리 상태는 그 정도로 심각했으니까. 심한 흉터가 남는 정도로 끝난다면야 차라리 다행이다.

“바로 왕도로 향할 생각이야?”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세자 저하께서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계실 텐데.”

아마, 그 인간의 성격이라면 나름대로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도 하겠지.

“마차는 준비되어 있어. 클로에는 마차에서 쉬고 있을 거야. 아마, 인근의 마을에 도착하면 호위병들이 따라붙겠지.”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한 번 쳤다.

“호위병이 아니라 간수겠지.”

내 말에 엘렌이 아하하 하고 찬바람 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간수들이지만, 일단 너는 악마와 계약한 혐의가 있는 것뿐이니까. 대놓고 간수를 보낼 수는 없었을 거야. 교단에서는 네가 악마와 계약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를 대비해 참 신나는 것들을 준비해두고 있을걸.”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엘렌이 픽 웃었다.

“뭐, 전혀 쓸데없는 노력이겠지만.”

글쎄,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뭐든 하는 법이다. 최소한, 내가 만나본 사람들은 항상 그랬다.

그 대주교라는 녀석들도 내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는 있겠지만… 내가 당당히 왕도로 돌아와서 악마와의 계약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겠다는 말을 한다면 아무래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확신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 악마와의 계약 여부에 걸어놓은 판돈이 있는 이상 녀석들은 조금 더 확실한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어차피 마차를 타고 왕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나는 클로에의 상태를 확인해보기 위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아, 마틴 님.”

클로에는 화상을 입었던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앉아있었다.

“상태는?”

내 말에 클로에가 자신의 옆에 놓여있는 목발을 손으로 툭 치고 대답했다.

“당분간은 이 친구가 제 다리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하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멋대로 나선 거잖아요. 게다가, 사실은 이것보다 더한 결과를 각오했었는데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에요.”

클로에가 키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신발이 아니었으면 아마 이 다리를 잘라야 했을 거라고 하던데요. 어떻게 보면 그 신발을 저에게 넘겨주신 마틴 님 덕분에 외다리가 되지 않을 수 있었네요.”

당사자는 웃으며 말하지만, 듣는 입장인 나로서는 웃으며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클로에는 그런 내 표정을 보다가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바라봤다.

“흉터는 평생 남을 거라던데요. 붕대를 감기 전에 살짝 살펴봤는데, 남편에게 이쁨받기는 글러 먹은 다리가 될 것 같아요. 슬프기도 하지.”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내용은 상당히 무겁다. 그 대답을 들은 나도 마찬가지로 가벼운 어조로 무거운 내용을 꺼냈다.

“나는 신경 안 쓰니까, 나랑 결혼하면 되겠네.”

내 말에 클로에가 아하하, 하는 소리를 냈다.

“농담도 참.”

“농담 아닌데.”

바로 이어진 대답에 클로에가 웃는 얼굴을 한 상태로 굳었다.

“네?”

“내가 본디 성격이 그렇게 로맨틱하지 못해. 그래서 복잡하고 화려한 단어는 쓸 줄 모른다.”

멍하니 있는 클로에를 향해 나는 말을 이었다.

“농담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술 먹은 것도 아니다. 갑자기 충동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오랜 기간 심사숙고한 다음 어렵사리 꺼낸 말이야.”

애초에,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질질 끌고 있었던 이유도 다른 게 아니라 헤로스와 맺었던 계약 때문이었다. 그 제약이 사라진 지금, 무슨 싸구려 러브 코미디에 나오는 고자처럼 '지금 이 관계가 깨지면 어떡하지?' 같은 등신 같은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일 없다.

마음이 있고, 오래 생각을 했으면 남은 건 실행밖에 없다.

내 대답을 들을 클로에가 중얼거렸다.

“이야, 물어보려고 했던 걸 다 미리 대답해버리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생각해보고, 대답을 들려주면 되는 거지.”

나는 해야 할 말을 했고, 의사를 전달했다. 남은 건 클로에의 의사를 듣는 것뿐이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제 이 마차는 왕도로 향할 것이다.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잠시 뒤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제가 별로 결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보지는 않아서 걱정이네요.”

“뭐가?”

내 말에 클로에는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요?”

나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이게 결혼하자는 내 말에 대한 동의라는 건 알겠는데….

“아이 계획은 뭐하러 세우는 거야. 당장 내일 일어날 일도 모르는 게 사람인데.”

낳는 만큼 키우면 된다.

“실력 있는 기사라면 몰라도, 좋은 아내가 될 자신은 없는데.”

“나도 좋은 남편이 될 자신은 없어. 노력하는 거지.”

내 말에 클로에가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건 결과가 중요하잖아요.”

“결과가 좋게 나왔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지금 판단할 수 없고.”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요. 레드우드 부인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할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로델린도 클로에는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걸로 우리의 대화는 잠깐 끊겼다. 마차는 계속해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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