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당연히, 이런 안건에 대해서는 자리하고 있는 재무대신이 총대를 둘러매고 세자를 말려야 했다. 재무대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자 저하.”
“뭔가 할 말이라도?”
재무대신이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대답했다.
“단순히 관세를 낮추는 것이라면 몰라도, 쿠르스트 산맥에 자리 잡은 두 항구에만 특혜를 주는 것은…….”
세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두 항구를 통해 수입되는 테네스 공국의 수입품은 다른 항구들에 비해 굉장히 적은 편이더군. 물자를 수입할 수 있는 항구가 다변화되는 것은 국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또한 관세를 낮춤으로 인해 기존에 잘 수입되지 않던 품목들이 새로 해당 지역에 유통된다면 관세를 통해 얻는 수익보다 면제를 통해 얻는 수익이 더 클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자를 설득하기 위해 재무대신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지만, 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또한, 파이크 왕국의 유이한 부동항이라고 할 수 있는 캣아이스 항구와 쿨란트 항구는 그 군사전략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항구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다수의 함선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야.”
그도 그럴 것이, 쿠르스트 산맥에는 이전까지 하이랜더들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그 가치가 중요한 부동항이라고 해도 인근에 그런 무시무시한 것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이상, 안정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들에게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자리 잡은 두 항구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쿠르스트 산맥에 머무르는 하이랜더들은 더 이상 위협이라 볼 수 없다.
“관세를 낮춤으로 인해 항구로 찾아오는 상선이 많아지면 빠른 속도로 항구의 규모가 커질 테고, 유사시에 다수의 함선을 정박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겠지.”
말을 마친 세자는 손깍지를 낀 채 재무대신을 바라봤다.
“여기까지가 두 부동항으로 들어오는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완화했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점이다만. 재무대신은 두 부동항의 관세를 조정했을 때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꼭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 내가 왕국을 위해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거기까지 세자의 말이 이어지자, 재무대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두 개의 부동항으로 수입되는 테네스 공국의 수입품은 그 양이 굉장히 적다. 그 말인즉슨, 관세를 낮췄을 때 국고에 가해지는 피해가 적다는 뜻이다. 게다가, 파이크 왕국 북쪽의 유이한 부동항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전략적 가치까지 튀어나왔다.
“세자 저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은 것 같습니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결국, 재무대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좋아, 라는 말을 하고 외무대신을 바라봤다.
“친서를 써줄 터이니, 그대는 공식절차를 밟아 내 의사를 테네스 공국에 전달하도록 하라. 또한, 조속한 대답을 기다린다는 말도 잊지 않도록.”
안 그래도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단 두 개뿐이라고 하지만 3년의 관세 면제, 이후에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낮은 관세를 유지해주겠다고 한다면 관자놀이에 창이라도 박히지 않고서야 테네스 공국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이건 외무대신이 따로 대본 같은 걸 준비하지 않아도 테네스 공국에서 먼저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바로 내민 서류 위에 서명할 것 같은 제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자가 마틴 레드우드의 영지 항구에 지시한 조치가 나라의 재산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그를 지원해주는 행위냐? 라고 하면 또 그것도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자리에 앉아있는 신하들 중 상당수가 이 사안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또 그러기에는 명분이 없다.
결국, 대신들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세자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세자는 속으로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관세를 면제해주면서 두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테네스 공국의 수입품들이 쿠르스트 산맥의 항구로 밀려 들어온다면 자연스럽게 마틴 레드우드가 벌어들이게 되는 이득은 레드우드 영지와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를 오가면서 다른 영주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통행세를 상회하고도 남을 것이다.
세자가 마틴 레드우드를 시험한 건 맞다. 애초에, 신뢰는 의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의심 없는 신뢰는 맹신일 뿐이다. 이따금 만들어지는 의심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야지만 신뢰는 지속될 수 있는 법이다. 세자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편지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어젯밤, 마틴 레드우드가 론 레드클리프에게 전한 편지의 사본이다. 첩보국에 지시를 내려 확보할 수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레드클리프 가문을 용서해 주실 겁니다. 제가 제안을 드려보니, 이미 세자 저하께서는 레드클리프 가문을 용서해 줄 마음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제가 실제로 한 일이 거의 없게 되었군요. 그러니 레드클리프 가문이 저에게 제공해주기로 했던 조건은 지키지 않으셔도 됩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런 내용이 담겨 있는 짤막한 편지였다. 편지를 확인한 세자는 다시 주머니에 편지를 집어넣었다.
“확실히, 그런 의미에서 마틴은 정답을 찾았지.”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세자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자는 마틴 레드우드를 의심했다. 그리고, 마틴 레드우드는 세자의 의심을 빠르게 불식시킨 대가로 더 큰 신뢰를 얻게 되었다. 세자의 의심을 다시 한번 신뢰로 변하게 만들며, 통행세는 따위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큰 이득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게 정말로 마틴이 세자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틴 레드우드는 머리가 잘 돌아가니, 어쩌면 이렇게 될 것을 추측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딱히 상관없다. 마틴 레드우드가 그 정도로 머리가 좋다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 * *
나는 다소 흥분한 채 보고하는 클로에를 바라보고 있었다.
“쿠르스트 산맥에 자리 잡은 두 개의 부동항은 3년간 관세가 면제되고, 이후 다섯 푼의 관세를 매길 예정이라고.”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그런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거참, 딱히 바라고 한 일은 아닌데.”
세자는 내가 이 세상의 이성계가 되려 하지는 않을까. 그걸 걱정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야망 같은 건 없다. 이전부터 쭉, 나는 사건에 휩쓸린 거지 스스로 무슨 사건을 일으킨 적이 없다.
내가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수비대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국경수비대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올리비에를 찾아다닌 게 아니라 올리비에가 나에게 찾아왔다. 내가 헤로스를 불러낸 게 아니고, 헤로스가 나를 찾아왔다.
그냥, 그렇게 쭉 이어지던 삶이다. 근본적으로, 내 아버지 레온 레드우드가 나를 쿠르스트 국경수비대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나는 별다른 불만 없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걸 다행이라 여기며 편안히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망할 놈의 입버릇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테네스 공국의 상인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좋아하겠군.”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런 소식은 역시 전해줘야 할 만한 사람이 있지.
“테네스 공국의 엔리코에게 수정구로 이 소식을 전할 거야. 수정구를 준비해줘. 그 친구라면 이 즐거운 소식을 선점할 자격이 있지.”
지금도 쿠르스트 산맥의 지질검사와 측량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상인에게 있어 정보의 선점은 천금 이상의 가치가 있을 때도 있다.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엔리코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 마틴 레드우드 님?
“엔리코. 잘 지내는 모양이군.”
수정구 너머에서 다소 놀란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 소식은 들었습니다. 파이크 왕국에 자리 잡은 교단이 마틴 레드우드님이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공개 취조에서 거짓으로 밝혀졌다죠. 이후에 파이크 왕국에 가해지고 있는 조치도 빼놓지 않고 파악 중입니다.
“교단의 교회들 중에서도 테네스 공국과 거래하는 자들이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겠군그래.”
내 말에 엔리코가 하하하, 하고 웃었다.
― 뭐어,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향유나 향초…… 제기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수출량이 팍 감소할 거라고 예상 중입니다. 어쩌겠습니까. 불어오는 바람이 변하면, 상인은 거기에 맞춰 변해야 하는 법이지요. 아 참, 쿠르스트 산맥의 지질조사와 측량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이랜더들이 머무르고 있는 땅을 제외하면, 조만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생했겠네. 엔리코의 대답을 듣고 있던 나는 다소 뜬금포일 수도 있지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파이크 왕국은 향후 3년간 캣아이스 항구와 쿨란트 항구로 들어오는 테네스 공국의 물건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할 예정이야. 무관세 기간이 끝나고 나면 이후에는 다섯 푼이라는 낮은 관세를 부여할 예정이라고 하더군.”
― 그게…….
수정구 너머가 그 한마디를 길게 끌기 시작한다.
― 확실한 겁니까? 단순한 소문 같은 거면 저도 곤란합니다.
“금일 오전 회의에서 세자 저하께서 직접 천명하신 일이다.”
내 말에 엔리코가 으어어어, 하는 소리를 냈다.
― 지금 이 사실을 아는 테네스 공국의 상인이 또 있을까요?
“파이크 왕국의 대신들과 친분이 있는 상인이라면 아마 지금 즈음 소식을 전달받고 있을걸.”
― 서둘러야겠군요. 이런 소식을 전해주시다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하루 종일도 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만…… 이런 건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는 법이라서, 괜찮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수정구의 연락을 끊었다. 내가 전해줘야 할 정보는 전해주었다. 이제 그걸로 뭘 하느냐는 저 친구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이제 좀 쉴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팍 하고 열렸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 노크 정도는 하시는 게 어떨까.”
열린 문 너머에서 서 있는 건 그동안 쿠르스트 산맥에 머무르고 있던 엘렌이었다.
“예의는 무슨. 댁도 왕도에 도착하고 나서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없었잖아? 피차 무례한 사람끼리 갑자기 지금 와서 예의라는 단어를 꺼내 들지 말자고.”
엘렌은 간단한 대꾸를 돌려주고 나서 근처에 의자를 하나 끌고 와 클로에가 앉아있는 침대 옆에 앉았다.
“다친 다리 한번 보여줘.”
클로에는 그 말에 순순히 다리를 보여주었다. 감겨 있는 붕대는 엘렌이 손을 슥 움직이자 저절로 풀렸다. 화상을 입었던 클로에의 다리에는 검붉은 흉터가 한가득이다.
“회복은 잘 진행되고 있네. 이제 목발은 필요 없겠어.”
“그래도 될까요?”
클로에의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는데 너무 오래 의존하면 다리 근육이 약해져. 지금부터는 목발에 의존하지 말고 조심해서 움직여. 덤으로 재활운동도 병행하고. 재활운동 관련 분야는 나 같은 마법사보다 의사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왕궁에도 의사는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
말을 마친 엘렌은 클로에가 사용하고 있던 연고를 살펴본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이 약도 이젠 더 쓸 필요 없겠네. 다리의 흉터는 안타깝긴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괜찮아요.”
클로에의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른 약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환약이었고, 다른 하나는 약병에 담긴 연한 황색의 액체였다.
“약은 아침 먹기 전에 한 알, 황색의 액체는 하루에 세 번 환부에 바르도록 해. 바른 약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고.”
“성분이 뭔데?’
내 질문에 엘렌이 대답했다.
“별거 없어. 마법 처리를 한 알코올이야.”
“화상에 알콜 소독은 별로 좋지 않은 걸로 아는데.”
내 말에 엘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래, 그냥 알콜이라면 그렇겠지. 마법 처리를 했다고 했잖아.”
그럼 뭔가 다른 효능이 생기는 건가. 뭐, 어차피 엘렌이 클로에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들 리는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