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찾아올게요.”
내 말에 로델린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일 보자꾸나.”
인사를 마치고 문을 나선 나는 다시 클로에가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클로에는 이미 잠에서 깨 뭔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건 뭐야?”
내 말에 클로에가 서류를 살살 흔들며 대답했다.
“일종의 조직도 같은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응?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긴, 세자저하께서 아무 준비도 안 하시진 않으셨을 테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이 넓은 파이크 왕국에 자리 잡은 교단의 모든 교회를 달랑 나와 클로에만 시켜 작살 낼 수는 없다. 당연히, 내가 아래에 두고 부릴 사람들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확인 좀 해보자.”
내 말에 클로에가 시원스럽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치안대와 감사청, 왕국의 기사단에서 각각 필요한 인력과 물자, 공간 등을 제공해 줄 예정이에요.”
그래 뭐, 애초에 세자가 나에게 인사선발권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나라에서 영웅 취급받는 상황에 악마에 대한 누명을 벗었을 뿐 아니라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까지 차지했잖아. 세자와 나 사이의 관계가 아무리 좋다 해도 거기까지 나를 밀어주는 건 아무래도 부담되겠지.
게다가, 애초에 나는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나면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로 향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내가 휘하에 두고 부리는 조직은 그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고,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해산이 예정되어있다. 단기간 존속하면 되는 조직을 위해 사람을 새로 뽑고 예산을 편성하느니, 그냥 이미 있는 조직에서 인력과 자금을 뜯어내 꾸리는 편이 좋지.
그 뭐냐, 국회의 특별위원회처럼.
“첩보국은?”
내 말에 클로에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번에 마틴 님이 담당하게 되는 일은 첩보국에서 담당하는 일과는 꽤 거리가 멀잖아요.”
“하긴.”
첩보국에서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은 좀 그림이 이상하긴 하다. 한국으로 치면 검찰이 해야 할 일에 갑자기 국정원이 끼어드는 격이잖아? 그런 건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지.
“이 명단에 포함된 주요 인물들과는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명단에 적혀있는 주요 인물들에게는 연락을 보낼 예정이에요.”
나는 그 말에 잠깐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조금 더 지나면 노을이 질 것 같은 하늘이다.
“만나는 날짜는 언제로?”
“일정은 다시 조절해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나흘이 넘지는 않을 거예요.”
클로에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늦어. 오늘 밤 안에 만나야 해.”
내 말에 클로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있어, 세자저하께서 대주교들 앞에서 그 자식들 때려잡는 처형인으로 나를 임명하겠다고 선언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이내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선전포고를 당했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없다. 아마, 대주교들도 분주히 나름의 대비를 하는 중이겠지.
“연락을 넣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넣어놓고….”
나는 잠깐 고민한 다음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약 세 시간 이후에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다소 무리한 요청이 아닐까 싶은데….”
클로에의 말에 나는 옷장으로 다가가 코트를 챙겨 입고 단추를 여미며 대답했다.
“세자저하의 이름을 걸어놓으면 무리한 요청은 아니게 되겠지.”
“그렇겠군요. 알겠어요. 외출하시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행선지를 말했다.
“왕도에 있는 교회로 향할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혼자서 세 교단의 교회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으실 텐데요.”
“가장 돈이 되는 녀석부터 잡아서 조져야 세자저하께서도 기뻐하시겠지.”
바레스, 하운, 일리온. 이 세 교단 중에 가장 돈이 많은 교단은 역시 일리온 교단이다. 지금 당장 최우선적으로 달려들어서 뭘 못하게 묶어둬야 하는 것도 당연히 일리온 교단이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세요.”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온 나는 곧장 왕도에 있는 일리온 교단의 교회로 향했다.
내가 교회 앞에 도착했을 때 즈음,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일리온 교단의 교회로부터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그걸 보고 마차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외쳤다.
“거기, 마차 당장 멈춰!”
내 외침을 들은 마부가 마차를 움직이다 말고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마틴 레드우드 님?”
이젠 왕도에서는 내 얼굴을 모르는 녀석들이 없군. 동네 마부까지 알아볼 정도라니.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바라봤다.
“뭘 운송하는 중이지?”
내 말에 마부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릅니다.”
뭔지도 모르는 물건을 운송하는 중이라니. 나는 그 말에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흘렸다. 뭐,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나는 그 마차의 안을 확인하는 대신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마차를 다시 일리온 교단 교회의 정문 옆에 멈춰두도록.”
내 말에 마부가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어물어물 입을 연다.
“하지만… 그, 일리온 교단의 사제님들께서.”
나는 그 말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명이다. 네가 거역하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내 말에 마부가 히윽, 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고는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마차를 교회의 정문 옆에 멈춰두도록 지시한 나는 천천히 교단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이런 멍청한 녀석!”
교단의 사제들이 다시 마차를 끌고 돌아온 마부를 향해 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고, 사제님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내 말에 마부를 조지고 있던 사제들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이어서 천천히 녀석들이 모가지가 내 쪽으로 돌아간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딱딱한 움직임이었다.
“마틴 레드우드.”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이렇게 만나게 되니 참 기분이 묘하네요.”
이 정도면 인사는 충분히 나눴다고 생각해야겠지. 나는 시선을 마부에게 던지며 말했다.
“너는 마차를 여기에 두고, 왕도 치안대의 사람을 불러오거라.”
사제들에게 말로 쥐어 터지고 있던 마부는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나는 팔을 꼰 채 내 옆에 서 있는 마차를 발끝으로 툭 하고 찼다.
“이건 다 뭡니까?”
내 말에 사제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나 같아도 대답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건 이 세상에 사람 마음 말고는 없는 법이다.
“이야, 이게 다 무슨 상자람.”
마차의 천막을 들추자, 마차 안에 가득한 상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휘파람을 한 번 불고 사제들을 바라봤다.
“이건 전부 조사를 위해 동결해두겠습니다.”
내 말에 사제들이 얼굴을 굳혔다.
“마틴 레드우드, 아직 정식으로 어명이 떨어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사제들의 말에 나는 가볍게 손을 휘휘 저었다.
“세자저하의 입에서 직접 나오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자저하께서는 현재 국왕 폐하를 대신해 국정을 운영하고 계시지요. 어명이라는 게 왕께서 내리신 말씀이라는 뜻 아니었습니까?”
너희들을 조지는 사형집행인은 나다. 국왕으로부터 국정운영을 위임받은 세자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이 흘러나온 이상 그게 어명이고, 어명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다. 그게 왕국이라는 거다.
“….”
“그래도,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여기에서 바로 이 상자를 까볼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초를 꺼내 마차에 달린 램프를 통해 불을 붙였다. 촛농이 생기자, 나는 상자의 뚜껑 부분에 그 촛농을 떨어뜨린 다음 코트의 단추 하나를 떼서 그걸로 촛농을 눌렀다. 녹아내린 촛농은 상자의 뚜껑 위에 레드우드의 인장이 찍힌 채 굳었다.
누구든 이 상자를 열려고 하면, 이 촛농에 문제가 생길 거다. 일을 다 마친 나는 초를 슬슬 흔들며 말을 이었다.
“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조치해 둘 뿐입니다.”
마차 안의 상자에 죄다 촛농질을 해놓은 나는 마차에서 내려 사제의 어깨를 탁탁 두들겼다.
“안색이 안 좋으시네. 요즘 뭐 힘든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어차피 대답을 듣고 싶어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기에, 나는 사제의 대답은 듣지 않고 마차에 걸터앉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교회 인근을 담당하는 치안대의 병력과 간부가 다가왔다.
“마틴 레드우드 님,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나는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며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세자저하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치안대의 도움을 조금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교회 내에서 외부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통제해주시고, 내부의 물자와 서류를 압류해주세요.”
내 말에 간부가 나와 교단의 사제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죄송하지만,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따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마틴 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지시를 이행해 마땅하지만, 만일 그렇지 않을 시에는 말씀하신 지시를 이행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그 말에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감당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후에 발생하는 사태는 전적으로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제가 요청한 일을 해주시고, 동시에 상부에 보고해 제 발언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시면 어떨까요?”
내 말에도 불구하고 치안대의 간부는 여전히 혼동스러운 표정이었다.
“세자저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중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이 지시를 이행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겠지만… 반대로, 정말로 제가 세자저하의 지시에 따라 치안대에 이러한 요청을 한 것이라면, 요청을 이행해주지 않으셨을 때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내 말에 치안대 간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일을 이행하는 동시에 이 일에 대해서 왕도 치안대 본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는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종류의 경험이 없는 건 아니잖아? 내 말에 간부가 인사를 한 다음 뒤편에 있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리온께서 이 일을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
병사들이 사제들에게 다가가자, 곧바로 사제들의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병사들이 눈치를 보자, 간부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모셔라.”
간부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빠르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다. 교회로 들어가는 문에는 출입을 금하는 표시줄이 만들어지고, 병사들이 교회로 들어가는 문을 감시할 준비를 한다.
“이게 다 무슨 일이냐!”
그리고, 이 소란 끝에 대주교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 딱 걸음을 멈춘 다음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마틴 레드우드.”
“또 뵙게 되는군요, 대주교님. 평안하셨습니까.”
내 말에 그가 대뜸 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지금 이게 다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이냐. 이곳은 신이 머무시는 집이다. 그대들은 어찌 그 흙 묻은 신발을 털 생각도 없이 이리도 신의 집을 모욕할 수 있단 말이냐. 진정 일흔 아홉 개 지옥에 떨어져 뼈를 부수고 살을 녹이는 고통 속에 참회하고 싶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