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는 물론이고, 나머지 대주교들의 표정 또한 흙빛으로 변했다. 일이 완전히 조져졌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오하고 있어.”
대주교들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등을 돌리고 단상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세 교단의 성물이 내 결백을 증명했다! 이로써, 대주교들의 의심은 그 근거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성물로 판결 난 일이다. 여기에서 더 이상 사제들이 뭔가를 하려고 들면 그건 그 즉시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성물을 사실은 자신들도 믿지 못한다는 소리가 된다. 당연히, 교단의 사제들은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몸을 뒤로 돌려 대주교들을 바라봤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대주교님들.”
뻔한 전략을 가지고 덤벼든 뻔한 녀석들에게 찾아오게 될 뻔한 결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건가.”
하운 교단의 대주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언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개 취조의 결과에 대해서. 제가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자리의 판사이자 검사는 대주교들이다. 이 녀석들의 입에서 항복 선언이 나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
침묵하고 있는 대주교들을 향해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와서 시간을 끈다고 변하는 게 있을 것 같으신지?”
이제는 존대할 필요도 없지. 이제부터는 공수가 바뀔 예정이거든. 이 자식들은 방패를 들어야 하고, 내가 칼을 들어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사실, 이 친구들의 선언을 들을 필요가 없긴 하다. 이미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까.
나는 무죄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 친구들의 항복 선언이 듣고 싶을 뿐이다. 그때, 저 멀리에서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어명이오!”
말을 탄 병사가 그런 외침과 함께 난입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서 그 병사에게로 이동한다. 말에서 급하게 내린 병사는 목을 가다듬었다.
“어명이오, 뭇 사람들은 걸맞은 예를 표하도록 하시오!”
외침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리고, 귀족과 사제들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들으라. 레드우드 가문의 마틴은 짐에게 비밀리에 지시를 받아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뭇 귀족과 사제들이 마틴 레드우드가 한시 빨리 복귀할 것을 종용했지만 허락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허리를 숙인 채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세자는 이 친구들을 이 자리에서 아주 너덜너덜하게 찢어발길 생각인 모양이군.
“당시, 임무가 긴급할뿐더러, 긴밀히 진행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그대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는 점을 헤아리고 있음에도 그 청을 물리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 마틴 레드우드가 완수한 임무의 결과를 보고받았기에 그 내용을 알린다.”
왕국의 첩보국에서는 비밀리에 국내에 태초마를 부활시키려 하는 조직이 있다는 정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 전쟁이 막 끝난 와중에 이를 공론화시켜 전후 복구와 농업에 전념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불안을 초래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파이크 왕국의 국왕은 고심 끝에 베로나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운 마틴 레드우드로 하여금 소수의 인원을 이끌게 하여 비밀리에 해당 조직을 추격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마틴 레드우드는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어명을 받들어 비밀리에 임무 수행을 하기 위해 쿠르스트 산맥의 지질 조사와 토지 측량을 감독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비밀리에 태초마를 부활시키려는 조직을 저지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 결과, 최근 몰튼브라운 숲에서 격전 끝에 부활한 태초마를 다시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이상입니다. 모두 고개를 드시오!”
병사가 어명을 전달하는 것을 마치자 다시 백성들은 몸을 일으키고 귀족과 사제, 기사들도 굽혔던 허리를 다시 폈다. 그들의 표정에는 분명한 경악이 서려 있었다. 물론, 사제와 대주교들의 표정은 이 이상 나빠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쉽게 말해, 왕국의 세 교단은 악마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이던 사람을 도리어 악마와 계약했다는 주장으로 구속할 생각이었다는 뜻이니까.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증거는?”
대주교의 말에 병사가 머뭇거린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단지 어명을 전달할 뿐인 병사입니다. 뭘 알겠습니까.”
내 말에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입을 꽉 다문다.
“몰튼브라운 숲으로 사람을 보내신다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사람의 손으로 복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으니.”
가면 모를 수는 없다. 산 하나가 통째로 반질거리는 도자기로 변해 있고, 멀쩡한 들판 위에는 녹아내린 대지가 식은 흔적이 강물처럼 길게 여기저기 뻗어있을 테니까.
“그것은…!”
“선언하시지요.”
나는 바레스 대주교의 말을 끊고 대주교들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눈을 빛냈다.
“아니면,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께서는 교단의 성물이 내놓은 결과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단상 아래에 서 있던 병사가 슬슬 눈치를 보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께서, 세 대주교님을 알현실로 부르셨습니다.”
그 말에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세 대주교를 향해 말했다.
“세자저하께서 부르십니다. 서둘러야겠군요. 그리고….”
나는 녀석들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구금되어있는 제 어머니는 지금 즉시 풀어주셔야 할 겁니다. 어떤 대접을 받으시며 시간을 보내셨는지 이야기는 참 잘 들었거든요. 그리 신경을 써주시다니,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제가 머무르는 내궁으로 안내해 주시면 되겠네요.”
이걸로 할 말은 끝났다. 나는 등을 돌리고 단상의 계단을 내려와 그 길로 왕궁으로 향했다.
“너 뭐야.”
나는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내궁 방 침대에 앉아있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얘 눈 근처가 원래 이렇게 검게 죽어있었나?
“잘 지내신 모양이네요.”
“그러게, 내궁에 있는 너는 왜 그렇게 맛이 가버렸냐?”
내 말에 클로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잠이 안 와서.”
“다리도 다쳤으면서 잠을 그렇게 못 자면 쓰나.”
내 말에 클로에가 잠깐 비틀거리나 싶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갑자기 잠이 확 오네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며 대답했다.
“그게 말처럼 되면 세상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왜 있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네.
“붕대, 언제 갈았어?”
내 질문에 클로에가 아침… 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기절한 사람처럼 잠들었다.
“이런 망할, 그럼 슬슬 갈아줘야 할 시간이잖아.”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잠들어 있는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가방을 뒤적거려 붕대와 약을 꺼내 들었다. 깨면 깨는 거고, 안 깨면 그냥 약 바르고 붕대 감아놓으면 충분하겠지.
클로에는 붕대를 풀고, 약을 바른 다음 다시 붕대질을 끝낼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뭐, 사실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때, 한구석에 놓여 있던 수정구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세자였다.
― 레드우드 부인이 구금에서 풀려났다는 말을 전해주려고. 꽤나 듣고 싶은 소식일 것 같아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내궁으로 돌아오겠군.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세자가 굳이 직접 연락까지 해서 전해줄 이유는 없다.
― 맞아. 조금 뒤 대주교들과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거든. 자네도 오는 게 좋겠어. 기왕이면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좋지 않겠나. 게다가, 혼자서 그 음흉한 늙은이 셋을 상대하려니 아무래도 괜찮은 아군 하나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지금 바로 알현실로 향하겠습니다.”
연락을 마친 나는 클로에가 덮고 있는 이불을 한 번 끌어올려 준 다음 문을 나섰다.
내가 도착하자, 거기에는 이미 대주교들과 세자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마틴 레드우드.”
나는 세자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세자저하를 뵙습니다.”
“그래, 이리 와 앉도록 하게.”
세자는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 반대편에는 세 명의 대주교가 앉아있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구도다.
“그럼, 바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세자는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전에, 대주교들과 맺은 약속이 담긴 서류였다. 당연히, 거기에는 각 대주교들의 직인도 찍혀 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하운의 대주교였다.
“세자저하, 사람은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이번에 오해와 착오로 인해 큰 실수를 범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이런 사안은 이리 가볍게 내기와도 같은 형식으로 정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 내기에 동의하신 분은 다름 아닌, 여기에 계신 세 분이 아닌가요?”
내 말에 바레스 교단의 교주가 대답했다.
“우리는 세자저하에게 말씀드리고 있네.”
“그리고 마틴 레드우드는 내가 불렀지. 임무를 마치고 바로 복귀해서는 충분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구금되어 있다가 공개 취조까지 받았어. 피곤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마틴 레드우드를 이 자리에 부른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세자와 대주교들이 서로 눈을 마주친다. 말투는 부드럽지만, 분위기는 공기 중에 면도날이 빗발치는 것처럼 매섭다. 나는 그런 분위기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게다가, 이 서류에 적혀있는 내용은 말씀하신 것처럼 굉장히 무겁습니다. 설마하니 이런 무거운 내용을 담은 서류에 대주교님들께서 가벼운 생각으로 직인을 찍지는 않으셨겠죠.”
내 말에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대답을 돌려준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네. 그 결과가 남들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오해였다고 해도, 그 의도까지 왜곡하지는 말아주게.”
“의도를 왜곡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엄밀히 따지면 크게 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내 말에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나는 그 말에 서류의 내용을 슥 훑어보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이 내용대로라면 세자저하께서 교단을 탄압한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교단의 신자면 목을 쳐버리겠다! 뭐 이런 살벌한 내용이 담겨있는 게 아니다.
그저, 이전까지 교단이 왕국 안에서 누리고 있던 상당수의 특권을 박탈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의무를 부과하게 만들 뿐이다.
“여러분은 이전처럼 신실하게 신을 섬기며, 세파에 고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를 어루만져주시면 됩니다.”
“종교는 국가 권력에 의해 통제되어서는 안 되네.”
나는 그 말에 슬픈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지금 여기 계신 세 분이시죠.”
세자의 제안을 들은 것도 세 명의 대주교다, 그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세 명의 대주교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대주교들 중,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다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이 된다면, 우리로서도 더 위에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네.”
나는 그 말에 슬쩍 시선을 돌려 세자를 바라봤다. 세자는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대주교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교황을 말하는 거다.
교단의 교황은 초국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보고해서 세자와 맺은 서류를 어떻게든 무마해보겠다는 속셈인 모양인데. 이러면 나도 더 이상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갈 수는 없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해보시던가.”
교황이건 뭐건, 이 상황에서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다. 나는 확신한다. 내 말에, 대주교들의 표정이 변했다.
“네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말을 그리 ….”
“여기는 파이크 왕국이다. 국왕 폐하의 통치를 받고 있고, 댁들이 말하는 국가 권력이 통제하는 땅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