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71화 (271/275)

271화

나는 그 목검을 살펴본 다음 하나를 집어 들고 나머지를 바닥에 떨어뜨려 놓은 채 몸을 약간 풀었다.

“이렇게 보니, 또 쌈박질은 간만인 것 같군.”

어디 한번 해보자고. 내가 아무리 못해도 니들 정도는 안 죽이는 선에서 다 정리할 수 있으니까.

목검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병력들 앞으로 나온 나는 대주교가 머무르는 건물을 틀어막고 있는 녀석들을 슥 훑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경고다. 경고도 없이 달려들어 두들겨 패기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네 인장 협약에 포함된 합의를 이행하고 있다. 이는 일리온 교단의 교황께서도 묵인하고 넘어가기로 하신 일이다. 그대들은 교황의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막을 생각인 거냐.”

내 말에 일리온 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큰 방패와 검을 든 자가 외쳤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압박 속에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다! 당연히, 이는 무효다!”

“선동과 날조를 하고 싶으면 조금 더 성실한 태도와 적극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게 어때.”

최소한 내가 헤로스와 맺은 조약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쏟아 넣었던 노력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계약을 무시하는 행위가 얼마나 힘든 건데, 그걸 그냥 날강도처럼 후다닥 처리하려고 드네. 그렇게 날로 처먹으면 탈 나 이것아.

말을 마친 나는 교황이 보냈던 편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일리온 교단의 교황이 국왕 폐하께 직접 보낸 서신이다. 분명히 이 서신에는 일리온 교단의 현 대주교를 구금하고, 이후 새로운 대주교를 임명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너희들은 어명을 거스를 뿐 아니라, 일리온이 대리인이자, 가장 으뜸가는 축복을 받은 교황의 지시까지 어기는 것이다.”

말을 마친 나는 꺼내 들었던 서신을 다시 집어넣었다.

“구두 경고는 이걸로 마지막이다. 곱게 물러나 대주교로 하여금 작은 오해가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앞에 찾아온 대가를 치르도록 해라. 이 경고 후에도 물러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어명을 따르기 위해 그대들을 제압할 의무가 있다.”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듣고 물러날 녀석들이었다면 아예 여기에 진을 치고 버티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내 말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비켜줄 기색이 없어 보인다. 오백이라고 했나. 일리온 교단이 파이크 왕국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워 따로 마련했던 사병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대충 20% 정도의 병력들만 여기에 모여있는 거다. 아마, 우리 앞에 서 있는 이 녀석들은 다른 80%와는 달리 교단의 사병 역할을 그만두면 달리 할 일이 없는 녀석들이겠지.

죽을 각오를 하고 여기에 설 정도로 절박한 녀석들뿐이다. 더 이상의 설득은 안 통한다.

“커……헉…….”

진을 치고 서 있던 녀석들 중 한 녀석 앞에 내 분신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방패와 검을 빼앗고 머리통을 붙잡아 땅바닥에 처박았다.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녀석은 머리에 가해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바닥에 쓰러진 병사의 우그러진 투구를 보자, 나름대로 투지를 불태우던 녀석들의 몸이 위축되는 게 보인다.

“나는 경고했다. 이후 벌어질 사태는 너희들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걸로 꼭 밟아야 할 절차는 다 끝났다. 교황이 서신을 통해 이러한 조치를 허락했다는 것은 최소한 지금 이 근방에 모여서 긴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들었을 거다. 거기에 더해 투항까지 요구했다.

그럼 이제 두들겨 맞을 시간이다. 어디 한번 그 귀여운 쇳조각으로 열심히 반항해보시지. 얼마나 오래 저항할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이런 망할! 전원, 대형을 갖춰라! 여기에서 대주교님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달리 길이 없어! 애초에, 이미 이렇게 반항한 이상 우리는 역적이다! 죽을 각오라면 이미 했을 테니, 그 각오를 통해 이 난관을 극복하자!”

그 외침을 들은 녀석들이 방패를 치켜들고, 창으로 나를 겨눈 채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마틴 레드우드 님.”

“괜찮아. 뒤로 물러나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라.”

다가오는 병력들을 보고 곧바로 내 뒤에 있던 자들도 대응하려 들었지만, 나는 그들을 제지했다. 녀석들의 움직임은 나름대로 훈련을 받아서 그런지 규율이 있고, 움직임이 통일되어있다. 이들이 이렇게 달려드는 이유는 우선 대주교가 구속되고 나면 자신들도 해체 수순을 밟을 거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이들이 더 격렬하게 저항하는 이유는 어차피 여기까지 저항한 이상 이후 왕도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난 죄로 인해 자신들에게 다음이 없다는 사실까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 아깝긴 하단 말이지.”

이들은 종교에 몸을 담은 병사들이다. 당연히 사제들은 이들에게 교단의 규율 속에 생활할 것을 지시했을 거다. 생계 수단의 상실과 이미 던져버린 주사위라는 두 개의 절박함이 이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했지만, 이후 잘 구슬리는 데 성공하면 변경백령에 추가로 필요한 병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이들을 구슬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기에서 나 혼자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압한 다음, 내 사비를 털어 이들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게 첫걸음이다. 그러고 난 다음 이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생계 수단을 제공해주면 된다.

변경백령의 병사. 어차피 교단의 사병으로서 훈련받고 생활했던 자들이니, 변경백령의 병사로서 임무 수행도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할까.”

막 시작한 기업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일손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경력직들이 단체로 굴러들어올 수 있는 상황을 포기하면 그건 바람직한 사장의 모습이 아니잖아?

결론을 내린 나는 이후 상대하는 녀석들에게 가하는 손속에 조금 더 여유를 두기로 했다. 이건 사람을 아주 단단히 불구로 만들지만 죽이진 않는 배트맨식 불살이 아니라, 일시적인 기절이나 무력화 정도만 시키는 진짜 불살이다. 원래는 내가 직접 나설 필요 없이 분신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는데, 이 친구들의 몸 상태를 거기까지 배려하기 위해서는 결국 나도 같이 움직여야겠는데.

“으아아아!”

방패를 앞세워 달려든 녀석들이 나를 향해 창을 내지른다. 내질러진 창대를 발로 밟아 박살낸 나는 녀석이 들고 있는 방패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쩌정,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는 목검에 얻어맞은 부분이 움푹 들어가고, 녀석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해 뒤로 쭉 밀려난다. 방패를 발로 밟아 뒤로 넘어간 나는 다리를 걸어 녀석을 쓰러뜨리며 투구를 쓴 뒤통수를 땅에 박았다.

그 사이, 만들어 낸 분신이 한 녀석을 더 제압한다.

녀석들의 공세는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유효타를 넣고 있는 건 나뿐이다.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확인한 병사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일리온 님을 위하여! 대주교님을 위하여!”

모두가 주춤거리는 와중에 갑자기 그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며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드는 녀석들도 보인다. 나는 녀석의 검을 낚아채서 그대로 어깨에 박아넣고, 쭉 밀어 어깨에 박힌 칼을 바닥에 박아버렸다.

“으아아아아아!”

방금 전 내가 저지른 일을 보고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달려든다는 건 생계 수단의 상실로 인한 울며 겨자 먹기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광신도 같은 것들이다. 이런 친구들은 재활용해서 쿠르스트 산맥 영지의 병력으로 쓸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결국 나에게 다시 칼을 들이밀 녀석들이다.

“망할, 골 아파 죽겠네.”

소수의 광신도를 제외한 나머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서는 내 머리로 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창의력을 쥐어짜야 했다.

방패를 빼앗아 머리통을 내려치고, 밧줄로 양팔을 묶은 채 공중에 던져버린 다음 분신으로 지붕에 걸어버리고, 발로 배를 차서 건초가 쌓여있는 마차로 날려버리고…… 정말 별의별 짓거리를 다 했다.

모두가 무력화된 상황에서, 외롭게 방패와 검을 든 병사 하나가 몸을 움츠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다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서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어딜.”

녀석을 향해 달려든 나는 공포에 질려 어거지로 휘두른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쓰러진 녀석의 바로 옆 땅에 방패를 박아넣고, 힘을 팍 주자 끼기기기긱 하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휘어져 녀석의 몸을 덮어버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발악하던 녀석은 휘어진 방패가 방해되어 일어나는 걸 방해한다.

“아이고, 더워라.”

손부채질하며 나는 주변을 살폈다. 죽은 사람은 없고, 심하게 다친 사람도 없다. 나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며 뒤편에서 멍하니 내 싸움을 구경하던 아군을 향해 말했다.

“깨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포박해둬.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은 치료하고, 의사에게 비용은 내가 지불할 예정이야. 마지막으로…….”

나는 엄지로 건물을 가리켰다.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을 잊지는 말고. 고생해라.”

대주교는 이 자리에서 체포되어야 한다. 내 대답을 들은 병사가 그제서야 질문을 던진다.

“어디 가십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살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알겠습니다. 이 이후에는 저희가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추후 보고하겠습니다.”

“그래, 고생 좀 해라.”

말을 마친 나는 뒤편에 있는 아군 병력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 현장을 떠났다. 어차피 이 이후로 내가 해야 할 만한 일은 남아 있지 않다. 대주교가 머무르는 건물은 수상한 사람이 멋대로 난입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문 이외의 문은 물론이고, 창문까지 모두 판자로 막혀 있었으니까. 대주교가 여기 없다면 저 병사들이 보호하려고 기를 쓸 이유도 없었을 거다.

대주교는 저 건물 안에 있고, 체포되어 이송될 것이다.

그 이후 약 한 달 정도 더 업무 수행을 하고 나면 마침내 이 특별집행부라는 조직도 그 필요성을 잃게 되겠지. 해야 할 일이 전부 끝나는 거다.

“그러니 이제는 다음을 준비해야지.”

내가 준비해야 하는 다음이라고 해봤자…….

도착한 곳은 왕도의 번화가였다. 외곽에 자리를 잡은 이런저런 상점들과는 달리 이 번화가에서 파는 물건들은 모두 그 영업 대상이 돈과 권력이라는 분야에서 한 가락 하는 친구들이다. 장신구, 드레스, 마차, 고급 가구와 향수 같은 것들이 주요 판매품으로 유명하지.

“어서오…….”

근사해 보이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말쑥하게 차려입고 단안경을 쓴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를 바라본다.

“혹시.”

나는 그 말에 차분히 대답했다.

“반지를 보고 싶은데요.”

내가 누군지 대충 알고 있는 느낌이긴 하다. 애초에, 이런 종류의 가게는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장소고, 당연히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굳이 여기에서 아하하 제가 바로 그 유명하고 잘난 마틴 레드우드입니다 하하하 같은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이유는 없다.

나는 물건을 사러 왔고, 너는 파는 사람이다. 그러니 거기에만 집중하자. 반지를 보고 싶다는 말은 그런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 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곧바로 가게 주인도 잠깐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셨습니다. 아마 왕도에서 저희보다 더 좋은 품질의 물건을 다루는 가게는 없을 겁니다. 제 아버지 때부터 운영하던 가게입니다. 품질은 물론이고, 가공에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기대되네요. 혹시, 가게가 보유하고 있는 반지들을 먼저 볼 수 있을까요?”

노인이 물론입죠! 하는 소리와 함께 반지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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