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도착하자마자 클로에로부터 전해 들은 소식은, 로델린이 짐을 싸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무슨 일이 있으신 게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
“다시 쿠르스트 산맥으로 돌아가시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아.”
클로에는 잠깐 행동을 멈춘 채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한번 가서 여쭤봐야겠지. 다녀올게.”
흘러가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로델린이 쿠르스트 산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건 아니니 찾아가서 확인하는 게 맞겠지.
방을 나선 나는 곧바로 로델린이 머무르는 장소로 향했다.
“어머니.”
노크하고 문을 열자, 로델린은 침대 위에 커다란 트렁크를 올려두고 옷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모임은 어땠니.”
“크게 대단할 건 없더라고요.”
내 대답을 들은 로델린이 트렁크를 닫았다.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보다, 쿠르스트 산맥으로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너는 어떠니.”
“동감입니다.”
트렁크의 가죽 커버를 쓰다듬던 로델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왕도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도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을 거다.”
로델린은 내가 여기에서 특별집행부의 일을 진행하는 사이, 영지로 돌아가 나에게 인수인계를 마칠 생각인 모양이다.
“조금 더 쉬다가 돌아가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이 나이를 먹고 나니 갑자기 부지런함이 생기는구나.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쉬어도 쉬는 느낌이 아니야.”
로델린은 자신의 왼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편지 한 통을 내 앞에 내밀었다. 봉투의 촛농 봉인은 뜯어져 있었고, 그 촛농 봉인에는 레드우드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아버지가 보낸 건가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편지를 살펴보는 동안, 로델린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하는구나. 자신이 잘못했다고, 그동안 자신이 생각이 짧아 나를 소홀하게 대한 것 같다고.”
로델린의 대답을 들은 나는 재빠르게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로델린은 알고 있는 것처럼 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3년 전.”
로델린의 말에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로델린은 그 편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아마 3년 전에 네 아버지가 나에게 이 편지에 써 내려간 말을 해줬다면…… 아니지, 저 긴 편지의 어떤 문장이라도 단 하나만 말해주었다면.”
로델린은 그렇게 말하며 편지 봉투를 들고 촛불 쪽으로 가져간다.
“이 어미는 울었을 거야. 네 아버지가 그래도 나를 생각해주기는 하는구나. 아직, 깨어진 관계를 수습해 어떻게든 이어붙일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을 하는 동안 편지가 촛불로 서서히 가까워진다. 희미하게 그을음이 생기던 편지는 이내 촛불의 화염을 흠뻑 머금고 타오르기 시작한다. 어두운 밤 중에 타오르는 편지가 로델린의 표정을 비춘다. 타오르는 편지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로델린의 표정에는 온기가 없었다.
“근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편지에 써진 그의 글을 봐도 마음에 동요가 없어. 내가 이전까지 듣고 싶었던 모든 단어를 전부 담은 보석상자 같은 편지인데.”
말을 마친 로델린은 불타오르며 재로 변하는 편지를 가만히 바라본다.
“내 마음이 정말로 멀어진 모양이야.”
타오른 편지와도 같다. 방금 전까지는 편지였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저 편지는 더 이상 편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몇 년 전까지는 로델린도 레온에게 일말의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이제는 남은 게 없다. 편지가 타오르면서 일시적으로 밝아졌던 방 안이, 편지가 재로 변하면서 다시 어두워진다.
“저를 설득해 달라는 마지막 문장 때문에 감흥이 없는 게 아닐까요?”
결국 레온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내 말에 로델린이 살짝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이었다면, 설사 레온의 의도를 알고 있다 해도 저 편지에 적힌 말만으로도 만족했을 거란다. 좋은 지적이지만, 그것과는 관련이 없어.”
대답을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르스트 산맥은 슬슬 날이 추워지고 있을 거예요. 아직 구금 생활의 피로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니, 몸조심하시고…… 안녕히 주무세요.”
“알았다. 너도 일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은 알고 있지만, 그럴수록 몸을 챙기렴. 너도 잘 자라.”
대화를 마친 나는 로델린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수정구를 손에 쥐었다.
― 또 뭔데. 아주 하루가 멀다고 목소리를 들으니 이젠 좀 지겨워지는군.
“전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론 레드클리프와 나눈 대화를 세자에게 전해주었다. 대충 요지를 파악한 세자의 목소리가 약간 딱딱해진다.
― 그래서, 레드클리프 가문을 예외로 해달라는 건가?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그래 주셨으면 합니다.”
― 레드클리프 가문에서 자네의 영지를 오가는 마차에 통행세를 부과하지 않겠다고 했지. 그건 론 레드클리프와 자네 사이에 주고받는 게 있는 거래일 뿐이야. 나름대로 신경 써서 내민 손을 개무시한 가문을 용서해준다고 딱히 나에게 좋을 것은 없어 보이는데.
세자의 목소리는 조금씩 격양되고 있었다.
― 권위 없는 통치는 성립할 수 없어. 그리고, 권위는 신뢰로부터 오는 법이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상이 예정되어 있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고, 벌이 예정되어 있는 자에게는 벌을 내린다. 여태 동안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랫사람들에게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통치는 걸음마도 뗄 수 없지.
“세자 저하의 말씀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친구는 신뢰한다고 해서 헤실거리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성격은 아니었지. 어쨌든, 목소리가 다소 격양되어 있다고 해도 내 이야기를 아예 듣지도 않을 생각인 건 아닌 모양이다.
― 이해했다면 어디 한번 나를 설득해보게.
최소한, 세자가 나에게 설득할 기회를 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와 세자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가깝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좆까. 같은 대답이나, 그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는 어떤 문장이 대답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들이 이전에 괜히 세자가 무서워서 수확량을 속인 게 아니다. 이전에 연락했던 뇌물 문제에서 세자가 화를 내지 않았던 이유는 어차피 살려 줄 녀석들에게 돈 좀 뜯어내도 될까요? 라는 식의 요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자의 설득을 위에 돈이라는 카드를 꺼내봤자 이번에는 큰 의미가 없다. 세자가 먼저 꺼낸 이야기가 권위에 대한 이야기인 이상, 당연히 내 설득의 초점도 권위라는 개념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건 그림을 어떻게 만들어 놓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그림이라.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군.
“세자 저하께서 레드클리프 가문을 용서하는 그림이지요. 이런 말씀을 드려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귀족들이 세자 저하를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곧바로 한마디 한다.
― 국왕이 될 사람을 두려워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동감합니다. 위엄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의 위압감이라면 파이크 왕국의 국왕이 반드시 갖춰야 할 품격이겠죠. 하지만, 윗사람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은 그 아래에 있는 부하들을 둔하게 만듭니다.”
폭군과 패왕은 완전히 다른 단어다.
- 예를 들면? 어디 얼마나 구체적인 예시를 가져오나 한번 기대해보지.
예시라. 이런 건 어떨까.
“한 평민이 우연히 기사의 복식을 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평민은 기사의 복식을 잘 차려입은 다음 군부대에 도착해 세자 저하께서 직접 내리신 특별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말을 합니다.”
― 이봐, 그딴 말을 누가 믿어. 확인만 해봐도 알 수 있을 텐데.
“확인을 못 합니다. 군부대의 간부들은 세자 저하를 너무나도 두려워한 나머지, 혹시 물어봤다가 불호령을 당하지 않을까 싶어 침묵합니다. 왕도로 사람을 보내 신하들에게 정체불명의 기사가 한 말이 사실인지 물어보지만, 신하들도 세자 저하가 너무 무서워 차마 물어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세자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맞는 거겠지.’라는 말과 함께 돌려보냅니다.”
말을 마친 나는 세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세자로부터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수정구 너머는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다.
“뭐, 대충 이 정도 예시면 괜찮을 것 같아서 한번 말씀드려보았습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나치 독일에서 일어났었고, 이 실화를 바탕으로 더 캡틴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다. 그 콧수염 난 땅딸보 독재자를 독일 고위층들이 너무나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하들이 세자를 너무 심하게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세자 저하의 말씀처럼, 권위는 신뢰에서 옵니다. 하지만, 가끔은 용서에서 오기도 하는 법입니다.”
내 말에 세자가 하하, 하는 다소 마른 웃음소리를 흘린 다음 대답했다.
―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로군. 하지만, 나는 아직도 통행료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이득 때문에 자네가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단 말이야.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한 세자 저하를 위해 올린 조언이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사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때문에 이러한 제안을 했다 생각하신다면, 레드클리프 백작가를 용서해주시더라도 저는 그 가문에 통행세를 내겠습니다.”
다시 한번, 수정구 너머가 침묵한다.
― 그럼 그렇게 하지. 레드클리프 백작가는 몇 가지 지시를 이행한 후에 나의 관용을 내려 줄 것이다. 하지만, 자네는 이를 통해 레드클리프 가문으로부터 통행세를 면제받을 생각은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이걸로 대화는 끝났다. 뭐,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통행세를 지불할 여력은 있고, 지불한다고 해도 양 영지를 오가는 물자 교류는 얼마든지 이득이 될 수 있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대신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던 세자가 앉아있는 대신 중 두 명을 한 번씩 바라봤다.
“재무대신과 외교대신.”
“네, 세자 저하.”
세자는 잠깐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테네스 공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물건들에 대한 관세를 다소 조정하고 싶은데. 친서를 써줄 테니, 테네스 공국에 이를 전달하도록.”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재무대신이었다.
“관세의 조정이라 하심은…….”
“캣아이스 항구, 쿨란트 항구에서 들여오는 테네스 공국의 상품들은 향후 3년 동안은 무관세, 이후에는 다섯 푼의 관세를 매길 생각이다.”
그 말에 재무대신과 외교대신의 눈이 커졌다. 두 항구는 모두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자리 잡은 항구다. 쿠르스트 산맥의 바다는 겨울이 되면 대부분 얼어붙지만, 캣아이스 항구는 배가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얇은 살얼음 정도만 얼고, 쿨란트 항구는 그 일대의 유일한 부동항이다.
그리고, 마틴 레드우드의 영지에 포함되어 있다
세자가 다시 한번 마틴 레드우드에게 특혜를 주려고 한다. 지금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별로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