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마침내,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이제 몇 분 뒤에 나는 이 좁은 방에서 나가 왕도 중앙 광장에 마련된 단상에 설 것이다.
“마틴 레드우드, 밖으로 나오도록.”
문 너머 사제의 말을 들은 나는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일찍 부를 거라면 밥이라도 일찍 주지 그랬어.”
장난을 섞어 한 마디 던지자, 사제의 얼굴이 구겨진다.
“얼굴 펴라고,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누구에게 좋은 날인지는 말해주지 않을 거다. 식사는 형편없었고, 방은 구렸다. 하지만, 앞으로 찾아올 너무나도 즐거운 미래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문을 나서자, 곧바로 내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나는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수갑이라니. 정말로? 이딴 걸로 나를 구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면 가슴이 아픈데.”
“알고 있다. 필요한 절차이기에 행할 뿐이다. 조용히 따라오도록.”
“계속 이어진 심문에서 별로 건진 게 없어서 삐진 거야?”
내 말에 사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어차피, 진실은 밝혀질 거다. 네가 정말로 악마와 계약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각 교단에서 지원받은 은혜로운 성물을 통해 판단되겠지.”
“나도 동감이야, 착실한 신관 나으리.”
이 친구는 꽤나 성실한 녀석이었다. 원래 조직이 썩어도 멀쩡한 사람 몇 명은 있고, 망해가는 나라에도 충신 셋은 있기 마련이라고 하잖아. 이 친구가 딱 그런 사례다.
첫 번째 심문 이후로 이런저런 사제들이 나를 심문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하나같이 나에게 크다고 생각하면 크고, 작다고 생각하면 작은 허점을 물려 역으로 개고생을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아니었다.
덕분에 이 친구는 그런대로 내 앞에서도 심문의 형식을 취할 수는 있었다. 물론 그뿐이었고 별다른 유용한 진술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사실 그것도 대단한 거지.
“가자고.”
내 말에 사제는 별다른 대답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나온 나는 간만에 정면으로 받는 햇빛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타라.”
마련된 마차는 죄수 호송용 마차였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달구지 비슷한 물건의 짐칸에 철창으로 우리 비슷한 걸 만들어 놓은 모습이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이걸 타고 가지만 돌아갈 때는 근사한 호박 마차를 타고 돌아가 주마. 나는 순순히 열린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냄새 죽이네.”
마차를 타고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빵냄새와 고기 구워지는 냄새를 포함한 온갖 음식 냄새들이 진동한다. 오늘 있을 공개 취조에서 백성들의 배를 불려줄 음식들이겠지. 누구는 사람 물어 죽인 맹수처럼 우리에 갇혀 끌려가는데 아주 팔자들이 좋군. 디너쇼에서 공연하는 광대들 기분이 이러려나.
아니지, 그 친구들은 돈이라도 받잖아. 나는 돈도 못 받고 이게 뭐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덜컹이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다 보니 마침내 나를 담은 마차가 단상이 마련된 광장 앞에 멈췄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도 하던 행위를 멈추고 일단 내가 탄 마차를 바라보며 각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수군거린다.
수군거리며 저마다 이런저런 소문을 떠들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팔 소리와 함께 일제히 잦아들었다. 이어서, 성가대의 합창과 함께 단상으로 향하는 길에 깔린 보라색 융단 위로 긴 행렬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저 행렬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노인이 그 유명하신 세 명의 대주교들이겠지. 아이들이 허리를 숙인 채 그 뒤를 따르는데, 손에 들고 있는 은제 향로가 달랑달랑 흔들리며 은은한 향을 뿌린다. 세 명의 대주교는 각자 손에 작은 함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단상에 오른 세 명의 대주교가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함을 하얀 비단이 깔린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성가대의 합창이 끝났다.
“이 자리는 참으로 신성한 자리입니다.”
일리온의 문장이 박힌 대주교복을 입은 노인이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또한, 신을 모독한 자에게 징벌을 내리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를 안배한 것은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가 아니라, 이런 우리를 따뜻하게 굽어살피시는 신성한 빛남입니다.”
세 명의 대주교가 약속한 것처럼 서로의 말을 이어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다. 이내, 세 명이 동시에 양손을 모은 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렸다.
“기도하겠습니다.”
대주교의 말과 함께 행렬을 이루고 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엄숙한 목소리로 그 말을 따라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제들의 말이 끝나자, 단상 근처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모은다. 이 기세를 생각해보면, 아마 단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지금 이 왕도 안에 모여있는 백성들 전부가 같은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저희가 당신께 올리는 목소리는 다만 빛을 섬기기 위한 목소리가 아니며, 또한 어둠을 물리치기 위해 당신께 도움을 갈구하는 목소리입니다. 이 자리에 어린양들이 모인 이유는 푸른 풀밭과 맑은 샘물 때문이 아닙니다. 숨어있는 늑대가 모습을 드러내려 합니다. 부디, 저희의 간곡한 목소리를 가벼이 여기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는 작고 나약합니다. 하지만, 저희의 능력을 보지 마시고 간곡함을 살펴주소서. 이 자리에서 정의와 올바름이라는 이름이 가장 올바르고 이상적인 형태로 꽃피도록 해주소서.”
그렇게, 세 대주교의 기도는 약 15분간 이어졌다. 더럽게 길군. 모여있는 사람들을 지겹게 해서 다 죽일 작정인가. 쉬지 않고 이어지던 대주교들의 기도가 마침내 그 끝을 고했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일리온의 대주교가 큰 목소리로 호령했다.
“마틴 레드우드를 호송 마차에서 내려라!”
단상 위에는 세 명의 대주교가 서 있었다. 얼굴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저리 가,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어.”
내 말에 병사들이 잠깐 시선을 주고받더니 옆으로 비켜선다. 나는 수갑을 찬 채 마차에서 내렸다.
“그대는 그대의 죄를 아는가?”
나는 그 말에 보라색 융단 위에 서서 고개를 들고 녀석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악마와 계약했다는 모함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의 세자조차 반존대를 쓰는 대주교들이다. 마음 같아서는 반말을 내뱉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다.
“모함이라. 너는 끝까지 스스로의 죄를 직시하며 반성하지 않고 딴 꿍꿍이를 품는 것이냐.”
“베로나 제국이 시체로 변한 하이랜더들을 앞세워 왕국의 국경을 침범했을 때, 나는 이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심지어 그 전쟁에 직접 참여해 그 참상을 겪은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히 나는 그 전장에서 싸웠노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자, 단상으로 향하는 융단에 병사들이 자리 잡는다. 나는 그들을 보고 말했다.
“어차피 나는 저 장소로 올라가야 하는데, 길을 막는 이유가 뭐냐. 비켜다오.”
내 말에 병사들이 주춤거리다가 천천히 다시 비켜선다.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당시, 이 나라의 모든 장병들과 함께 싸워 우리는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견디기 벅찬 상황에 처하고, 극복할 수 없을 것 같던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전장에서 겪을 수 있는 고생이란 고생은 전부 감내했습니다. 이후, 무언가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 나라 왕가에 충성을 다하는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베로나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전쟁영웅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여기에 모여있는 사람들 중 모르는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대중을 설득하는 건 논리가 아니라 감정인 경우가 많다.
말을 마친 나는 잠깐 침묵한 채 그들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소문을 듣자 하니, 제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 연유가 패색이 짙은 전투에서 있을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단지 그뿐이 아니다. 교단의 귀는 넓고, 너를 의심할 만한 증거는 충분하다.”
나는 그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의심이라면 그럴 수 있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세 대주교께서는 어떤 연유로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 죄에 대한 의심만으로 저에게 죄를 직시하라 하십니까.”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주교 중 하나가 더 이상 들어줘서 좋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더 이상 네 변명을 들을 시간은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너는 삿된 말을 삼가고 속히 단상 위에 올라 세 교단에 의한 취조를 받도록 하라.”
그 말을 받아, 오른쪽에 서 있던 녀석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후,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이 참으로 밝혀질 경우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떠든 말에 대해서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 서로 씨부려 봤자 남는 게 뭐가 있겠냐. 어차피 판을 그럴듯하게 벌였을 뿐이지 마녀 사냥하는 건 똑같잖아. 강원랜드나 동네 사설 도박장이나 결국 도박장이라는 건 같은 것처럼.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단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첫 번째, 하운 교단에서 준비한 시험을 준비해라.”
하운 교단의 대주교는 그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함을 열었다. 작은 테피스트리였다.
“이건…….”
그 재질이 직물이 아니라 금과 은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었다. 보석으로 실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데도 불구하고, 이 테피스트리는 분명히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테피스트리에는 검을 들고 있는 전사가 악마와 싸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성녀 아리안드의 테피스트리다.”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뭔가 굉장한 물건인 모양이군.
“태초마의 유혹 속에서 서른 번의 밤과 낮을 걸쳐 하운 교단 대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테피스트리다. 하지만 사이한 간교에 의해 완성된 테피스트리가 낡은 무명천으로 변했지.”
그리고, 아리안드는 한 달을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모양이다. 먼저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냥 기도할 시간에 새로 만드는 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일단 나는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그 기도가 결실을 맺어 대축일 전야에 낡은 무명천으로 변했던 테피스트리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게 지금 눈앞에 있는, 보석으로 씨실과 날실이 엮여서 만들어진 테피스트리다. 감동적이군. 그냥 전해지는 썰이 아니라 실물이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나로서도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네가 악마와 사사로이 통한 사이한 자라면, 이 테피스트리에 손을 올리는 순간 테피스트리의 모양이 바뀔 것이다.”
악마와 대치 중인 전사의 그림이, 악마의 가슴이 검을 박아넣고 그 시체 위에 발을 올리고 포효하는 전사의 그림으로 변한다는 모양이다.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여러 번 성공한 사례도 있는 모양이고.
“손, 올려놓으면 되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그 테피스트리 앞으로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당연히, 테피스트리의 그림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
모여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서서히 본격적인 의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교단의 성물이 내가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연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당당했던 대주교들의 발언과는 다른 결과에 명백히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대주교들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하긴,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나와 세자가 이렇게 당당하게 나왔으면 저쪽에서도 발언 철회를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볼 만했는데 그러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 기호지세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 한 번 정도는 시도해보는 게 정상이다.
그렇다고 저 친구들이 정말로 내가 악마와 계약했다고 믿고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주교들의 표정이 너무 평온하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이렇게 되었을 때 따로 수를 쓸 방법이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