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자기 교단의 성물에 장난질이라도 한 걸까?
대주교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성물로 장난치는 건 목사나 신부님이 십자가를 등긁개로 쓰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짓이다. 하지만,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몰린다면 못 하는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
아무래도, 나머지 두 개는 조금 더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까놓고 말해서 테피스트리에 개짓거리를 하기는 힘들잖아. 무슨 마술쇼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짜잔, 하니 테피스트리가 변했어요 같은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마틴 레드우드는 하운 교단의 성물을 통해서는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운 교단의 대주교가 그 말을 끝으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뭔가 말하려고 한다면야 할 말이 있기는 했지만,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일리온 교단의 차례다.”
일리온 교단에서 꺼내든 성물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천칭이었다. 저울이라, 눈을 속이기에는 딱 좋은 물건이군. 이건 테피스트리와 달리 개수작을 부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지만, 그런 짓을 하면 너무 티가 날 텐데. 과연 여기에다가 개수작을 부렸을까.
나는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라 생각한다. 일리온 교단의 교주는 천칭의 왼편에 깃털 하나를 살짝 올려두었다.
“……?”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대주교가 입을 열었다.
“로스트라의 균형이다. 사이함을 재단하는 신의 손이지. 13가지 신성한 축복을 25가지 과정을 거쳐 부여했다.”
그런 말을 함과 동시에, 대주교는 천칭의 왼쪽 팔에 깃털 하나를 조심스럽게 올린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와중에도, 접시 위에 올려진 깃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딱 봐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곧이어 대주교는 반대편에 커다란 추를 올려놓았다. 딱 봐도 5kg은 되어 보이는 물건이다.
하지만, 깃털과 무게추는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로스트라의 균형이 재는 것은 피에 담긴 죄악의 무게다. 지은 죄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천칭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일리온 대주교의 말에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주교님, 저는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이 세상에 구원받을 수 없는 죄는 단 하나다. 악마와의 계약이지. 자비로운 일리온은 모든 죄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 속죄시키신 이후 그 영혼을 구제하지만, 이미 악마의 손에 영혼을 넘긴 자만큼은 구해주시지 않는다.”
말을 마친 대주교가 자기 가슴의 중앙을 가볍게 세 번 엄지로 누른다. 가톨릭으로 치면 성호 같은 건가. 이후, 대주교는 나에게 수정을 깎아 만든 잔을 내민다. 기껏해야 소주 정도나 담아 마실 수 있을 만한 작은 컵이다. 여기에 피를 받아서 천칭에 올려놓는 모양이군.
나는 단검으로 손바닥을 긋고, 벽해의 피가 흘러내리도록 했다. 내가 흘리고 싶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 피지만, 내가 흘리고 싶다면 당연히 흘릴 수 있으니까. 잔에 피가 가득해지자, 나는 그 피를 천칭의 오른팔 위에 올려두었다.
“…….”
마찬가지 결과였다. 천칭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는 그 천칭을 뚫어져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로스트라의 균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눈에 서려 있던 당황과 놀람은 이제 의문과 의심으로 번지고 있었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감정은 숲에 난 불과 같아서, 한 번 이렇게 번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지금 이 단상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 * *
준비되어있던 세 가지의 성물 중 두 개가 이미 마틴 레드우드가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성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그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이해하고 있었다.
“뭔가…… 실수가 있었던 거 아니야?”
멍하니 단상을 바라보는 백성들 중 하나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사람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치며 대답했다.
“신들께서 실수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옆에 있던 사람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 눈치채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하게.”
대주교들이 실수한 게 아닌가? 그 생각이 서서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머릿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것만큼은 절대적이다. 애초에, 실수하는 신이라는 건 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대주교들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실수한다. 착각과 오해, 오판과 편견. 단상에 서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주교들은 그 자체로 당장이라도 신이 그 몸에 깃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엄숙하고 성스러워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사제님들도 아니시잖아. 대주교님들 아니신가. 그런 분들이 실수를 할 리가…….”
“지금까지 보고도 모르겠나?”
사제들은 신을 모시지만 사람이다. 하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주 그걸 잊곤 한다. 자신이 믿는 신을 모시는 사제는 완벽할 것이고, 신실할 것이고, 공명정대할 것이라 믿는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자기 부모가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여기는 것처럼.
그리고, 그 근거 없는 믿음이 깨지는 계기가 생긴다면 사람은 두 가지 자세 중 하나를 취한다.
첫째, 그럴 리 없다는 마음속 외침과 함께 눈앞에서 목격한 사실을 부정한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확증편향이라고 부른다.
둘째, 그동안 쌓아왔던 근거 없는 믿음만큼이나 끝도 없는 불신감을 품게 된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사춘기가 있다.
“이런 젠장, 그럼 예배에서 사제님들이 했던 말씀은 다 뭐야.”
왕도의 백성들은 두 번째를 택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부정해버리는 첫 번째 같은 경우는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미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바쳐서, 남은 게 종교 하나밖에 없을 때나 할 수 있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믿음.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세 교단은 사이비 종교가 아니다. 전 재산을 바치라거나, 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박살내라는 식의 교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게 확신하며 말씀하시더니.”
따라서,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있던 종교에 서서히 불신감을 품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불신이 섞인 종교는 그 위세가 눈에 띄게 약해진다.
한 왕국 안의 교단을 이끄는 대주교들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세자와 서류를 주고받은 순간부터 항복이라는 선택지에는 붉은 X 표시가 그어진 셈이니까. 게다가, 여기까지 온 이상 마틴 레드우드는 악마와 계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뒤늦은 후회가 대주교들의 마음을 덮쳤지만, 아직 그들에게도 한 줄기 희망이 남아있다.
바레스 교단에서 준비한 성물.
사실상, 일리온 교단의 정예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뒤 전력을 다한 것은 바레스 교단에서 가져온 성물에 독을 섞어 넣는 일이었다.
간단한 뱀독 같은 걸로는 부족하다. 독이 몸에 돈다고 해도, 마틴 레드우드가 피를 토하지 않고 참을 수 있다.
“바레스 교단의 성물이다.”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뒤로 물러나자, 곧바로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앞으로 나와 바레스 교단의 성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마틴 레드우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준비한 독은 보통의 독이 아니다.
금방 죽은 시체를 준비하고, 일정 온도로 유지하며 그 시체에 스물다섯 종류의 희귀한 독물을 정해진 순서대로 풀어놓고, 시체에 독을 주입한다. 독은 일주일간 시신의 살을 녹이고, 뼈를 부식시켜 곤죽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든다.
이후, 다시 열다섯 종류의 독초를 독에 짓물러 죽처럼 변한 시체와 함께 뒤섞어 다시 정해진 시간만큼 밀봉한다. 이후, 그 혼합물을 반복해 정제하면 아주 소량의 액체가 만들어진다.
정제 과정에서 시체의 썩은내를 비롯한 향은 완전히 사라지고, 맛 또한 없어진다. 제작 과정에서 마법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기에 마법사들이 검출하려 해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마시면 되는 겁니까.”
바레스 대주교의 설명이 끝나자, 마틴이 그렇게 말하며 성물로 손을 향한다. 그때,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마틴을 제지했다.
“우리의 의도가 오해받고 싶지 않다. 우선, 이 성물의 절반을 내가 몸소 모실 것이다. 이후, 너는 나머지 절반을 모시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마틴이 수긍하자,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는 천천히 성물이 담긴 병 쪽으로 손을 뻗었다.
본래, 이 약의 목적은 암살이 아니라 고문에 있다.
도합 마흔 가지 독성분은 한 가지 만으로도 능히 천의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이 독은 그 기운이 서로 뒤엉키며 그 성질이 변한다. 살아있는 생물을 죽이는 성분이 누그러진다. 거기에 더해, 정제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다시 한번 더 치명적인 성분을 누그러뜨린다.
결국, 몸 안에 들어가면 독과 독이 서로 뒤엉켜 몸속에서 날뛰며 각혈, 농포와 같은 증상을 일으키며 신체에 극한의 고통을 가하지만 죽는 일은 없는 약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럼.”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는 잔에 성물의 절반을 따른 다음 그대로 들이켰다. 이미, 그는 중화제를 먹어두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약 자체가 암살이 아니라 고문이 목적이기 때문에, 자백한 사람이 다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화제도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이 독을 택한 첫 번째 이유는 마틴 레드우드를 어쨌든 살려두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더해 자신은 이 독에 당하지 않을 방도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네 차례다. 바레스 교단의 성물을 몸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몸에 들어간 약이 미리 먹어둔 중화제와 반응하며 속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바레스 대주교는 속으로 웃으며 그에게 성물을 건네주었다. 중화제가 반응했다. 약은 확실히 성물 안에 들어있다. 중간에 바꿔치기를 당하거나, 실수 같은 게 없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마틴 레드우드는 성물에 담긴 액체를 잔에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 * *
어이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내용물을 비웠다. 첫 번째 성물에서 반응이 없었지만 대주교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성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인즉슨, 이 자식들이 개수작을 부려둔 진짜는 이 세 번째 물건이라는 뜻이다.
마셔야 하는 액체라. 약 같은 걸 섞어놓기에는 제격이지. 게다가,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액체를 마시고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여기에서 내가 이 약을 먹고 무슨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거가 되는 거겠지.
근데 슬퍼서 어쩌나.
“소금물과 비슷한 맛이군요.”
내용물을 비운 나는 입가를 훔치며 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슬프게도 내가 독 같은 거에 뭔 일을 당하는 몸이 아니게 되었거든. 이 자식들이 숨기고 있던 한 수가 뭔지 알게 되니 차라리 이 친구들이 앞으로 맞이할 운명이 약간은 불쌍할 지경이다.
이걸 믿고 그동안 그렇게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거냐. 대주교들의 표정을 살피자, 아까와는 다르다. 명확한 당황감이 녀석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바레스 교단 대주교님?”
내 말에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주먹을 꽉 쥐고 나를 바라봤다.
“네 녀석, 무슨…….”
나는 그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활짝 웃었다. 왜, 뭐가 생각대로 잘 안 된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