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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70화 (270/275)

270화

내가 세자에게 전달한 편지는 무사히 검토를 통과하고, 바레스 교단과 일리온 교단의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파이크 왕국은 원하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세자와 함께 앉아서 각 교단의 교황들이 보낸 편지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바로 구속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히죽 웃으며 편지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뭐,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긴 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하나지.”

지금의 대주교들은 구속해도 좋다. 또한, 그 대주교들이 세자와 맺은 네 인장 협정이 유효하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 교단의 대주교를 뽑는데 진짜 우리 말은 개똥으로 듣고 니들 뽑고 싶은 녀석으로 뽑지는 말아주라.

뭐, 대충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 편지였다. 물론 진짜로 편지에 저렇게 쓰여 있는 건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보냈던 편지처럼, 상당히 고상한 언어로 길게 풀어쓴 내용을 정리하자면 저런 뜻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편지의 확인을 끝낸 나는 세자를 응시했다.

“이제 가서 싹 잡아들이면 되는 겁니까?”

“그래야지, 지들 윗선에서 잡아들여도 별말 않겠다는 확답을 줬는데 그대로 둘 이유가 어디 있나?”

말을 마친 세자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옆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들을 노려봤다.

“각 교단에 배정할 예산안입니까?”

내 말에 세자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재무대신을 통해 의견을 수렴 중인데 저걸 다 검토하고 나면 5년은 늙은 기분이 들 거야. 거기에 더해, 특별집행부에서 귀족들을 조사하면서 확보한 자료도 살펴보고 분류하느라 아주 죽을 맛이지.”

“그거참, 가슴이 아픕니다. 세자 저하, 힘내시기 바랍니다. 극복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방이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딱히 해줄 말도 없고 별로 관심도 없을 때 주로 그런 이야기를 하던데.”

뭐, 사실 내가 저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내 집에 난 불이 아닌데 내가 뭐하러 신경 쓰겠어. 그냥 뭐, 어머나 세상에 이제 저 집에 살던 사람들은 큰일 났겠네. 같은 생각이나 하며 가던 길 마저 가서 편의점에 컵라면이나 한 사발 먹고 자기 일하러 가는 거지.

“아, 돌아가기 전에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무슨 부탁인지 한번 들어보지. 또 자네 소유의 영지에 혜택을 달라는 소리를 하면 입에 깔때기를 박고 바닷물을 한 통 들이부을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있지, 이 이상 뭘 더 해달라고 하겠어. 내가 세자를 통해 받게 된 보상은 이미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례 건입니다. 특별집행부로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나면, 결혼할 예정입니다.”

“…….”

세자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왜 반응이 그러냐. 원래 주례라는 게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잘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거잖아.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잘 나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자잖아.

“주례라니. 그럼 결혼을 말하는 건가?”

거기까지 말한 세자가 이내 어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바라봤다.

“클로에 로니세라 경?”

나는 그 말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세자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참, 내가 생각하고 있던 부탁과는 전혀 다른 부탁을 해버리는군.”

“많이 난감하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으시다면 꼭 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망할 자식. 안 그래도 일이 쌓여있는데 거기에 더해 주례사까지 준비하라니. 아주 없는 일까지 만드는구나.”

“죄송합니다.”

내 말에 세자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한다면 몰라도, 한다면 당연히 내가 해줘야지. 오히려 초대장이나 하나 덜렁 보내놓고 올 거면 오고 말 거면 말아. 같은 식의 태도였으면 결혼식장에 불을 질렀을 거야.”

말 한 번 격하게 하시네. 일단, 이건 승낙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지.

“뭐, 예물이나 식을 올리는데 필요한 비용은 충분하고?”

나는 세자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제가 괜히 세자 저하께 허락받고 뇌물을 좀 챙긴 게 아닙니다.”

영지 창고에 있는 물자는 결혼식에 꺼내 쓰기 곤란하다. 물론, 영주가 자기 결혼식하는 데 영지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쓰는 걸로 뭐라 그러는 영지민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돈으로 이런 큰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정말 사용해야 하는 곳에 쓸 돈이 없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까.

“별로 돈 욕심이 없어 보였는데 왜 갑자기 물욕이 동하나 싶었더니만.”

“기왕에 할 거면 크게 벌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게다가, 세자 저하께 주례를 부탁드렸는데 천막에 물 한 잔 떠놓고 결혼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물론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라지만 주례자 체면도 있는 법이니까. 어디 보자, 잠깐만 있어 보도록.”

세자는 무슨 고민을 잠깐 하나 싶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탁 튕기며 말했다.

“연달아 왕도 안에서 큰 행사를 치르는 것은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어. 자네의 작위 책봉도 결혼식과 함께 진행하도록 하지.”

말을 마친 세자가 손깍지를 끼며 나를 바라봤다.

“두 개의 행사를 함께 진행한다면 국고에서도 해당 행사에 예산을 할당할 수 있어. 명분이 서거든.”

작위 책봉, 그것도 변경백과 백작을 겸하는 책봉이라면 당연히 국가의 큰 행사가 된다. 당연히, 거기에 국고의 예산이 사용될 것이다. 즉, 내 결혼식과 작위 책봉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명목으로 국고에서 내 주머니 사정을 신경 써줄 수 있다는 거다.

“어느 정도나 감당해 주실 수 있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잠깐 자기 이마를 쓰다듬나 싶더니 이내 대답을 돌려주었다.

“사 할 정도. 책봉식에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을 같이 준비해야 하니 그 정도를 지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실상 지원해 주는 부문은 두 행사의 교집합 정도가 될 거야.”

그것만 해도 나쁜 제안이 아니다. 나로서는 지갑 사정이 여유로워질 테니 반대할 이유가 없고, 나라 입장에서는 어차피 해야 할 책봉식에 필요한 비용을 내가 어느 정도 떠안는 그림이 되니까 나쁠 게 없고. 서로가 웃으며 악수할 수 있는 건전한 윈윈 관계다.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좋아. 라고 대답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관련 준비를 해야겠지. 자네도 대주교를 구속하는 동시에 레드우드 영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게.”

레드우드 영지에 필요한 조치가 뭔지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어차피, 큰 준비라고 할 것도 없다. 쿠르스트 산맥 국경수비대에 끌려가기 전까지는 내 아버지의 지위는 나로서는 넘볼 엄두도 나지 않는 높은 곳에 있었지만, 지금 이 시점에는 검지랑 엄지로 슥 집어 입 안에 홀랑 털어 넣으면 되는 수준이다.

물론, 레드우드 영지에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던 가신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특별집행부의 이름 아래에 필요한 조사를 행한다는 명목하에 모두 구금 후 심문받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리를 찾아낸 녀석들은 그대로 가신의 지위를 박탈해버린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충성스러운 가신들을 잃고 교단과의 접점이 들킨 레드우드 가문은 일시적으로 쇠락하겠지.

내 아버지가 기겁하며 가문을 망칠 생각이냐고 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뭐, 결국 레드우드 가문은 다시 부흥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레드우드라는 성을 쓰는 사람이 내 아버지와 데이먼만 있는 건 아니니까.

“제 아버지와 데이먼 레드우드, 그리고 둘째 부인은 레드우드 영지 외곽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다만, 아직은 세 분이 머무를 적절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성에 구금하는 형식이 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세 명은 이미 내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저질렀어. 그에 대한 처벌은 가문의 일원인 자네에게 맡길 테니. 나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 가문의 일은 제 선에서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자가 가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사를 한 나는 왕궁을 나와 특별집행부의 건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되었나요?”

“현 시간부로 바레스 교단의 대주교와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를 즉각 구속할 거야. 교단의 사제와 사병들이 저항할 가능성도 있으니 철저히 준비해.”

말을 마친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클로에를 바라봤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니, 네가 바레스 대주교가 머무르는 곳으로 향해줘. 나는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머무는 곳으로 향할 테니.”

물론 교황의 명령이 있으니 별다른 저항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교황의 허락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고 우리가 대주교를 구속하려 든다는 건 교단에 속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려 들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여태 동안 조사한 사실이 맞다면, 하운 교단은 사병을 기르기보다는 정보수집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그렇기에 무력 충돌은 없었지만 다른 두 교단이 보유하고 있는 병력은 제법 그 규모가 있는 편이니까.

대주교가 구속된다는 것은 그 친구들에게 있어서는 이후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고, 생계가 끊기게 생긴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허리춤에 레이피어를 꽂아 넣었다.

“문제없어요. 그럼, 일 처리가 다 끝나고 나서 다시 뵙죠.”

나와 클로에는 갈라져서 각자가 향하기로 한 장소로 특별집행부의 사람들과 함께 향했다.

“이야. 곱게 잡혀가지는 않겠다 뭐 그런 건가.”

어떻게 소식을 듣는 데 성공은 한 모양이다. 대주교가 머무르고 있는 장소에는 이미 교단의 사병들이 무장한 상태로 대기 중이었다. 지금은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도착해있던 치안대와 기사단의 병력들이 그들과 대치 중이다.

“마틴 레드우드 님.”

“그래, 바로 처리하기는 어렵겠지. 몇 명이나 모여있는 거지?”

미리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앞에 모여있는 병력의 숫자는 약 500명 정도라고 한다.

“그것참, 이 자식들은 어디 숨어있다가 지금에서야 나타난 거람.”

“모두 이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무장하지 않은 채 왕도를 통과한 다음 무장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 저 말이 마음에 걸린다. 모두 이 나라의 백성들이다.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 상황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 상황에서까지 우리가 악역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들과 우리가 대치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이 몰려있다. 기사단과 치안대의 병력이라면 당연히 교전 끝에 이들을 굴복시키고 대주교를 끌어내 구속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죽는 상황은 피할 수 없다. 피아를 막론하고, 무장한 병사들이 서로 싸우며 피를 흘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왕도 백성들의 불안은 나는 물론이고, 세자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 친구들의 귀여운 반항은 죽는 사람 없이 제압되어야 한다. 다행히, 치안대와 기사단도 오랜 시간 나름대로 쌓인 경험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여기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연습용 목검을 몇 자루 가져와 줬으면 하는데.”

내 말을 들은 기사단의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네? 하는 소리를 냈다.

“못 들어서 되물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곧바로 병사가 넵! 하고 대답한 다음 어디론가 달려갔다. 잠시 뒤, 그는 목검 몇 자루를 가슴에 안은 채 나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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