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노발대발 화를 내는 대주교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세자저하께서 대주교님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일입니다. 대주교님께서는 어찌 스스로 약속한 일에 협조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내십니까?”
대주교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한다. 야, 누가 저 친구 오른손에 크리스털로 된 재떨이 하나 쥐여줘 봐라. 나한테 던지나 안 던지나 한번 보고 싶어지네.
“공식적인 서류 없이 교회의 사제들을 억류하고! 물자의 이동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냐.”
처음에는 고함으로 시작된 대주교의 성난 목소리는 끝에 가서는 빠른 속도로 누그러지고 있었다.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나에게 고함을 칠 입장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이성이 일깨워준 덕분이겠지.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식적인 서류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일리온 대주교님을 포함한 대주교님들께서 세자저하와 한 약조에는 세 분의 인장이 분명히 찍혀 있습니다.”
옥새가 찍히고 대주교들의 인장까지 찍힌 서류가 공식적인 서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
“….”
내 말을 들은 녀석의 표정이 확 썩는다. 이 친구가 그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녀석이 뭐라고 더 말을 이어가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럼,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친 나는 치안대의 간부를 바라봤다.
“부탁드린 일은 예정한 것처럼 진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염려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마틴 레드우드 님.”
간부는 재빠르게 상황을 눈치채고 나에게 경례를 한 다음 병사들을 독촉하기 시작했다.
대주교가 나에게 제대로 대응할 말을 찾아내지 못하자, 치안대의 간부는 교회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요청한 일을 진행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은 모양이다.
과연, 왕도 치안대의 간부 정도 하는 사람은 머리가 제법 굴러가기 마련이지. 하긴,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서는 치안대에서 쌓은 공적도 공적이지만, 그 이상으로 권력의 냄새를 맡는 능력도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남이 차려놓은 밥을 빼앗아 먹는 정도로 약아 빠진 사람은 못 쓸 사람이지만, 최소한 자기가 차려놓은 밥을 남한테 빼앗기지는 않을 정도로 사람이 약기는 해야 한다.
“그럼, 고생해주세요.”
하운 교단과 바레스 교단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클로에가 불러놓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이 정도면 가장 먼저 팔다리를 묶어놓고 싶었던 일리온 교단을 잡아두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만족하고 일단 돌아가자. 나는 어둑해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확인하며 몇 가지 부탁을 더 마친 다음, 왕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오셨네요, 다들 막 도착한 상황이에요.”
내궁 입구에 도착하자, 클로에가 미리 연락을 받았었는지 목발을 짚고 나와 있었다.
“그래?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목적은 이루셨나요?”
나는 그 말에 내 얼굴을 가리켰다.
“잘 봐, 조져 먹은 표정은 아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안내했다.
“치안대장 로버트 칼빈과 왕궁 기사단장 모리스 핀들턴 경, 그리고 감사청장 데인 딥호른이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그 말에 으허, 하는 소리를 냈다.
“거물들만 모였군그래.”
“지금은 마틴 님이 그분들보다 더 거물이에요.”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 이 일을 끝내고 나면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겠어.”
“세자저하 때문인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저하의 눈 밖에 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 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은 세자여야 한다. 나는 그 사람의 걸림돌이 될 생각이 없다.
나에게 엿을 먹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도리어, 큰 도움을 받았다. 도움을 받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해로운 사람이 될 생각은 없다.
“적정선을 유지하면 알아서 잘 챙겨 줄 사람이야.”
그런 말을 남긴 나는 클로에가 안내해 준 문 앞에 서서 옷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
가장 먼저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넨 건 모리스 핀들턴이었다. 나도 마주 웃으며 그를 향해 인사했다.
“간만에 뵙습니다, 기사단장님.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내 말에 그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라가 흔들려도 다시 붙들어 놓을 인재가 있는데, 내가 시름에 빠질 일이야 어디 있겠나!”
모리스 핀들턴은 그런 소리와 함께 한동안 웃은 다음 자자, 하는 소리를 냈다.
“인사들 나누지. 나머지 두 명은 이 친구를 보는 게 처음일 텐데.”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감사청장인 데인 딥호른이었다.
“데인 딥호른, 부족한 몸이지만 감사청장으로서 국왕 폐하를 보필하고 있네.”
감사청. 쉽게 말해서, 이 나라의 정수필터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이다. 개짓거리 하는 녀석들을 가려내고, 선을 넘는다 싶으면 잡아서 조지는 친구들. 그리고, 그 조직의 수장인 데인 딥호른은 마흔 후반 정도로 보이는, 키가 꽤 작은 남성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굉장히 깨끗하지만, 몇 번이고 수선해서 고쳐 입은 거다.
양 손목의 소매 부분이 닳아서 반질거리고, 근육이 발달하지는 않았다. 검이 아니라 펜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가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다. 결혼반지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놋쇠로 만든 물건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였다.
청백리.
맙소사, 세상에 개념은 존재하지만 실제로 볼 수는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톱을 달리는 두 가지가 바로 평범하고 행복한 4인 가정과 청백리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다소 섣부를 수 있지만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청백리가 맞아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틴 레드우드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사실, 저도 연이 닿게 된다면 감사청에서 일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 말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거절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잠깐 움찔했다. 데인 딥호른은 나를 슥 훑나 싶더니 말을 이었다.
“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지.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지만, 감사청에는 걸맞지 않아. 그 눈은 귀족 도련님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뒷골목의 느낌이 있단 말이지.”
나는 그 말에 하하하 하고 웃었다. 관심법을 하고 싶으시다면 눈에 황금 안대 정도는 착용하는 게 어때?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내 말에 데인이 대답했다.
“당연히 칭찬이다. 자네는 국왕 폐하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인재야. 다만, 그 힘을 발휘할 곳이 감사청이 아니라고 말한 것뿐일세.”
말을 마친 그는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다음은 치안대장인 로버트 칼빈이었다.
“로버트 칼빈이다. 치안대장이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살이 두둑하게 붙은 중년의 남성은 언뜻 보기에는 동네 편의점에서 맥주나 먹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여기에 가볍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으로 치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국방부 장관이랑, 검찰총장이랑, 경찰청장이라고 할 수 있잖아.
이 세 명이 여기에서 작당하고 누구 하나 역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리는 사이에 끝날 거다.
“그럼,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리고 나는 이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자원과 인력을 받아낼 예정이다. 자리를 안내하자, 세 명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그들 앞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일단, 세자저하께서 저에게 하명하신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감사청장인 데인 딥호른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사안이 중요한 만큼, 일에 신중을 기해 무고한 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저만큼이나 감사청에서 고생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나라에 존재하는 세 교단의 교회를 전부 탈탈 털어내야 하는 일이다. 감사청에서 충분한 인력과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첩보국은 은밀하게 행동하며 뒤에서 정보를 모으지만, 감사청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냥 정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서 다 쓸어내는 사람들이다. 첩보국이 은밀하게 접근해 적이 눈치채기도 전에 숨통을 노리는 암살자와 같다면, 감사청은 마치 전차처럼 들이받아 상대를 정면에서 개박살 낸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전차지 암살자가 아니다.
“정보라면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네. 요청하는 정보가 세자저하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될 경우, 정보의 기밀 여부를 불문하고 제공하지.”
“인력은 제공이 힘든 상황입니까?”
내 말에 감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상황으로서는 감사청의 인력을 다수 제공하기 힘들지. 수확철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수확철이라. 귀족들이 수확량을 속이기 딱 좋은 시기이긴 하다. 그러니만큼, 감사청에서는 인력을 동원해 왕국 내 영지의 예상 수확량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모양이다. 국고로 들어오는 수입과 직결되고, 전국적으로 실시되어야 하는 만큼 감사청에서는 아무래도 인력을 빼주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게 데인 딥호른의 설명이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겠죠.”
그렇다고 제공해주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만족할 만한 숫자가 아닌 정도일 뿐이다. 다음으로 입을 연 것은 모리스 핀들턴이었다.
“돌아가면 즉시 각 지역에 주둔 중인 기사단에 연락을 넣어 충분한 인력을 지원하도록 하겠네. 걱정하지 말게. 제국도 움직임이 얌전하고, 지금은 양국 모두 전후 복구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네가 필요로 하는 인력은 그 이상을 지원해 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기사단장님.”
다음은 로버트 칼빈이었다.
“우선, 어떤 식으로 구성할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겠지?”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로버트의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교회 하나당 감사청의 사람 한 명과 치안대 병력 및 기사단의 병력을 동원할 생각입니다. 치안대 병력은 교회에 출입하는 인물과 물자를 통제하고 내부의 물자와 서류를 압류합니다. 감사청에서 보낸 사람은 해당 물자와 서류를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기사단의 병력은 그 와중에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무력 충돌을 대비하고, 작성한 보고서와 확보된 증거를 왕도로 호송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내 말에 로버트 칼빈이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지금 감히 치안대 병력으로 하여금 감사청 아래에서 일하도록 지시할 생각인가?”
“도움을 주시는 세 조직의 평시 업무를 고려해 내린 결정입니다.”
감사청은 자료를 파악하고 그 허점을 찾아내는 데 능할 것이다. 원래 하던 일이 그런 거니까. 치안대는 당연히 범죄 현장의 보존이나, 사람과 물자의 출입 통제에 능하니 당연히 관련 분야의 일을 시킨다. 기사단의 병력이 만약의 무력 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평시 업무라.”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보한 자료 분석에서 실수가 생기면 감사청의 잘못이다. 사람과 물자의 출입 통제 및 현장 보존에서 문제가 생기면 치안대의 잘못이다. 그리고, 확보한 증거의 후송 및 무력 충돌 통제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기사단의 잘못이다.
사람은 조졌을 때 남이 개박살 나는 게 아니라, 내가 작살나는 상황이 되어야 열심히 일하는 생물이거든. 공산주의가 망한 걸 보면 알 수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