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어쨌든, 중요한 건 클로에가 드디어 목발 없이 걸을 수 있다는 소식이다. 안 그래도 요즘 좀이 쑤시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곤 했는데 다행이군. 클로에의 상처를 다 확인한 엘렌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고생 많았겠네.”
“딱히 그렇지는 않았어.”
내 말에 엘렌이 오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슥 훑어본다.
“그래, 교단에서 구금해 간 것 치고는 아주 얼굴이 반질거려서 그럴 것 같더라니.”
말을 마친 엘렌은 후우, 하는 소리를 내고 자기가 챙겨왔던 것들을 내 앞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이게 다 뭐야.”
“국경수비대 전역 예정자 관련 문서. 지금 국경수비대는 부대 이전 수순을 밟고 있는 중이거든. 아마, 대부분의 병사들은 쿠르스트 산맥에서의 임무 수행 대신 다른 국경 지역으로 배속되겠지. 하지만, 네가 약속했던 게 있잖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함께 쿠르스트 산맥에서 베로나 제국을 막는 데 성공한 병사들에게는 전역을 약속했었다. 당연히, 그들은 다른 국경수비대 병력과 함께 부대 이전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이전 제7수색대장이라.”
그럼 도리안도 전역한 건가. 하긴, 뭐 딱히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었으니까.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쿠르스트 산맥에서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 도리안 대장은 전역이 예정된 병사들 중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국경수비대 병사들과 함께 쿠르스트 산맥 영지의 사병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야.”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7수색대 병력은 전원 영지의 병력으로 남겠다고 한 상황이고, 거기에 더해 전역이 예정되어 있던 병력 중 약 30% 정도가 사병으로 남을 예정인 모양이다.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지.”
어쨌든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왕국군 소속이다. 쿠르스트 산맥이 내 영지가 된 이상, 당연히 거기에 주둔하고 있던 왕국군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면 당장 영지를 지킬 사병부터 모집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도리안 덕분에 그 절차가 훨씬 간략해질 예정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살피던 클로에가 나와 엘렌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요.”
“부족하다니, 이 정도면 영지를 수비하는 병력으로서는 꽤나 적절한 것 같은데. 이 이상을 보유하려고 들면 분명히 다른 귀족들이 불만을 품을 거야. 게다가, 그렇게 많은 병력을 보유한 저의를 세자 저하께서 의심하실 수도 있고.”
엘렌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쿠르스트 산맥의 영지는 변경백령이 될 거예요.”
클로에의 대답을 들은 엘렌이 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멍하니 나와 클로에의 표정을 살핀다.
“변경백령이라니. 그럼 마틴이 변경백이 된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쿠르스트 산맥의 변경백과 레드우드 백작을 겸하는 형식이 되겠지.”
내 말에 엘렌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맙소사. 그게 사실이라면 귀족 중에서는 마틴이 먼저 인사해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게 될 텐데.”
엘렌의 평가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이가 있는데 어지간하면 인사 정도는 내가 먼저 해야지.”
인사한다고 목에 칼이 박히는 것도 아닌데.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이 입술로 부르르릅, 하는 소리를 낸 다음 고개를 휘휘 저었다.
“클로에의 의견이 맞아. 저 병력으로는 한참 부족하겠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잖아.”
쿠르스트 산맥을 지키던 수색대의 실력은 나도 경험해봐서 알고 있다. 몇 년을 쿠르스트 산맥의 추위와 싸우며 산을 타던 그들이라면, 내 영지가 제2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단이야 뭐.”
엘렌은 그렇게 말하고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히죽 웃는다.
“그 유명하신 마틴 레드우드가 창설하는 변경백령의 기사단이라고 한다면야 실력 있는 검사들이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올 테니 큰 문제가 없겠지.”
“그렇겠지.”
내 말에 엘렌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마법사는?”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엘렌을 바라봤다. 확실히, 이 세상의 전쟁은 기사와 병사만으로는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마법사가 필요하다.
엘렌은 즉시 주변을 살피더니 종이와 잉크, 그리고 깃펜을 챙겨 와서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건 갑자기 뭐야.”
내 말에 엘렌이 잉크 뚜껑을 열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협상이지.”
엘렌은 깃펜에 잉크를 묻혀 빠른 속도로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간 다음 나에게 내밀었다.
“연구실과 연구 비용, 숙소와 연봉이라.”
나는 그 내용을 슥 훑어본 다음 다시 엘렌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여태 동안 함께 한 정이 있어서 왕도 보다는 저렴한 가격으로 해줬는데.”
하하, 고맙기도 하지. 아무리 내가 날고 기어도 파이크 왕국의 왕이 아닌데 어떻게 국가의 지원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엘렌을 영입할 수 있을까. 비용을 살펴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말을 마친 나는 서명을 하기 전에 엘렌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마법사들에게는 이 내용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둬.”
쿠르스트 변경백령에 필요한 마법사의 숫자가 제법 될 텐데, 그들에게 전부 엘렌과 같은 대우를 약속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돈이 그대로 마법사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니까. 내 말에 엘렌이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어.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나저나, 교단의 재산 몰수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엘렌의 질문에 클로에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거의 다 진행되어가는 단계에요. 이제 남은 건 바레스 교단과 일리온 교단의 교주를 구속하는 것 정도만 남아있는데…….”
그건 단순한 시간문제다. 하운 교단의 교주가 구속된 이상, 남은 두 교단도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클로에의 대답을 들은 엘렌이 후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거네. 변경백으로 봉해지는 건 아마 교단의 정리가 다 끝나고 난 다음이겠지.”
“그래야지.”
안 그래도 지금도 귀족들이 내 얼굴 좀 한번 보고 싶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다. 여기에 변경백이라는 조건까지 더해지면 이젠 세자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는 귀족들까지 달려들 거다. 차라리 이 시점에서…….
“조금 더 가속도를 붙여 보는 건 어떨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 몇 장을 가져왔다. 깃펜을 잉크에 적신 다음, 곧바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보내는 건가요?”
“바레스 교단의 교황과 일리온 교단의 교황.”
내 말에 옆에서 엘렌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네.”
“엄청날 거 뭐 있어.”
어차피 다 밥 먹고 똥 싸다가 늙어 죽는 처지에, 이 친구들이 나를 해할 방법도 없다. 물론 두 교단의 신도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내 몸에 불을 붙이고 싶어 안달 내겠지.
편지의 내용은 대단할 거 없었지만, 교황에게 보내기 위한 적절한 격식을 차리는 문장을 만드는 게 어려웠다. 예를 들어…….
[신도들로부터 사랑받는 바레스 교단의 교황 성하께 무궁한 영광과 축복이 함께하기를 늘 기도하는 마틴 레드우드가 감히 이렇게 편지를 올립니다.]
이건 쉽게 말해 ‘안녕?’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여기에서 더 격식을 차리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문장을 더 길게 늘어놓을 수 있지만, 솔직히 내가 이 교황이라는 친구에게 그렇게까지 치켜세워 줘야 할 정도로 지위가 낮은 건 아니니까. 나도 이 왕국에서만큼은 교황 수준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최근 파이크 왕국에서 사소한 오해가 들불처럼 번져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불러왔음을 교황 성하께서 모르고 계시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물을 굽어살피고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는 바레스 님의 말씀을 받드는 파이크 왕국의 교단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 슬픔과 걱정으로 밤잠조차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바레스 교단의 사제님들은 믿음 깊은 신도들에게는 따스한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풀고 정의롭지 못한 자, 그 속에 품은 뜻이 맑지 못해 타인을 음해하려는 자에게는 엄정하고 정의로운 신벌을 대행해 왔음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러한 슬픔과 걱정에서 비롯된 시름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건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지는 않지?’라는 의미다.
[그런 점을 미루어 보면, 교황 성하의 성스러운 지시를 받아 임명된 파이크 왕국의 대주교가 저지른 일은 비록 사소한 오해로 시작되었으나 그 끝은 굉장히 불미스러운 결과를 불러왔고, 마땅히 이에 응당한 처우가 파이크 왕국 바레스 교단 대주교의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파이크 왕국의 많은 신도들이 지금도 당시 대주교의 행위를 기억하며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추후 더 악화되어, 사람이 저지른 일로 인해 정명한 바레스 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내가 써 내려가는 편지를 보고 있던 클로에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와, 이런 식으로 써 내려가니까 오히려 바레스 교단의 교황을 약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 사람이 뭐 어쩌겠어. 정중하게 써 내려간 글인데 답장으로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같은 편지를 돌려주지는 못할 거 아냐.”
내 말을 듣고 있던 엘렌이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그 점이 더 약오르는 거지.”
아무리 봐도 사람 놀리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현재 파이크 왕국에서는 ‘파이크 왕국 영토 내 교단 활동에 대한 포괄적이고 주체적인 협력 지향을 위한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동행 기반 마련에 관한 협정’, 소위 ‘네 인장 협정’을 이행 중에 있습니다. 각 대주교는 각자가 담당한 지역 안에서는 자유롭게 왕국과의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맺어진 해당 협정은 분명한 구속력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해당 협정의 이행을 위해 마련된 임시 기관인 특별집행부에서는 해당 협정에 따라 현재 교단의 대주교를 구속하고 국왕 폐하의 어명에 따라 새로운 대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해당 협정의 이행을 위해 협조해주심과 동시에, 새로운 대주교 임명에 관해 참고 가능한 조언을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그럴 여유가 없으시다면 저희 또한 정해진 절차에 따라 현 대주교를 구속하고 새로운 대주교를 임명할 예정입니다. 이에 관련해 조언해 주실 말씀이 있다면, 파이크 왕국의 국왕 폐하께서는 항상 귀를 열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사 당부드립니다. 이상, 말을 줄이겠습니다. 파이크 왕국의 특별집행부 지휘관 마틴 레드우드 올림.]
나는 거기까지 문장을 써 내려간 다음에 잉크 뚜껑을 닫고, 깃펜을 내려놓았다. 내용을 한 번 훑어본 나는 봉투에 편지를 넣고 촛농으로 밀봉한 다음 문을 향해 말했다.
“밖에 누구 있는가?”
“네, 마틴 레드우드 님. 뭔가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내 말에 곧바로 문밖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곧장 대답한 사람을 안으로 들이고, 편지봉투를 건네주었다.
“바로 세자 저하께 전달해드리도록 해라.”
편지를 받아든 사람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이제 저 내용을 세자가 확인하고 통과시키면, 저 편지는 그대로 바레스 교단과 일리온 교단의 교황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론을 내려야겠지.
지금의 대주교를 구속하는 대신 세자로 하여금 두 교황의 조언을 받아들여 새로운 대주교를 임명하게 만드느냐, 아니면 저대로 똥고집을 피우다가 정말로 파이크 왕국 내의 새로운 대주교 임명에 전혀 손도 쓰지 못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