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어두운 밤, 대주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세자 저하께서 굉장히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계시던데, 뭔가 숨겨놓은 한 수가 있는 거 아니겠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였다. 그 말을 들은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차분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단순히 허세를 부려 우리로 하여금 기존의 방침을 철회하도록 만들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자 저하께서 머리를 쓰심이 이와 같다는 건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 말에 하운 교단의 대주교가 혀를 찼다.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정보를 전달해준 자는 며칠 전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무슨 큰 변수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하운 대주교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 와중에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다른 대주교들을 바라봤다.
“아무튼, 이대로 있을 수는 없소이다.”
“그럼, 달리 방법이라도 있다는 소리입니까.”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바레스 대주교에게 말을 걸자, 그는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모두, 이번 일에 걸려있는 사안이 얼마나 큰지는 알고 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바레스 대주교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다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는 악마와 계약한 것이어야 하오. 반드시,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하운 교단의 대주교가 움찔하고는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에게 되물었다.
“그 말의 저의가….”
“세자 저하께서 저리 나오시는 것을 보니, 더 이상 나는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이야기에 확신이 없소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백기를 들자는 말인가?”
일리온 대주교의 말에 바레스 대주교는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오.”
바레스 대주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소매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건 이후 이어질 마틴 레드우드의 취조 과정에서 사용될 물건이외다. 속죄의 신상에서 챙겨온 것이지.”
바레스 교단 대주교의 말에 나머지 대주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레스 교단의 총본산인 바레시안 대신전은 베로나 제국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마트리아 대신전에 세워져 있는 속죄의 신상은 1년에 한 번 눈물을 흘리는 성물로 유명하다. 바레스 교단에서는 매해 조각상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채취해 보관 중이다.
이 병에 담겨 있는 눈물의 양이라면, 족히 5년은 모아야 할 정도다.
“베로나 제국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확보한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베로나 제국의 협조를 얻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베로나 제국의 황제는 마틴 레드우드라면 자다가도 깨서 이를 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베로나 제국이 파이크 왕국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도 험악했으니까.
이번 취조에서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황제가 혐오해 마지않는 마틴 레드우드는 파멸할 것이고, 세자가 대주교들과 맺은 계약에 의해 이 나라의 왕권 또한 굉장히 취약해질 것이다.
물론, 바레스 교단만 이러한 물건을 준비한 것은 아니다.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도, 하운 교단의 대주교도 각자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것을 확인할 만한 특별한 물건을 준비해놓은 상황이다.
“본디, 악마와 계약한 자라면 이 눈물을 마셨을 때 피를 토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소.”
중요한 건 바로 이 점이다. 다른 대주교들이 준비한 물건과는 달리, 이 눈물은 마셔야 효과를 발휘한다.
마셔야 한다는 것은, 이 액체 안에 뭔가 다른 수작을 부려놓기 쉽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마시게 된다면 반드시 피를 토하는 종류의 독을 섞어 놓는다면….
“그건… 바레스 대주교. 대주교가 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운 대주교의 말에 바레스 대주교가 눈을 부라리고 그를 바라봤다.
“만에 하나,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을 경우 그 이후 벌어질 일을 당신이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뜻이오?!”
그 말에 하운 대주교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건, 확실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하운 대주교가 침묵하자, 바레스 대주교는 다시 안색을 바로 하고 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악행이라는 점은 나도 부인하지 않소. 하지만, 우리는 종교인이외다. 종교는 국가 권력에 종속되서는 안되는 법이야. 더 큰 선의를 위해서 범한 사소한 죄악으로 인해 내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나는 그리할 것이오!”
바레스 대주교의 말을 들은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가 왕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일리온 교단에서는 비밀리에 교단의 병력을 움직여, 이동하는 마틴 레드우드를 습격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하운 대주교가 일리온 대주교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의 무력이 보통을 넘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본산의 지원을 받아 각별히 가려 뽑은 자들을 보낼 것입니다. 왕궁 기사단장이라 해도 가려 뽑은 대신전의 정예 열 명이라면 그 목숨을 장담할 수 없을 터이니….”
마틴 레드우드가 왕도에 도착하지 않게 되면 취조는 자연스럽게 취소된다.
당연히, 그 상황에서는 세자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마틴 레드우드가 등장하지 않게 되면 사람들은 동요하게 될 것이고,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은 기정사실로 굳어질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당당했다면 왕도에 왜 오지 않았는가? 라고 하는 생각을 모두가 할 테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운 대주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두 대주교가 여기까지 한다면, 그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두 분의 계획을 진행하는데, 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고맙겠군요. 하운 교단에서 조치를 취해 준다면, 제아무리 첩보국이라 해도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채는 게 쉽지 않을 터이니.”
하운 대주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럼, 빠르게 계획을 짜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기로 결정된 이상, 확실하게 합시다.”
대화를 마친 세 명의 대주교는 술잔을 부딪친 다음 내용물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나눈 다음 흩어졌다.
* * *
마을에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수십의 병사들이 우리가 탄 마차를 둘러싼다.
“이거 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녀석들이 입고 있는 갑옷은 왕국의 문장이 찍혀있지 않다. 다른 녀석들이라는 뜻이다.
“교단이네요.”
나는 그 말에 옆자리에 앉아있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그런 것 같아. 일리온 교단이었나.”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한 번 왕도에서 녀석들의 근거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돈이 많다 보니, 교단의 사병들에게 지급되는 급여도 좋고, 장비도 훌륭한 편이죠. 실력자들도 꽤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우리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은 모양이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말에 타고 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 여기부터는 우리가 그대를 포함한 일행들을 호위할 것입니다.”
나는 그 말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던가.”
이미, 교단의 병사들은 나를 보는 눈이 썩 곱지 않다. 녀석들을 슥 훑어본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근데 이 친구들은 지금 나를 호위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호송하려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내 대꾸에 말 위에 타고 있던 기사가 대답했다.
“악마와 계약한 혐의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감내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악마와 계약한 혐의가 있는 거지, 실제로 악마와 계약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확실치 않은데. 지금 내가 명확히 밝혀지지도 않은 건으로 인해 죄수 취급을 받는 걸 용납하라는 건가?”
내 말에 기사가 침묵했다.
“아, 대꾸를 하지 않으시겠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말 앞으로 다가갔다.
“너는 교단의 기사지만, 나는 왕국의 귀족이자 쿠르스트 산맥 영지의 영주이며 제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공자다.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멋대로 떠드는 것을 내가 그냥 지켜봐야 하는 건지?”
내 말에 듣고 있던 기사가 대답했다.
“그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일리온 기단의 기사인 나로서는 그대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쌓은 명성보다, 악마와 계약했다고 하는 점을 더 중시합니다.”
“말했지만, 혐의일 뿐이다.”
“혐의가 불경한 이상, 나는 그대가 원하는 예우를 차려 줄 생각이 없습….”
그 순간, 내 손이 뻗어져 녀석의 갑옷 이음새를 붙잡았다. 그리고, 이어서 녀석을 말 위에서 끌어내린다.
“그렇다면, 예우를 차리게 해주지.”
기세 싸움이다. 나는 아직 죄수가 아니다. 왕도에 도착했을 때도 이 자식들이 이런 취급을 하려 든다면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하다. 나는 죄수로 보일 이유가 없다.
주변에 서 있던 녀석들 중 몇 명이 검을 뽑아 들려고 했지만, 검을 뽑기도 전에 이미 내가 먼저 움직여 녀석들이 뽑으려던 검을 강제로 검집에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뒤늦게 깨달은 녀석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애초에 내가 누구를 상대하고 여기에 왔는데. 여기에 있는 녀석들을 전부 개작살 내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나는 손을 몇 번 턴 다음 입을 열었다.
“자신들을 호위라 칭했으면, 거기에 걸맞은 처세를 해라.”
말을 마친 나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난 교단의 기사를 향해 말했다.
“숙소를 안내해. 여기에서 며칠이나 기다렸다면, 숙소 정도는 마련했겠지.”
니들이 죄수 취급을 하려 든다고 해서 내가 순순히 죄수 취급을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으면 큰 오산이다.
“지랄이 났군. 차꼬랑 수갑도 차게 만들 기세야.”
나는 나도 모르게 녀석들이 안내한 장소에 도착해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검소한 방이라는 점은 크게 문제가 없다. 어차피 내가 뭐 여기에서 왕 같은 생활을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근데 창문의 철장과 멀쩡한 나무문에 덧씌워진 철문은 뭔데. 내가 시선을 돌려 교단의 기사를 바라보자 녀석이 시선을 약간 돌린다.
“….”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철문을 손으로 잡으며 교단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숙소 주인장에게 얼마를 변상하면 되는지 나중에 물어봐라.”
“그게 무슨 소리….”
곧바로,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뜯어져 나간 철문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런 소리지.”
말을 마친 나는 다리를 다친 클로에를 부축한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클로에는 내 부축을 받아 침대에 걸터앉은 다음 교단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호위를 할 예정이었다면 계획서도 있겠죠. 제가 한번 확인해보고 싶으니 최대한 빨리 서류를 전달해주시겠어요?”
몸을 움직이는 일은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교단 기사는 잠깐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의 병사 중 하나가 내민 서류를 확인한 클로에는, 재빠르게 그 내용을 수정해서 병사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호위가 아니라 감시잖아요. 이대로 수정해서 반영해주세요.”
“하지만… 저희도 사정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도망갈 생각이었으면 마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네 녀석들을 다 썰어버리고 사라졌을 거란 생각은 안 하나?”
내 말에 병사가 침묵했다.
주변에 토끼들이 몰려있다고 호랑이가 가고 싶은 곳을 못 갈 것 같냐.
“그냥 순순히 협조해줄 때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걸. 그러지 않으면 그 감시 같은 호위 하는 녀석들이 밤사이에 죄다 기절한 채로 내일 아침 발견될 거다.”
병사는 내 대답을 들은 다음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기사에게 서류를 전달하겠습니다.”
녀석이 돌아가고 난 다음, 클로에가 픽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주, 우리가 상전인 것 같아요.”
“실제로 우리가 상전이야. 저 녀석들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것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