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73화 (273/275)

273화

함께 했던 시간이 길지만 남자와 여자로서의 관계 진행도가 현저히 낮다는 점을 인정하고, 함께 했던 시간에 어울리는 수준의 관계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약 열흘이 지났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다분히 건조하고 계산적인 느낌이지만…… 그냥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외로운 사람들이 보면 속으로 쌍욕을 쏟아낼 것 같은 달달한 시간을 보낸 지 열흘이 지났다는 소리다.

“일어났으면 눈을 뜨는 게 어때.”

침대에 누워 내 가슴에 얼굴을 가져간 채 눈을 감고 있던 클로에가 내 말에 잠깐 움찔하더니 다소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아침이네요.”

알몸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씻은 다음 옷을 챙겨입었다. 특별집행부의 일은 슬슬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으니, 일찍 끝낼 수 있을 거다.

“일 끝나고, 반지 디자인을 확인해야 해.”

내 말에 클로에가 상의를 입으며 대답했다.

“어제 서신이 왔었죠. 가는 김에 결혼식에서 당신이 입을 정장이랑, 제 드레스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아 그리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뒤져 뭔가를 꺼내 들었다.

“레드클리프 가문에서 보내 준 거야.”

“연주회 입장권이네요.”

레드클리프 가문은 세자가 자비를 보여준 덕분에 구원받을 수 있었다. 내가 필요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론 레드클리프는 통행세의 면제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세자와 한 약속이 있는 나는 한사코 거절했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감사 인사와 함께 왕도에서 열리는 유명 연주회의 입장권을 선물해줬다.

“아무래도, 이제 이 왕국에서 우리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는 모양이에요.”

그래. 나와 클로에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파이크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 쫙 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를 가리켰다.

“내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매일 같이 저 침대를 정리해주고 있는데, 소문이 안 퍼지기는 힘들지.”

클로에가 침대를 한 번 보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좀 미안할 정도예요.”

그러게. 저 침대의 시트를 갈아치우고,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거참, 돌아다니는 사람들 보기 민망해지는데.

“그럼, 고생하자고.”

특별집행부 건물 앞에 도착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했다. 이미 교단의 재산은 대부분 몰수된 상황이라 새로 확보된 재산보다는 이미 확보한 교단의 재산을 왕도로 옮기는 데 집중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왕도로 도착한다면, 파이크 왕국 2년 치 예산은 확보될 것 같은데.”

처리해야 하는 일을 전부 끝내고 나니 오후가 되어 있었다. 서류를 정리하고, 오늘 도착하기로 예정된 수송 병력이 전부 도착한 것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십니까?”

“그래, 오늘 해야 할 일은 거의 다 정리된 것 같으니까. 특이사항이 생기면 바로 연락할 수 있도록.”

내가 나가는 기색을 보이자, 인근 테이블에서 서류를 살피던 클로에도 빠르게 일을 마치고 서류를 정리한다.

말을 마친 나는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섰다. 서늘해진 바람이 확 몸을 덮친다. 잠깐 기다리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건물 밖으로 나와 내 쪽으로 합류한다.

“반지 먼저 보러 갈까?”

“그편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엄밀히 따지면 클로에가 나보다 더 나이가 많다. 때문에 부부가 된다면 둘 다 말을 놓든지, 아니면 도리어 클로에가 나에게 말을 놓는 게 정상이지만…… 베갯머리에서 이야기해본 결과 클로에가 기겁을 하며 한사코 거부했기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여기, 미리 준비해 둔 디자인과 예상 가격대입니다.”

보석상에 도착한 나와 클로에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디자인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신 의견은 어때?”

내 말에 클로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가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마음에 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은데.”

다섯 개의 디자인 중 클로에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디자인이 뭔지 알고 있다. 아마, 가격 때문에 자신이 멋대로 정하기 부담되는 거겠지. 클로에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디자인은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이었다. 레드우드, 소위 세쿼이아라고 부르는 나무의 잎과 인동덩굴의 꽃을 백금 위에 조각한 디자인이었다.

“그래? 나는 이게 마음에 드니까, 이걸로 하자.”

클로에는 선택이 빠른 편이었고, 나도 마찬가지로 선택이 느린 편은 아니었다. 한 번 고른 다음 뒤돌아보는 습관 따위는 기르지 않은 우리는 반지 모양을 결정한 후 보석상을 나왔다.

“드레스가 걱정이네요.”

“나는 별로 걱정 없는데.”

어차피 클로에는 뭘 입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냥 하얀 식탁보를 몸에 둘러놓고 웨딩드레스라고 우겨도 믿어 줄 수 있을걸. 물론, 내 눈알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거겠지.

“이건 어때요?”

예쁘다. 근데 이건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나는 잠깐 드레스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예뻐, 하지만 더 어울리는 드레스가 있을 거야.”

그렇게 이어지는 시간. 클로에의 드레스를 고르는데 나는 약 2시간을 사용했고, 내가 입을 정장을 고르는데 클로에는 약 2시간 30분을 사용했다.

“지치네요. 거기에 배까지 고파요.”

마침내 내 옷을 고르는 데 성공한 클로에가 팔짱을 끼고 쓰러지듯이 내 쪽으로 기댄다.

“연주회 전에 간단하게 뭘 먹을 시간이 있을 것 같아.”

“그럼, 근처 노점에서 국수라도 한 그릇 할까요.”

말이 국수지, 달걀로 만든 까르보나라 비슷한 음식이다. 독보적으로 저렴하고 양이 많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몸은 좀 어때?”

내 말에 클로에가 식사를 하다가 픽 웃으며 대답한다.

“슬프게도, 아직 입덧은 없어요.”

얼씨구.

“그 말이 아니잖아. 다리 말하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면서 일부러 저러다니. 내 반응을 보고 클로에는 뭐가 재밌는지 잠깐 웃음을 흘리다가 대답했다.

“빠르게 나아지고 있어요. 재활을 위한 운동은 애저녁에 끝났고, 요즘에는 계속 이전 감각을 되찾기 위해 훈련 중이에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

포크로 국수를 말아 올리던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의 한계는 제가 알 수 있어요. 그 정도 실력과 경험은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걱정은 돈을 내고 할 필요가 없잖아.”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걱정하면 정작 걱정해야 하는 일을 놓치는 경우가 있어요.”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내가 그럴 인물로 보이는 모양이지? 참고로, 먹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연주회에 늦을걸.”

내 말에 클로에가 털어 넣듯이 그릇에 남은 면을 제거한 다음 노점상에 그릇을 돌려주었다.

“그럴 수야 없죠. 빨리 가요.”

연주회가 열리는 공연장에 도착한 우리는 자리를 안내받았다.

“어머, 사실상 밀실이나 다름없네요.”

소위 말하는 발코니석이었다. 약 3층 정도 높이에 발코니가 몇 개 만들어져 있는 데, 발코니에 위치한 좌석은 단 두 개뿐이라서 나와 클로에가 앉으면 완벽하게 프라이버시가 유지된다.

어차피 음악을 듣기 위한 목적이라면 사실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디라도 크게 상관없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여기에 연주회를 구경하러 온 건가, 아니면 지금 내 어깨에 기대있는 클로에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 건가?

당연히 후자겠지. 근래 클로에와 함께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는 옆에 앉아있던 클로에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연주회에 왔으면 음악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를 바라보던 클로에가 작은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나는 클로에의 손을 잡은 채 대답했다.

“어차피 당신도 안 듣고 있잖아.”

“그러게요.”

클로에가 내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한다. 괜히 내 검지를 자기 검지로 쓸어내려 보기도 하고, 손을 뒤집더니,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손금을 훑어내리기도 한다. 한참을 그렇게 내 손을 쓰다듬던 클로에가 입을 연다.

“사랑해요. 당신이랑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지금까지 함께했던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 할 시간은 더 행복하겠죠.”

“단언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내 말에 클로에가 웃으며 내 손등을 꼬집는다.

“당신만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뭐 받아먹기만 하나요.”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런 이야기를 작게 나누면서, 우리의 귓속으로 밀려 들어오던 연주회의 음악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한다. 연주가 끝난 게 아니라, 서로에게 집중하는 사이 완전히 우리의 귀가 연주되는 음악을 백색 소음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거다.

“부부싸움, 안 할 수는 없겠죠.”

“아마 하겠지.”

안 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일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많은 법이니까.

“혹시, 마음이 떠난다고 해도 너무 매몰차게 대하지는 마세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클로에의 말에 나는 정색을 한 채 대답했다.

“시간이 지나면 저도 늙을 거예요. 당신의 첩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줄을 설 테니…… 이미 늙어서 매력을 잃어버린 나 대신 다른 여자를 찾을지도 모르죠.”

클로에의 말에 나는 코웃음을 한 번 쳤다.

“그러지 않았으면 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건 충분히 알 수 있네.”

말을 마친 나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단순히 젊고 아름다워서 당신이 마음에 들었던 거라면, 쿠르스트 산맥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덤벼들었겠지. 네가 그걸 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잖아?”

“그건 그렇죠.”

클로에는 알버트에게 나를 유혹하라는 지시를 받았었다. 내가 단순히 클로에가 젊고 아름답다는 점에 끌렸다면,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거다.

나는 클로에의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고 말을 이었다.

“십 대에는 십 대라서 할 수 있는 사랑이 있고, 이십 대에는 이십 대라서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 아마, 잘은 모르지만 칠십 대와 팔십 대가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랑도 있겠지. 분명한 건,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거야.”

클로에가 잠깐 침묵한 채 나를 보다가 대답했다.

“그 뭐냐, 듣고 있으려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뭐야. 이런 분위기를 원했던 거 아니었어? 분위기에 맞게 말을 해도 그런 반응을 보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건 그렇지만, 너무 호응을 잘해줘도 문제네요. 이러니 매일 밤 그 난리가 나고, 아침이 되면 당신과 내가 내궁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거잖아요.”

미안하긴 하지만 뭐 달리 방법이 있나. 나도 그렇고 클로에도 그렇고 멈출 수가 없는데 어떡하겠어. 그 친구들이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어쨌든, 요점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는 거지.”

“그럴게요.”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와 클로에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다음 그들을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연주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받으며 인사를 한다. 뭐야, 설마 다 끝난 건가?

“그러니까…… 좋은 연주였죠?”

“그래. 듣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아.”

클로에가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 우리는 나쁜 인간들이에요. 저 사람들은 이 연주를 위해 몇 년을 노력했을 텐데 우리는 듣지도 않고 있었다니.”

“안 들은 게 아니라, 못 들은 거잖아. 이해해주지 않을까?”

안 들리는 걸 어쩌겠어. 그렇게, 우리는 근래 항상 그래왔듯이 남는 거라고는 서로 나누었던 대화뿐인 또 다른 경험을 남겨둔 채 연주회장을 나서야 했다. 장담하는데, 앞으로 함께 보내게 될 시간도 다 이런 식으로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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