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첫 뇌물 사건 이후 며칠 뒤, 나는 마침내 레드우드 영지에서 출발한 레온 레드우드가 왕도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보고를 받은 클로에가 곧바로 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 바로 이 건물로 안내하는 중이에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차를 좀 부탁할게. 도착하면 바로 마련해 둔 방으로 안내해줘.”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미리 마련해 놓은 방으로 향했다.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열렸다. 레온 레드우드, 그리고 데이먼 레드우드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차 한 잔 드시겠습니까?”
내가 주전자를 들자, 레온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곧바로 다소 성이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나는 그 말에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설탕을 넣으시는 편이셨죠. 좋은 차는 아니지만 일단 마련할 수 있는 여건 내에서는 꽤 좋은 녀석입니다.”
내 말에 레온이 턱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봤다.
“대답해라.”
나는 그 말에 하하, 하고 웃은 다음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제 질문을 무시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길래, 저도 그러는 중입니다.”
내 말에 레온이 뭐라고 화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고 찻잔을 내밀었다.
“한 잔 다오.”
“네. 아, 형님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차 세 잔을 따라 각자의 앞에 두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나는 입을 열었다.
“레드우드 가문 또한 영지에 자리 잡은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로서는 조사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내 말에 레온이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네 가문이다. 네가 자란 땅이고, 네 조상들이 굽어살피는 땅이다. 네가 정녕 사사로운 원한에 미쳐 가문에 위해를 끼칠 생각이냐.”
레온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지금 내 말을 비웃은 거냐.”
레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웃긴 이야기긴 하지 않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라.”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찻잔을 내려놓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저는 쿠르스트 산맥으로 끌려가 하이랜더들의 습격을 막아냈습니다. 이후, 왕국의 기사단장 중 하나가 불미스러운 조직의 소속이라는 점을 밝혀내고 이를 처단했습니다. 그린모스 늪지대에서 출몰한 무수히 많은 언데드를 해당 지역의 용맹한 병사들과 함께 막아냈지요. 이후, 제국에서 왕국을 공격하자 한때 쿠르스트 산맥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하이랜더들을 설득해 그들을 이끌고 제국의 공세로부터 왕국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몰튼브라운 숲에 소환되었던 태초마를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보냈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두 사람을 슥 훑었다.
“그동안 두 분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도대체 뭘 하셨습니까?”
내 말에 두 사람이 침묵했다. 나는 레온을 바라봤다.
“아버지께서는 베로나 왕국과의 싸움이 이어지는 와중에 모든 귀족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맞서야 할 상황에서 쿠르스트 산맥에서 발생한 베로나 제국과의 마찰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방해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는 태초마 헤로스와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가문의 일원인 저를 지원하지는 못할망정, 근거 명확하지 않은 헛소문에 선동되어 저를 왕도로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지요.”
말을 마친 나는 비꼬는 어조로 한마디를 툭 뱉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네 아버지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네 몸에 흐르는 피는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갑자기 몸 안에 흐르는 피의 출처에 대해 말하는 데이먼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형님 이야기는 더 할 필요도 없겠지요. 말 그대로 이 몇 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으니.”
내 말에 데이먼이 뭐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내가 더 빨랐다.
“부끄러움을 좀 아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제가 이 왕국에 봉사하기 위해 수많은 일을 극복하는 동안 도대체 뭘 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데이먼이 몸을 움찔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곧바로 레온 레드우드가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마틴 레드우드. 나는 네 아버지다. 그리고, 너는 가문에 빚이 있다.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누렸던 모든 것은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레드우드 가문 아래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네가 누렸던 권리가 있다면, 마땅히 그 권리에 따라오는 의무도 지켜야 하는 법이다.”
나는 그 말에 활짝 웃었다.
“권리라. 아버지, 기억하실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익사해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이후,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약간 어깨를 앞으로 내밀고 그를 바라봤다.
“과거에 제가 가문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당연히 모릅니다. 처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었을 때도, 아버지와 어머니라기보다는 그저 모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 같은 느낌이었지요.”
사실, 그게 정답이기도 하다. 내 눈앞에 있는 레온 레드우드도, 내 어머니인 로델린 레드우드도 사실 마틴 레드우드가 아닌 나에게는 그냥 남이었을 뿐이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레온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기억을 잃은 저에게 많은 것들을 해주셨습니다. 자신이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희생하고,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셨죠. 지금은 제 어머니가 저를 아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저도 제 어머니를 어머니라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떻습니까?”
내 말에 레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 너는 적게 잡아도 지난 7년 동안 레드우드 가문에 먹칠을 했다. 내가 나서서 수습해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반성하기는커녕 점점 더 그 행실이 나빠져 갈 뿐이었다!”
그래. 마틴 레드우드는 익사하기 전까지 망나니였다. 그 점은 나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레온 레드우드가 나를 쿠르스트 산맥으로 유배 보낸 것은 마틴 레드우드가 이전까지 받고 있던 평가와 행적을 고려해보면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처음 쿠르스트 산맥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졸지에 억울하게 끌려가게 된 내 입장에서는 분노할 만했지만…….
“제가 이러는 이유는 아버지가 저에게 내린 처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란 말이냐!”
자리에서 일어난 벌떡 일어난 나는 레온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외쳤다.
“아버지의 아내이자, 내 어머니인 로델린 레드우드는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레온이 뒤로 한발 물러선다. 내가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낸 레온의 행동 자체는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해도 마틴 레드우드가 지금까지 해온 행적이 있으니까. 나는 시선을 돌려 데이먼을 바라봤다.
“제 어머니인 로델린 레드우드는 아버지가 저로 인해 힘들어할 때 마찬가지의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힘들었을 겁니다.”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죄책감을 아직까지도 벗어던지지 못한 불쌍한 여자다. 지금의 로델린을 보면 알 수 있다. 익사 이후 마틴 레드우드의 몸 안에 내가 들어오면서 그동안 느껴야 했던 죄책감은 많이 사라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으로 점철된 이전까지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외면하고, 홀대하고, 한 번 찾아와보지도 않고. 제 어머니는 그렇게 레드우드 영주성 안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로델린이 레드우드 영지를 떠난 건 내가 강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제안을 했고, 로델린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기에 있고 싶지 않았던 거다.
“아버지가 제 어머니가 영지를 나가겠다고 했을 때 막아선 건 제 어머니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었죠. 그저, 아내가 영지를 나갔다는 소문이 다른 귀족들의 귀에 들어가는 게 걱정이었던 겁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아서 레온을 비꼬기 시작했다.
“막상 나가고 나서, 제가 이루어낸 일들로 인해 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것 같자, 신경이나 한번 쓰셨습니까?”
전혀, 레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로델린이 왕도에 머무를 때도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았고, 그녀가 테네스 공국으로 갔을 때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왕도에서 교단에 의해 구금되었을 때도 한 번 찾아가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 어머니에게 여태동안 무관심했습니다. 당연히, 앞으로도 무관심하겠지요.”
말을 마친 나는 찻잔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내가 어디에서 뭘 하건, 어떤 생활을 하건, 어떤 취급을 받건…… 걱정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쓰는 남편을 남편이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레온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먼은 옆에서 조용히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내뱉듯이 말했다.
“몇 주간 교단에서 구금 생활을 한 아내에 대한 걱정은 한 조각도 없이 그저 자식 놈이 가문에 위해가 될 일을 하려 하니 화들짝 놀라서 헐레벌떡 왕도로 달려오시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죠.”
“그래도, 너는 레드우드의 사람이다. 네 몸에 흐르는 피는 변하지 않아.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나는 레온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를 데리고 영지를 나갈 적에 아버지가 저에게 해주셨던 덕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레드우드 가문의 비호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었지. 말을 꺼냈던 당사자가 그걸 기억하고 있지 못할 리는 없다.
“그건, 갑작스러운 사태가 눈앞에 닥쳐오자 너무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레온이 갑작스럽게 행동 방침을 바꾼다.
“미안하다, 나는 너에게 있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네 어머니에게 있어서도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지 않겠니.”
말을 마친 레온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싼다. 나는 어깨 위에 올려진 손을 보다가 건조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래서 뭐, 이제 여기에서 제가 펑펑 울면 되는 부분입니까? 죄송하지만 별 감흥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레온이 자기도 모르게 내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을 치웠다.
이게 무슨 일일 드라마 같은 거로 보이냐. 아버지가 슬픈 표정 지으면서 아들에게 사과하고 손 뻗어서 어깨 쓰다듬으면 그걸로 아들이 펑펑 울면서 아버지이이이…… 같은 소리 하며 눈물 콧물 질질 짤 줄 알았어?
“너는 변하지 않았니. 마틴, 분명히 너는 이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착각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많이 변했다. 나 또한 그럴 수 있어. 아들아, 이 부족한 아비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
나는 정말로 사람이 변한 거다. 하지만 레온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눈앞에서 이런 식으로 감성팔이를 한다고 홀랑 넘어갈 정도로 대가리가 빠가사리는 아니다. 나는 다시 편안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고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많이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레온의 얼굴에 일말의 희망이 피어오른다. 나는 그 표정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도 나이가 제법 있으신데, 자식들이 아직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노쇠하신 몸을 이끌고 영지를 다스리셨죠.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레온은 이어지는 내 말을 듣고 살짝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낀 모양이다. 레온의 나이는 노쇠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가 절대로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않으시고, 일선에서 물러나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왕국을 위해 수많은 공적을 세워 제 능력을 증명했습니다. 이제 제가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리려 합니다.”
“아들아, 마틴. 나는 아직 정정하다.”
레온의 목소리가 서서히 떨리기 시작한다.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 명확하게 짐작한 낌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