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8. 화산.
8.
군인으로 보내기 어리다면 안보내면 될 것 아닌가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서후는 말을 아꼈다. 아닌 말로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집어서 바다로 던지라고 명한다면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서후의 일그러진 표정을 즐겁게 바라보던 데메트리우스가 손을 들며 말했다.
“세 번! 세 번만 나의 이름을 위해 검투사로 출전하면 자네는 내게 어떤 빚도 없는 걸세. 어떤가? 신들의 주시가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자네에게 재물도 줄 것이다. 이 일이 싫다면 기억을 어떻게든 되살려서 자네 가문과 내력을 내게 밝히면 될 일이네.”
데메트리우스는 이제 이 어린소년이 두려움에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자신의 신상을 밝힐 것이라 예상하고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즐거운 일이다. 높은 신분에 있던 자를 짓밟는 이 쾌감은 말이다. 그래서 권세 높은 왕들이 다른 왕들을 정복하는 정복전쟁을 펼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쾌감은 성관계 그 이상의 쾌락을 가져다줬다.
데메트리우스는 자신이 느끼게 될 즐거운 순간을 기대하며 서후를 유심히 바라봤다. 이 순간 역시 자신이 즐기는 순간이다.
서후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밝힐 가문과 내력이 있어야 밝힐 것 아닌가? 검투사로 출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막대한 금액을 자신에게 물릴 것이다. 그 돈을 갚을 길이 없는 서후로서는 결국 노예의 낙인이 찍힌 채 검투사로 출전하게 될 운명에 처할 것이다. 그때는 세 번이 아니라 노예신분을 벗을 때까지, 혹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상황파악을 한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후는 그럼에도 놀랄만치 담담한 자신의 모습에 생소함을 느꼈다. 하지만 금세 그 원인을 파악했다. 그건 바로 항우와 리처드의 거칠 것 없는 삶이 그의 기억 가운데 완전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육체가 비리비리하긴 하지만 양질의 식사와 더불어 적당한 훈련을 거친다면.. 세 번 정도 승리하는 건 일도 아니다.’
서후는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를 피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않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으신 분 같으신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자신의 반응과 전혀 다른 서후의 발언에 데메트리우스는 미간이 꿈틀거렸다. 소위 귀족이라고 으스대며 다니던 자들의 발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천한 것들과 귀족은 타고난 종자가 다르다고 했던가? 서후의 모습에 데메트리우스는 자신의 열등감이 크게 자극받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이 소년은 성인도 아니다. 많이 쳐줘야 열 살이나 먹었을까? 그런 소년에게 피 튀기는 전장에 서게 될 사실을 언급했는데 소년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데메트리우스는 옆에서 소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베루스를 바라봤다.
마르스와 헤르쿨레스가 주시하던 자라고 했던가? 과연 그래서 전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열등감은 저편으로 사라지고 눈앞의 소년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좋은관계를 맺어둬야 하는 것이 아닐까? 훗날 이 소년이 명성을 떨치고 높은 자리까지 오른다면 그날이 바로 자신이 죽는 날이 될 테니 말이다.
그때 점성가 베루스가 나지막이 데메트리우스에게 조언했다.
“한 사람이 전장에 가까이 감으로 한 사람이 전장과 멀어진다면 한 사람이 멀어지면 다른 한 사람은 전장과 가까워진다는 말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넵투누스에게 화를 입고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군신 마르스와 투신 헤르쿨레스의 주시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폭풍같은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녕 제피로스(Zephyrus)를 보내고 보레아스(Boreas)를 맞이하려 하십니까?”
둘 모두 바람의 신으로 제피로스는 부드럽고 순한 서풍을, 보레아스는 거칠고 난폭한 폭풍을 뜻했다. 바람의 신은 둘이 더 있는데 바람의 지배자, 아이올로스(Aeolos)와 따뜻하고 온화한 남풍, 노토스(Notos)가 있었다.
점성가의 말에 데메트리우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껏 자신의 삶은 노예로 태어난 것을 제외하곤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듯 순탄하게 풀렸다. 그런데 이 자를 멀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이 거친 폭풍처럼 변한다는 뜻이 아닌가?
게다가 말했듯이 자신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소년이 검투사로 출전한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도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거기서 파생되는 수익만 따져 봐도 꽤 짭짤할 것이 분명하다. 그걸 고작 소년의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저버린다고? 신들조차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라고 떠밀고 있지 않은가?
데메트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었나? 악의는 없네. 다만 감히 신들의 뜻에 거스를 수도 없고 신에게 맞서 싸울 필요도 느끼지 못하겠군.”
서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온갖 미신이 팽배하던 시대였다고 하더니..
‘신들? 정말 신발 같은 소리하네. 하아. 별 수 없군.’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서후의 모습에 데메트리우스는 다시 조금 불안해졌다. 하지만 기껏해야 소년 아닌가? 때문에 데메트리우스는 일부러 더 호탕하게 웃으며 서후에게 말했다.
“하하하. 좋아. 자세한 계약서는 폼페이에 도착해서 쓰도록 하고. 일단 이리로 오게. 요기라도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살찐 돼지를 잡아먹는다고 이 정도 호의를 보이는 건 뭐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발언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폼.. 뭐 폼페이? 그 화산폭발? 거기?’
*
폼페이(Pompeii)는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고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단 18시간만에 잿더미가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도시다.
그 여파로 무려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수많은 방이 있는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 극장, 상가, 당시의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 Baths, 기원전 5세기에 건축)도 화산재에 묻혔다.
베수비오 화산은 폼페이뿐만 아니라 헤르쿨레스가 세웠다는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역시 멸망시켰다. 폼페이는 화산재와 바위에, 헤르클라네움은 화쇄암과 흙속으로 사라졌다. 이곳 헤르쿨라네움 역시 유명한 휴양지였다.
지금은 기원전 80년대이니 화산폭발시기와 대략 160년이라는 긴 세월이 남아있었지만 서후는 폼페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길함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알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속주 카르타고와 시칠리아의 마르살라를 거쳐 괜찮은 이윤을 남겼으니 폼페이에서 한동안 휴양할 생각이네. 폼페이에는 유명한 검투장이 있으니 자네는 거기서 싸우게 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