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66화 (266/275)

266화

내가 바란 켄웨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택에는 계속해서 손님들이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란 켄웨이는 오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나와 함께 방 안에 콱 박혀서 대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야, 똥줄이 탈 만도 하니까. 바란 켄웨이는 분명히 이번에 교단의 편을 들었던 귀족 중 하나다. 이후, 일이 글러 먹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 공개취조 과정에서 왕도에 모인 백성들을 위해 막대한 양의 물자를 공급하며 세자가 휘두를 예정인 칼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지금 나를 만났다. 교단의 편에 붙어먹기는 했지만, 일이 글러 먹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다시 세자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간 남자다. 박쥐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불이 난 집에서 빨리 도망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교단의 공개취조가 끝난 다음 하루하루가 바쁘다고 들었는데.”

켄웨이 남작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을 뿐이겠지만, 나는 먼저 꺼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한 마디였다. 당연히,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작업을 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약간 고민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말에 그냥 가볍게 말을 던져봤던 바란 켄웨이도 그 순간 표정을 좀 바꿨다. 이런 식으로 운을 떼면 으레 부탁이 나오기 마련이고, 부탁에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대가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특별집행부 관련 문제인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특별집행부는 어명에 따라 착실하게 업무를 진행 중이고, 그 성과도 명확하죠. 제가 고민하는 건 약간 사적인 문제입니다.”

사적인 문제. 레드우드 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이 정도로 눈치 빠르게 편을 옮기는 사람이 모를 리가 없다. 바란 켄웨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래, 레온 레드우드 백작께서 자네에게 다소의 오해를 품고 있기는 하지.”

“그렇습니다. 사실,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하기에는 제 마음이 너무 복잡하지요.”

내 말에 바란 켄웨이가 살짝 자세를 바로잡았다.

“복잡하다는 건?”

“한때 존경하던 분이지만, 아무래도 세월이 원수인지라…… 이전과 같은 명석함과 냉철함이 많이 녹이 슨 게 아닌가.”

내 말에 바란 켄웨이가 잠깐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것이…….”

남의 가정사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어필하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다. 바란 켄웨이는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말을 아끼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가정사의 문제라 해도 다른 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구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계획을 바란 켄웨이에게 말할 생각은 없다.

“그래, 그렇겠지. 사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가정 내부의 불화지만, 백성들의 위에 서는 귀족의 가정사는 공적인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으니까.”

말을 마친 바란 켄웨이가 내가 이어서 할 말을 기다린다.

“가문 내의 문제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말에 바란 켄웨이가 잠깐의 침묵 끝에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그는 별다른 말 없이 파이프 안에 연초를 집어넣는다.

대답이 돌아온 것은 파이프 속에 들어있던 연초가 다 타고 난 다음이었다.

“내가 조금은 힘이 되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입니다.”

바란 켄웨이 자작은 교단과 세자의 싸움에서 이미 한 번 줄을 잘못 잡아 상황이 난처해진 상황이다. 급하게 잡고 있던 동아줄을 버리고 세자에게로 향하는 밧줄을 붙잡기는 했지만, 급하게 갈아탄 탓에 줄을 잡고 있는 손이 불안하다.

여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자의 편에 서 있던 나를 도와준다면, 나도 마찬가지로 바란 켄웨이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

“그래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바란 켄웨이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켄웨이는 재떨이 위에 올려놓은 파이프를 다시 챙기며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자, 그럼 이제 슬슬 다른 손님들도 모였을 테니 내려가 보도록 하지. 소개해주고 싶은 분들이 아주 많다네. 모두 자네를 한번 보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사람들이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그가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니. 그 나이에 그 정도 공적을 세우지 않았나.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자네가 이루어낸 업적을 학자들이 연구하고, 백성들이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들려줄 테고, 시인과 작가들이 서사시를 만들만 하다 생각하네만.”

나는 어색하게 웃어주며 그와 함께 문을 나섰다. 마련된 연회장에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마틴 레드우드.”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나를 보며 무슨 불알친구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사실, 불알친구보다 더 반갑겠지.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상당수의 눈에 나는 휘몰아치는 압박의 바람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한 가닥 활로로 보이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일단 다들 내 앞에서는 웃는 낯을 보이며 행동을 조심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미 정해진 결과가 변하지는 않는다. 이미 여기에 오기 전부터 내 머릿속에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사람들을 명단으로 정리해 둔 상황이었으니까.

살생부는 원래 사람을 만나보고 나서 만드는 게 아니다. 이게 무슨 회사 면접도 아니고, 저승사자가 만나본 다음에 데려갈지 말지 결정하는 거 봤어? 소개팅이야?

만나기 전에 만들어 놓고, 수정할 일이 생기면 수정하는 거다. 물론, 만들어 놓은 살생부가 수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안녕하세요.”

나는 손에 술잔을 든 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론 레드클리프.”

내가 그의 이름을 말하자, 녀석의 표정이 살짝 밝아진다.

“저를 아시는군요.”

“레드클리프 백작가를 모르는 귀족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 장남 정도는 교양으로 알고 있어야죠.”

내 말에 그가 부끄러운 듯이 머리를 긁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그 마틴 레드우드가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이거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요?”

레드클리프 백작가는 이미 머릿속 살생부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다. 세자의 타오르는 응징은 이 가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딱히 내 입장에서는 이 친구의 가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주변을 살피던 론 레드클리프가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자 저하께서는 저희 가문을 살려 둘 생각이 없으시겠지요. 당연히, 마틴 레드우드 님도 세자 저하께서 결정하신 사안을 굳이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실 리는 없고.”

나는 그 말에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다시 돌려놓았다.

“재미있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 말에 론 레드클리프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줄을 잘못 잡았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잘못 잡고 계시지요. 세자 저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가문의 창고가 다소 궁핍해지는 한이 있어도 내밀어 주신 손을 잡았어야 합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이번에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저를 찾아오셨다는 건, 뭔가 제안할 만한 일이 있다고 이해해야겠군요.”

내 말에 론 레드클리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우드 가문의 영지에서 출발한 마차에는 통행세를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고작 그 정도로?”

내 말에 론 레드클리프가 대답했다.

“고작 그 정도가 아닐 것 같은데요, 마틴 레드우드.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와 레드우드 가문의 영지 사이의 거리는 제법 되는 편입니다. 그리고, 그 이어지는 길목에는 저희 가문의 영지도 자리 잡고 있지요.”

말을 마친 론 레드클리프가 다소 긴장한 모양인지 심호흡을 하고 잔을 손에 들었다. 물론, 손에 쥐어진 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무서운 거다.

“저희 가문 내부의 사정은 꽤 유명한 걸로 아는데요. 제 아버지께서 레드우드 영지를 저에게 물려주실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론 레드클리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당신이 마음먹는다면, 레온 레드우드 백작님의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답을 들은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차분하게 감췄다. 레드클리프 가문의 이름 위에 그어져 있던 붉은 줄을 지워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어디, 조금 더 들어볼까.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와 레드우드 영지 사이에는 레드클리프 가문의 영지뿐 아니라 다른 영지들도 많이 걸쳐져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통행세를 면제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제안인지 잘 모르겠군요.”

내 말에 론 레드클리프가 양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

“저를 시험하시는군요. 레드클리프 가문에서 자발적으로 레드우드 가문의 인장이 찍힌 마차의 통행세를 받지 않는다면, 다른 귀족 가문들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다른 가문이 레드클리프 가문처럼 통행세를 완전히 철폐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 값만큼은 확 깎아 줄 수밖에 없다.

“감이 좋으시군요. 론 레드클리프.”

“아직 배움이 부족합니다.”

겸손 떨기는.

이 친구는 내가 레드우드 영지를 먹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레드우드 영지와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가 각자 가지고 있는 장점도 간파하는 데 성공했다. 내가 활발한 물자 교류를 통해 두 영지를 다룰 생각이라는 것까지 눈치챘다. 날카로운 감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 경로에 자기 가문의 영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이렇게 여기까지 와서 직접 제안을 꺼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손까지 벌벌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력도 있다는 거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가문 하나를 살려주는 대가로 레드우드 영지와 쿠르스트 산맥의 변경백령 사이를 오가는 물자의 통행세를 확 깎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굉장한 이득을 볼 수 있겠지. 다만, 이 제안에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기 때문에, 나는 그걸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당신은 영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통행세를 거둘지 말지 정하는 건 영지의 후계자가 아니라 영주다. 당연히, 후계자일 뿐인 론 레드클리프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통행세 면제에 대한 제안을 할 수는 있지만 그 결정권은 내 눈앞에 있는 이 친구가 아니라 이 친구의 아버지 손에 쥐어져 있다.

“제가 설득할 수 있습니다.”

론의 대답을 들은 나는 다소 어이가 없어서 그를 바라봤다.

“이미 세자 저하께서 주신 기회를 아버지가 내쳐버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는 조언을 했겠지. 그리고 이 친구의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았으니 이 지경까지 온 거다. 이미 한 번 설득에 실패했다는 뜻인데, 이번에는 성공할 거란 보장이 없다. 내 표정을 살피던 론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전에는 제가 아버지를 설득할 때 조금 부드러운 수단을 사용했었지요.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렇죠, 이런 일은 결국 결과가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이해득실이 걸려있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열심히 설득을 했건 중요한 게 아니다. 내놓은 결과가 만족스러워야 한다.

“다만, 당신이 설득에 성공했다고 해서 레드클리프 가문이 반드시 화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이 건에 대해서는 세자와도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니까. 론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사이 나도 세자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겠군.

“어쩔 수 없겠지요. 저는 피해를 줄여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와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말을 마친 녀석은 나에게 살짝 인사를 하고 다시 돌아갔다. 뭐, 여기에 온 이유는 저 친구의 제안을 들은 걸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론 레드클리프를 제외하면, 내가 만들어 놓은 살생부에 변경할 점은 없었으니까.

오래 있어 봐야 더 이상 뽑아먹을 영양가도 없어 보이니 슬슬 돌아가야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임을 주최했던 바란 켄웨이에게 인사를 하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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