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6. 화산.
6. 화산.
“이번에 보니 제법 일을 잘하더구나. 네게 일임해도 되겠어.”
데메트리우스의 말에 코락스는 활짝 만개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코락스의 태도에 데메트리우스는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해방노예도 행정관이 공식적으로 집행하고 승인하면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지만(그래도 공직출마는 불가, 자녀는 가능) 해방노예가 로마시민권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주로 자유민의 신분을 획득.)
라틴시민권이라도 얻으면 감지덕지한 상황인데 동맹시 전쟁이(라틴시민권을 부여받은 동맹국에도 로마시민권을 주고자 한 드루수스의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서 BC 91~88년에 일어난 전쟁. 로마공화정이 동맹시가 세운 신생국: 이탈리아 공화국에 승리. 이 전투의 공으로 술라가 집정관 당선) 발발하자 당시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시저의 백부)가 로마시민권을 동맹시에도 확대하는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키고 결국 로마는 완전한 반도 통일을 구축한다. 이때 데메트리우스도 어부지리로 로마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얻기 힘든 것을 얻었으니 그 가운데 막대한 재물이 소요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자유민이라 할지라도 20년 이상 군복무하거나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면 시민권을 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러 행정관들에게 막대한 뇌물과 규정된 금액을 바치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로마시민임을 나타내는 청동판을 얻을 수 있었으니 토가 캔디다를 입으려면 못 입을 것도 없었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면 여러 사람 곤란해지고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입지 않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노예생활을 할 때 지금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었던가? 코락스의 노예 신분을 떠올리니 자신의 행운이 다시금 부각되었다.
노예 시절, 곰치 연못이나 뱀장어 양식장에 던져진 노예의 모습이 스쳐갔다. 노예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주인의 악의서린 호기심과 쾌락을 위해서였다. 어린나이에도 저 꼴은 되지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했었다.
하지만 데메트리우스는 끔찍한 기억은 바로 지워냈다. 더 이상 자신은 노예가 아니고 그 주인처럼 손짓만 하면 던져버릴 수 있는 위세 있는 자였으니까.
게다가 자신은 승승장구하는 폼페이우스와 친분이 있는 로마인이다. 술라 펠릭스의 행운만큼은 아니어도 이만하면 만족할만한 출세가 아닌가? 따져보면 해방노예인 그가 막대한 재물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동맹시 전쟁 때문이었다.
푹신한 털가죽 위에 몸을 눕히고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상체를 일으키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코락스를 바라봤다.
“그 소년은 깨어났더냐?”
“제가 확인했을 때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좋아. 깨어났으면 이리로 데려와.”
*
서후는 살이 붙긴 했지만 제법 날렵한 몸매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바로 데메트리우스였다. 데메트리우스는 대뜸 서후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로마시민 루키우스 데메트리우스 세쿤두스라고 한다. 넌 누구냐?”
서후는 자신의 이름 태서후를 말하려고 하다가 드왈드가 오해한대로 테세우스라 밝히기로 했다. 먼 동방의 대한민국이란 곳에서 왔다고 한다면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거나 귀한 노예취급을 당할 것이 뻔하니 말이다. 로마에서는 영토밖의 외국인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았기에 그럴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한국이 다 뭔가? 기원전 80년대 경이라면 이때는 고구려도 건립되지 않았을 시점이다. 고구려족의 소국 정도가 활동하고 있을 시점이랄까? 중국에선 한나라가 자리하고 있는 시점이다.
“테세우스라고 합니다.”
“테세우스? 그리스인인가? 라틴어를 아는 걸 보니 교육을 제법 받은 모양이야.”
그 말에 서후는 불현듯 자신이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자심왕 리처드는 영국의 왕이었지만 이 시기의 왕족들이 그러하듯 프랑스어를 썼다. 이 프랑스어는 갈리아 지방의 속라틴어가 변형, 발전된 형태였기에 로마제국에 영향권에 있던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왕족으로 나고 자란 리처드였기에 당연히 라틴어에 대한 교육도 뒤따랐다. 데메트리우스가 사용하는 라틴어는 고대 라틴어라 조금 다르긴 했지만 말하고 듣는 것에 지장이 없는 건 바로 그런 경험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시 사용하던 영어는 앵글로 색슨족이 사용하던 고대 영어로 아이러니하게 영국의 왕이었던 리처드 1세도 영어를 사용할 줄 몰랐다. 현대의 영어는 영어와 불어가 혼합된 형태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 아니. 아니 이건 아니고 아무튼 그 해괴한 꿈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데메트리우스가 서후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왜 대답이 없지?”
“아. 예. 그렇습니다.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리스 어디? 아테네? 스파르타? 어디지?”
“그. 그게..”
서후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모르는 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가장 현명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테네건 스파르타건 간에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괜히 거짓을 말하면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그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인가?”
서후는 재빨리 대답했다. 앞날에 먹구름이 끼고 안끼고는 눈앞의 이 로마놈에게 달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은인께 제가 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흐음.”
턱을 매만지던 데메트리우스가 서후에게 말했다. 서후는 그 모습에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자네를 구하려고 고생을 많이 했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서후를 바다에서 구해온 건 그의 노예들이나 그에게 돈을 받는 자유민들이었을 것이다. 데메트리우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서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드왈드의 말이 옳았다. 데메트리우스는 목숨을 구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선의와 호의는 어차피 현대에도 없었다. 호의와 선의를 보이면 그만한 명예가 뒤따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런 것조차 뒤따르지 않는다면 선의와 호의를 보일 자가 뭐 얼마나 될까? 때문에 서후는 냉정한 표정으로 데메트리우스를 바라봤다.
“그건 저를 노예로 파시겠다는 뜻입니까?”
데메트리우스는 서후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때 옆에 자리하고 있던 남자가 그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그는 드왈드가 말한 점성가로 보였다.
“으음. 그렇다면야..”
점성가의 말을 들은 데메트리우스는 작게 중얼거린 다음 서후에게 말을 꺼냈다.
“그럴 수는 없지. 기억을 잃어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한다고는 하나 라틴시민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나중에 자네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제법 번거로운 일이 발생하겠지. 고작 몇 푼도 안 되는 데나리우스를 벌고자 그런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군.”
못해도 600데나리우스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는 그런 금액을 몇 푼 되지도 않는다고 일축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가늠할 수 있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말을 마친 데메트리우스가 눈짓 하자 코락스가 서후에게 다가와 그의 발에 찬 쇠고랑을 풀어줬다.
절그럭
서후는 그 광경에 다소 안도했지만 눈앞의 데메트리우스라는 로마인이 이렇게 간단하게 지나갈 인물 같지는 않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호의를 베풀 것이라면 애초에 발목에 쇠고랑을 채우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자네가 자유민이라 할지라도. 음. 그러니까 라틴시민권자나 혹 로마시민권자라 할지라도 한 가지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 있어. 내게 빚을 지고 있고 지금도 그 빚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발언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빚이라니.. 그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