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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48화 (248/275)

248화

말을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클로에가 다소의 당황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왜…… 왜요?”

“왜는 무슨 왜야. 약 발라야 할 시간이니 다리 내밀어.”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머뭇거린다.

“냄새가 날 텐데.”

“그럼 안 씻고 붕대를 감아놓은 다리에서 꽃향기가 날까?”

그건 사람이 아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리를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고 상처를 살폈다.

“……너무 보지는 마세요.”

“왜, 핥기라도 할까 봐?”

내 말에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손을 깨끗하게 닦아낸 다음, 가방에서 꺼낸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아프면 말해.”

클로에는 내 말에 작게 대답했다.

“사실 계속 아픈걸요.”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입은 화상이 가볍지 않으니까. 현대에서는 무조건 피부 이식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지만, 다행인지 뭔지 마법적인 응급조치가 제때 이루어진 덕분에 거기까지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애초에 이 연고도 엘렌이 마법적인 처리를 해둔 물건이다.

이런 점은, 차라리 현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피부에 발라진 연고는 희미한 색깔의 빛을 흘리며 클로에의 피부로 흡수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깨끗한 새 붕대를 꺼내 클로에의 다리를 다시 감쌌다.

“능숙하시네요.”

“붕대질이야 뭐.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으니까.”

붕대를 다 감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하고, 챙겨준 환약 꼭 먹고.”

내 말에 클로에가 혀를 찼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소리는 안 해요?”

“안 그래도 하려고 했어. 그래야 키가 크지.”

내 말에 클로에가 으, 하는 소리를 냈다.

“나중에 부부싸움 같은 거 하면 분명히 칼싸움으로 번질 거예요.”

“왜, 내가 한마디도 안 지니까?”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내가 이길 텐데.”

“세상에, 반려자를 때릴 생각이에요?”

“그러는 너는?”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어차피 맞지도 않을 거잖아요.”

그건…… 나는 한숨을 팍 내쉬었다. 천상 비겨야겠군. 물론 가장 좋은 상황은 애초에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거지만…… 세상에 부부싸움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할까?

어쨌든, 아직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이야기다. 뭐니 뭐니 해도 일단 클로에의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하니까. 엘렌이 3개월 정도는 필요하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려야겠지.

“식사해야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자칭 호위 타칭 간수께서는 나와 클로에가 어디 가는 건지 굉장히 궁금하신 모양이다.

“식사.”

내 말에 우리의 간수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클로에를 보며 말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것 같으니, 식사는 머무르시는 곳으로 올려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병사는 길을 내어준 다음 곧바로 어디론가 향했다. 녀석을 대신해 새로운 친구들이 나와 클로에 옆에 따라붙었다. 어딜 가도 사람이 따라붙다니. 참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과분한 대우다.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안이 비었다는 건, 이 여관이 우리를 제외하면 통째로 비어있다는 뜻이다. 아마, 우리를 제외한 다른 손님들을 죄다 내쫓은 모양이다.

“정말 간만에 먹는 제대로 된 식사네요.”

“그러게 말이다.”

배에서는 네 번 구워 돌덩이나 다름없게 변한 비스킷과 염장고기 같은 굉장한 별미를 먹었다. 이후 최대한 빨리 이동해 도착한 사막에서는 식량 사정이 조금 나아졌지만, 역시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기꺼이 가지고 있는 식량을 전부 버리고 그 식사를 택하고 싶어질 정도의 음식을 경험했다.

간만에 보는 음식은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감자와 콩을 넣은 늙은 양고기 스튜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최소한 고기 흉내를 내는 다른 무언가와는 다르게, 이 스튜 안에는 멀쩡한 고기가 들어있었으니까.

“이야기 좀 나누려고 하는데, 거리를 좀 두지 그래?”

내 말에 뒤편에 바짝 붙어있던 병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우리와 거리를 둔다.

“초반에 기선 제압한 효과가 있네요.”

“원래 말로 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즉효가 있는 법이니까.”

말을 마친 나는 숟가락으로 스튜를 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물잔을 손에 쥔 채 대답했다.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교단에서 개수작을 부릴 수 있다는 뜻이지.”

다가올 결과를 막는다는 명목이 있다면, 어떤 수단도 용납되는 경우는 꽤 흔하다. 그리고, 가끔은 도덕적인 판단에도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내가 당당히 왕도로 향하고 있으니, 교단에서도 일을 확실히 처리하고 싶을 거야. 그리고 그 확실한 처리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저지르면 안 되는 일도 포함되겠군요.”

그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집에 불이 날 것 같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본능이니까.

“앞으로는 가능하면 무기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도록 해. 물론…… 몸 상태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지만.”

내 말에 클로에가 식사용 나이프를 살짝 들어 올린 채 대답했다.

“이거 하나면 지금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녀석들을 다 제압하고도 남아요.”

“알아, 하지만 방심하지마. 앞으로는 음식도 내가 먼저 먹고 난 다음 먹도록 해.”

나는 독에 면역이다. 게다가, 독이 들어오게 된다면 벽해의 피가 반응하기 때문에 알 수 있다.

하지만 클로에는 그렇지 않다. 음식에 독을 타는 방법은 진부하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건 결국 모두가 쓸 정도로 효과가 좋은 방식이라는 뜻이다. 나는 슥 주변을 훑어본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개죽음당한다 해도, 우리를 위해 증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명심할게요.”

말을 마친 나는 먼저 클로에의 스튜를 한 숟갈 먹고, 물을 마셔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우리는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병자가 회복하기에는 썩 좋은 환경이 아니네요.”

“어쩔 수 없지. 왕도에 도착하면 훨씬 나아질 거야. 그때까지는 수양한다고 생각하고 참아.”

여기라면 몰라도 거기에서는 개수작을 부리기가 쉽지 않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자의 눈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장소니까. 물론,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었으니 괜한 의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쓸데없이 조심하는 게, 방심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숙소로 향했다.

“시도한다면, 한 번 정도겠죠.”

“그렇겠지, 자주 시도하면 아무래도 꼬리가 밟힐 위험이 있으니까.”

확실하게 성공할 만한 환경을 만들고,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실력자들을 활용해 한 번에 끝내려고 들 것이다.

“사실,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네요. 기껏해야 교단의 기사들일 뿐이잖아요. 이제와서 우리가 그런 녀석들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잖아요.”

헤로스와의 싸움에서 클로에는 성장한 것이 확실하다. 나와는 분명히 다른 방향이지만, 아마 무사히 다리 부상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왕궁 기사단장인 모리스 핀들턴과 싸워도 그닥 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이전에 왕도의 파티에서 나와 모리스 핀들턴이 대련하는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많아.”

당연히, 교단에서 사람을 보낸다면 모리스 핀들턴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전력을 보낼 것이다. 나는 몰라도 클로에는 위험해질 수 있다. 내 말에 클로에가 자기 가슴을 팍 치고는 대답했다.

“짐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여태 동안 그래왔잖아요.”

“당당한 발언이군.”

내 말에 클로에가 침대에 앉아 목발을 옆에 기대놓는다.

“발언에 근거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틀린 말은 아니네.”

가방에서 환약을 꺼내 클로에에게 건네주고 나니 수정구가 빛나고 있었다. 손에 쥐자, 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잘 오고 있나?

거참, 말투는 추석 귀성길에 연락 온 부모님 같은 느낌이군.

“몰튼브라운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숙박 중입니다.”

내 말에 세자가 그래, 하는 대답을 남기고는 말을 이었다.

― 교단에서 진행하는 자네의 취조는 왕도 광장에 세워진 단상에서 진행될 예정이네.

나는 그 말에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나오시면 교단 친구들이 굉장히 불안해할 것 같은데요.”

녀석들이 개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확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내 말에 세자가 곧바로 대답했다.

― 어쩔 수 없지 않나. 소문이라는 건 무서운 법이야.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장소에서 취조를 진행했다가는 나중에 백성들 사이에서 다른 말이 나돌 수도 있어.

저 말도 사실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하는 건 필수다. 세자가 나쁜 선택을 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좋은 선택에 따르는 부작용을 어쩔 수 없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조사가 진행되는지는 알 수 있습니까?”

― 그건 나도 자세히 몰라. 애초에, 악마와 계약했다는 혐의를 가지고 교단에 구속된 자들은 본디 교단이 주도적으로 취조를 진행하니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예외를 좀 둔 것뿐이야.

즉, 어떤 식으로 진행될 예정인지는 세자도 정확히 모른다는 뜻이다.

― 다만, 첩보국의 정보에 따르면 각 교단이 자신들의 총본산에서 뭔가를 가지고 왔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총본산이라고 하면, 가톨릭으로 치면 바티칸에서 뭔가를 가지고 왔다는 뜻인가.

“저를 정말로 조지고 싶어 하는 모양이군요.”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 엄밀히 말하면, 자네를 핑계로 나를 조지고 싶어 환장한 녀석들이지. 작대기에 걸어놓고 화형을 시켜 버릴 늙탱이들 같으니라고.

워우, 귀한 분답지 않게 말이 심하시네. 어지간히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하긴, 내가 헤로스와 싸우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동안 세자도 나름대로 온갖 일들을 당했을 테니까. 거기에 대한 복수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겠지.

그나저나.

“제 어머니는 아직도 구금되어 계십니까?”

내 말에 세자가 약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어쩔 수 없는 노릇이네. 자네가 순순히 왕도로 오고 있다고 하지만, 취조가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구금되어 있어야 할 거야.

피로와 함께 상당히 체력이 소진되긴 한 상태라는 것이 세자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일단,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긴 한 모양이다.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사실, 전해 들은 로델린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불결한 생활 환경이나, 부실한 식사로 인해 병에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니까.

― 도착 예정일을 알 수 있나? 왕도에서도 거기에 맞춰 일정을 조정할 생각이네.

나는 그 말에 아하하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가 일정에 맞추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단상의 완성까지는 약 2주 정도 걸릴 거야.

나는 그 말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클로에가 양손을 쫙 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착까지는 열흘 정도 필요하다는 뜻이다.

“일정을 조금 조정해서 약정된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도록.

세자와 연락을 마친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잠깐 클로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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