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악수를 마친 세자는 소파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차나 한잔하며 이후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지.”
우리가 자리에 앉자, 세자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취조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을 예정이야.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면 족하겠지.”
나는 그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치고는 성문 밖에서 기다리는 백성들의 숫자가 무지막지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스러운 내 백성들 아닌가.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면 든든히 먹여 보내야지.”
제공되는 소가 75마리, 돼지와 양이 각 250마리, 거기에 더해 닭이 천 단위가 넘게 준비되었다고 한다. 아주, 그냥 여기까지 찾아온 백성들의 배를 터뜨려서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할 생각인 모양이다.
“이 짧은 시간 사이에 그걸 끌어모으느라 개고생한 귀족들의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고기만 그 정도가 준비되었다고 하면 제공될 곡물이나 마실 술의 양도 알 만하다.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추수철은 아니다. 수확한 작물이 없는 상황에서 그 정도의 식량을 준비했다면, 눈에 보일 정도의 출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내 말에 세자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러니 줄을 잘 잡았어야지.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동반되는 법 아니겠나. 가끔 잘 먹고 잘사는 녀석들은 그걸 까먹는단 말이야.”
“귀족의 손해는 바로 백성들에게 쏟아져 내리지 않겠습니까?”
바치는 공물이 많아지면 많아지는 만큼, 귀족들이 백성들로부터 쥐어짜 내는 기름의 양 또한 늘어나는 법인데. 내 말에 세자가 혀를 찼다.
“내가 그 정도도 안배해두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나? 이번에 발생하는 귀족들의 지출은 고스란히 귀족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야. 어디까지나 나는 자신들이 감당 가능한 범위 내에서 자발적으로 지원하라고 했어. 이번에 귀족들이 왕도로 올려보낸 식량을 빌미로 아랫것들을 쥐어짠다면 귀책 사유가 될 거야.”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을 이었다.
“제 어머니는 아직 풀려나기 힘든 겁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단호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자네의 혐의가 완전히 벗겨진다면야 바로 풀어 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힘들지. 신경 쓰이겠지만 어쩔 수 없어.”
말을 마친 세자는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원칙대로라면 자네도 왕궁을 나서게 되면 취조 전까지 같은 취급을 받게 될 거야. 막아 줄 수 있다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막아 주실 수 있다면, 클로에 로니세라 경이 구금되는 것을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클로에가 옆에 앉아있다가 나를 바라봤다.
“마틴 님, 저는 괜찮아요.”
“화상이 덧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불결한 환경이야.”
화염이 옮겨붙은 즉시 죽은 게 아니라면, 심각한 수준의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상당수가 2차 감염의 관리에 실패해 목숨이 위험해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세자로부터 전달받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심각한 화상을 입은 클로에를 그런 곳에 머무르도록 할 수는 없다.
“클로에 로니세라 경 같은 경우는 그 부상이 위중하기 때문에 충분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면, 어렵지 않게 구금을 피할 수 있어.”
세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단에서는 세자 저하께서 제 구금을 막을 거라 생각할 테니.”
내가 구금되는 조건으로 클로에가 구금되지 않는다면 교단에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괜찮겠나? 3일 정도는 머물러야 할 텐데.”
“제 어머니는 몇 주를 그런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어떤 환경에서 생활하셨는지 알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적개심도 더 커지는 법이다. 도대체 내 어머니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직접 경험해 보는 것과, 그냥 전해 들은 건 차이가 굉장하니까.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선선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클로에 로니세라 경은 내궁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배려해두겠네.”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이라는 소리와 함께 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를 챙겨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건…….”
내 말에 세자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취조가 끝나고 나서 자네가 칼춤을 좀 춰 줘야 하는 귀족들의 명단. 이번 기회에 이삭에서 쭉정이를 싹 털어낼 생각이거든.”
그 명단을 싹 훑어본 나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레드우드 백작이 명단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흠칫하고는 대답했다.
“그야, 자네는 레드우드 가문의 장자가 아닌가. 내가 아무리 거칠게 나간다 해도 자네의 가문을 건드릴 생각은 없어. 레드우드 가문은 장자를 잘 둔 덕에 화를 한 번 피하는 그림이 되겠지.”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가족은 어머니인 로델린 레드우드가 전부입니다.”
내 말에 세자가 허어,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세간의 시선이라는 것도 있어. 아버지에게 위해를 끼치는 장남이라니. 자네의 평판이 깎일 거야.”
“수습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물론, 레온 레드우드는 이전에 베로나 제국과의 전쟁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확실히 내 눈 밖에 나는 행동을 많이 했지.”
말을 마친 세자는 침묵한 채 잠깐 시간을 보내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자네를 배려했기에 명단에서 빼놓은 것뿐이야. 자네가 괜찮다면 오히려 나는 나쁠 거 없는 일이지.”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이제, 교단이 원하는 대로 구금되면 되는 건가. 구려 터진 환경에서 생활하는 건 익숙하니까 크게 문제 될 거 없다. 나는 시선을 돌려 클로에를 바라봤다.
“몸 건사 잘하고 있어라. 어차피 오래 걸리지도 않겠지만.”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고작 이틀 정도인데. 굳이 저 때문에 가서 고생할 이유는 없잖아요.”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이유가 없긴.”
내 말에 클로에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을 보던 세자가 작게 얼씨구, 하는 소리를 냈다.
“이 자리에서 서로 입술을 빨지 않은 게 장하군. 교단에 끌려가기 전에 방이라도 하나 비워줄까?”
“괜찮습니다.”
세자에게 인사를 마친 나와 클로에는 알현실을 나섰다. 클로에는 내궁에 마련된 방으로 향하고, 나는 왕궁의 정문으로 향했다. 마차를 탄 나는 왕도에 자리 잡은 일리온 교단의 교회로 향했다.
“마틴 레드우드다. 약속대로 알현을 마치고 조사 전까지 머무르기 위해 왔다.”
사제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황은 잠깐이었고 조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거칠고 낡아 빠진 옷으로 갈아입고, 사제들의 안내에 따라 작은 방에 도착했다.
“여기에 머무르도록.”
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렇게 곱지 않았다. 나는 별말 없이 그 안에 들어갔다.
“이런 곳에 사람을 가둬놨다 그거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방 안 상태를 확인한 나는 기가 차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막상 눈앞에 이 광경이 펼쳐지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마, 세자가 로델린을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병들었을 수도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로델린이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곳에 살던 귀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이 정도로 갑작스럽게 환경이 변하면 탈이 나지 않을 수가 없지.
심지어 자기 잘못도 아니고 아들에 대한 의혹 때문에 그 취급을 받아야 했을 테니. 심적인 부담도 엄청났을 거다.
“마틴 레드우드, 취조 전 조사를 할 예정이다. 따라오도록.”
방 안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말을 전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따라 작은 방 안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사제가 한 명 앉아있었다.
“마틴 레드우드. 악마와 계약한 자.”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확실한 것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으시군.”
내 말에 사제가 내 쪽으로 약간 허리를 내민 채 대답했다.
“그건 이후 밝혀질 내용이겠지.”
나는 그 말에 녀석을 슥 훑어본 다음 입을 열었다.
“요즘 사제들은 사창가에서 여자도 사는 모양이지?”
내 말에 녀석이 눈살을 찌푸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건 니 왼쪽 귀밑에 엉겨 붙어있는 분가루에게 물어보지 그래.”
내 말을 들은 녀석이 손을 귀 뒤로 가져간다. 그 손을 잡은 나는 녀석의 검지에 뭍은 분가루의 냄새를 맡았다.
“은방울꽃, 라벤더, 머스크. 분가루가 고급이네. 저렴한 가게를 들르는 취미는 없는 모양이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녀석을 보며 히죽 웃었다.
“뭐, 사창가의 여자에게 침대 위에서 설교라도 한바탕 늘어놓고 온 건가.”
녀석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입을 열었다.
“너는 악마와 계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비꼬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흉내냈다.
“아, 아! 사제님!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으음, 하악! 아아, 아앗, 일리온이시여!”
녀석의 얼굴이 마침내 시뻘겋게 변했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태연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하던 거 계속하시지. 뭐 하고 있어? 내가 너무 상황 재현을 잘했나?”
내 어머니인 로델린은 이런 식으로 나오지 못했겠지. 아니, 여기로 끌려온 사람들 대부분은 사제라는 지위에 눌려서 이런 식으로 나올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심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엿이나 까잡숴. 이전까지는 이 심문실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건 댁이었겠지만, 내 앞에서는 아니니까.
“최초로 악마와 접선한 건…….”
“어쩌다가 사제가 그런 나쁜 취미를 가지게 된 거야? 그래도 인간적으로 스무 살은 넘어서 생긴 취미겠지?”
내 말에 녀석이 몸을 부르르 떤다.
“그만! 이 장소는 죄인을 심문하는 신성한 장소다!”
“장소는 신성한데 그 신성한 장소에 앉아있는 사제는 영 신성하지 못하군. 신성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친구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네.”
니가 무슨 말을 해도 벗어나지 못해. 어떤 말을 꺼내도 내가 결국 니가 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테니까. 이대로 8시간 정도 있으면 도대체 누가 지치게 될까?
이어지는 3시간의 심문 끝에, 결국 사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만! 너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문에 성실하게 임하지도 않았다. 이 일은 이후 공개 취조에서 공개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로 인한 불이익은 전적으로 마틴 레드우드에게 책임이 있다. 인지하고 있도록!”
“아하,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이제 그 여자를 찾아갈 시간이라서 그런 건가? 세상에, 얼마나 좋으면 취조까지 일찍 끝내고 달려갈 생각인 걸까.”
내 말에 녀석이 이익!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표정만 보면 벌써 내 죽탱이를 스무 번은 갈기고도 남았을 거다. 나는 열린 문 쪽으로 나가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사제인 척하는 망나니 난봉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제가 취조를 진행해줬으면 좋겠어. 그럼, 아가씨 치마폭 아래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그걸로 내 첫 번째 취조는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