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나는 녀석들을 향해 허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교황이 파이크 왕국에서 죽을 쑨 댁들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것 같나?”
내 말에 교단의 대주교들이 몸을 움찔했다. 이 친구들이 죽을 쑨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덤으로 교황이 움직일 명분은 있고?”
교황은 명예와 지위를 통해 그 힘을 발휘하는 자리다. 명예와 지위를 통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대의명분이다. 이유 없이 움직일 수는 없다. 나는 서류를 들어 몇 번 흔들었다.
“이 나라의 대주교들이 내린 결정이고, 여기에는 대주교들의 직인이 찍혀 있지. 교단에서는 이를 부정할 수는 없어.”
“그렇다 해도, 교황 성하께서 교단의 세가 약해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녕 일을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끌고 가야겠느냐.”
팔을 꼰 채 듣고 있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해보도록.”
세자의 말에 대주교들이 세자를 바라봤다. 이미, 세자의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대들이 뭘 할 수 있는지 한 번 보여봐라. 내 나라가 네 녀석들의 눈에 그리 만만히 보이는 모양이구나.”
나는 팔을 꼰 채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교단의 병력이라도 긁어모아 왕도로 진격이라도 할 생각이냐?”
“세자저하. 저희가 어찌 감히….”
황급하게 대답하는 하운 대주교의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그럼 방금 전 그 발언은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돌이킬 수 없는 곳이라, 내 배움이 부족하고 경험이 미천해 전쟁 말고 다른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데. 한 번 고견을 들어보지.”
대주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내가 세자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맹세하지. 교단이 이 나라에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발을 딛게 된다면, 그 교단의 그 누구도 왕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거만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핵무기와 비슷하다. 단순히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단은 베로나 제국과의 전쟁에 교단의 사병을 보내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뭐, 종교적 이유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그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하이랜더를 보게 되는 건 교단에서 이 나라에 검을 들이민 다음이 처음이겠군.”
“종교를 칼로 찍어누를 생각이냐.”
나는 대주교의 말에 대답했다.
“종교가 먼저 칼을 들이민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칼 들고 배를 찌르려고 덤벼드는데 포옹하려 드는 정신병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냐. 나는 손뼉을 한 번 짝 치고 나서 세자를 바라봤다.
“세자저하께서는, 대주교들과 약조하신 내용을 파기할 의사가 있으십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저은 다음 입을 열었다.
“이 나라의 옥새가 찍힌 서류다. 설사 그 서류에 내가 평생 여장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더라도 그 서류에 옥새가 찍혀 있다면, 나는 따를 것이다.”
그 말에 대주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주교들 입장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정신 차리고 도망치려 하니 이미 목 위로 칼날이 떨어져 내리는 상황이다.
“세자저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희는 이만.”
일리온 대주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잠시, 기다리게.”
세자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일리온 대주교가 동작을 멈췄다.
“사실, 마틴 레드우드를 여기로 부른 이유는 하나가 더 있거든.”
세자는 그렇게 말하고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교단의 재산을 전부 국고로 환수하는 일은 중요하지. 섬세하게 파악해서 억울한 이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국고로 환수되어야 할 재산을 숨기는 자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야. 일이 막중할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지 않겠나.”
세자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나는 마틴 레드우드에게 대주교들이 나와 약속한 일을 이행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거야. 이후 한동안 서로 얼굴 볼 일이 많을 테니.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살펴 돌아가시게.”
말을 마친 세자가 문을 나섰다. 그리고 알현실에 남은 건 나 한 명과 세 명의 대주교였다.
망할 세자. 혼자서 세 명 상대하기 싫다고 해서 2대 3을 하자고 하는 줄 알았더니. 그냥 나 혼자 세 명 상대하라는 뜻이었냐.
“마틴 레드우드.”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였다. 나는 다시 말씨를 부드럽게 바꾸고, 존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습니다.”
“이번에 생긴 불미스러운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오해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의 골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군.”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감정의 골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가 그 더럽고 좁고 불결한 방에서 형편없는 음식을 씹으며 몇 주씩이나 머무르며, 쉬지 않고 심문당했을 뿐인데요. 세상 누가 고작 그런 걸로 원한이 생기고, 화가 날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내 말에 일리온 교단의 교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가 어찌하면 화를 풀 생각인가.”
“아마, 세자저하와 약조하신 내용을 성실히 다 이행하고 나면 화가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바레스 교단의 교주가 크으, 하는 소리를 냈다.
“공적인 일에 사사로운 감정을 담지 말도록.”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픽 웃었다.
“사적인 감정을 넣지 않고 공정하게 일을 진행해도 썩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것 같으니까.”
오후 6시에 친구한테 돼지갈비 얻어먹으러 나갈 건데 굳이 오후 5시 45분에 제 돈 주고 컵라면을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잖아. 마찬가지로 이미 만족할 만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으면 굳이 따로 내가 따로 뭔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세자저하께서 분부하신 대로, 공정하고 명확하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제 사적인 감정이 담길 일은 전혀 없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를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이 친구들이 듣고 싶지 않았을 말들이야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장담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내가 한 말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정하게 처리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다는 선언이다.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입을 연다.
“필요한 게 있다면, 우리가 노력해서 마련해 볼 수 있네.”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돈이 많은 교단이다 그거지.
“사실, 꼭 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내 말에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는 물론이고, 나머지 두 대주교 또한 순간적으로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내 한 마디는 그들의 눈에 당겨진 불 위에 냉수를 쏟아 넣었다.
“공정한 집행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합니다.”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가 향후 몇 년 동안 자금 부족에 시달릴 일이 없도록 해줄 수 있네.”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던진 한마디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집행과정에서 상세하게 살펴보고 국고로 환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한 마디가 쐐기였다. 대주교들은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마침내 이 모든 게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그들을 표정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대주교님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정말 필요할 거야. 니들 눈앞에 서 있는 새끼는 지금 악마를 씹어먹고 너희들을 노리는 중이니까. 최소한 이 세상에서는 내가 작살 내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무사히 발 뻗고 자는 자식들은 없었어.
니들도 예외는 아닐 거다. 말을 마친 나는 알현실의 문을 열고 나와 서 있는 시종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는 혹시 내궁으로 들어오셨나?”
내 말에 시종이 인사를 한 다음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렇습니다. 내궁의 경비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받았습니다. 안내해드리는 편이 어떨까 합니다만.”
“바쁠 텐데, 부탁 좀 하지.”
시종의 안내를 받아 문 앞에 도착했다. 옆으로 비켜선 시종이 인사를 했다.
“여기입니다. 그럼 저는….”
인사를 마친 시종이 돌아가고, 나는 노크를 하며 입을 열었다.
“마틴입니다.”
곧바로, 문 너머에서 로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들어오렴.”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있는 로델린의 모습이 보인다. 누가 봐도 수척해 보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내 눈에는 그 차이점이 더 선명했다.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차이를 빠르게 눈치채는 편이었으니까.
“부족한 점이 많은 아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내 말에 로델린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무슨 고생을 했겠니. 왕도에 도는 우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거지 같은 생활환경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경험해봤다. 하지만, 로델린에게 있어서는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괜히 재벌이나 정계의 거물들이 교도소에 끌려간 다음 의기소침해지는 게 아니다.
교도소 안에서 제아무리 특별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제아무리 그래도 그 치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생활이기 떄문이다. 아무리 교도소가 그 사람의 눈치를 본다 해도 코스 요리를 교도소 안에 준비할 수는 없잖아. 아마 그런 잘나신 분들은 교도소 안에서 비닐로 포장된 훈제 닭다리 같은 것도 처음 봤을걸.
어쨌든, 알고 있는 괴로움을 견디는 것은 모르는 괴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수월하다. 로델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주의 시간을 그 안에서 견뎠다.
그 괴로운 시간은 로델린이 자초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내가 풀려났다는 건 교단 대주교님들의 오해가 풀렸다는 뜻이겠지. 다행이구나.”
로델린은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단과 척을 지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불안하구나.”
나는 로델린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그 말씀은 지킬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로델린이 잡고 있던 손에 약간 힘을 주었다.
“나 때문이라면 부디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힘들었다고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고, 영주가 교단과 척을 지는 것은 현명한 생각이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 않니. 오해에서 비롯된 악행을 선의에서 비롯된 용서로 돌려준다면 교단에서도 분명히….”
로델린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 말을 잘라먹고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일리온 교단으로부터 습격이 있었습니다. 타고 있던 마차가 내려앉고, 열 명이 넘는 뛰어난 실력의 검사와 마법사들이 제 목숨을 노리더군요.”
내 말을 들은 로델린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말이… 정말이니.”
로델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몰튼브라운 숲에서 왕도까지 이동하던 길에 당했던 습격에 대해 말해주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차분하던 로델린의 표정에 당혹감이 자리 잡나 싶더니, 이내 서서히 분노로 변하기 시작한다.
“저와 클로에의 실력이 부족했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겁니다.”
로델린의 턱에 힘이 들어간다.
“이미, 어머니가 감금되기 전부터 교단과 제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로델린이 그 말에 눈을 감고 한참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로델린을 바라보았다. 이내, 로델린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적은 만들지 않는 편이 좋단다. 하지만, 이미 적이 되어버려 관계를 돌이킬 수 없다면 그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마렴.”
로델린의 말은 단호했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방금과는 명확하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습격받았다는 이야기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자신이 그런 처우를 받은 건 넘어갈 수 있지만, 아들이 죽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은 넘어갈 수 없었던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