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 화산.
9.
서후의 긴장한 모습을 본 데메트리우스는 그럼 그렇지라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서후가 긴장한 것은 데메트리우스의 생각처럼 검투를 할 것이 두려워 긴장한 것이 아니라 폼페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길함 때문에 긴장한 것이지만 말이다.
“폼페이는 뭐든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은 폼페이에서 가장 오래된 스타비안 목욕탕이지. 아는가? 이 목욕탕은 폼페이가 로마의 속주가 되기도 전에 건립한 목욕탕으로 최근에 들어서야 그 화려함이 완성되었지. 폼페이 시에서 특별히 공금으로 건축했으니 그 화려함을 한 번 본 자들은 잊을 수가 없네. 하긴 기억을 잃었으니 모르겠구만. 어떻게 라틴어는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데메트리우스는 서후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계속해서 드러냈다.
서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생각에 잠겼다. 베수비오화산이 언제 터졌는지 그 기억을 떠올려보기 위함이었다. 리처드의 기억으로 인해 단편적으로 아는 정보들이 있었기에 어떻게 끼워맞추면 그 시기를 추론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해야만 했다. 목숨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정보였으니 말이다.
“헤르쿨라네움도 휴양지로 나쁘지 않지만 폼페이보다 규모도 작고 무엇보다 동맹시 전쟁 이후 콜로니아 코르넬리아 베네라 폼페이아나(Colonia Cornelia Venera Pompeiana, 시민권이 부여된 로마의 정식 공동체 도시)로 격상된 품격 있는 폼페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
헤르쿨라네움은 그보다 격이 낮은 자치도시 등급을 부여받았기에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로마인인 자신은 로마의 정식 공동체 도시에나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서후는 데메트리우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다가 유효한 정보를 하나 떠올렸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대략 17년 전에 폼페이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나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서후의 경직된 반응에 이미 한껏 기분이 좋아진 데메트리우스였기에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말해보게.”
“혹 폼페이나.. 그 헤르쿨라네움이라는 곳에서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까?”
“지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베루스 자네는 들어본 적이 있나?”
“지진이라면 저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대답에 서후는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 시대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화산재 속에 자신의 유해를 남기고 그 모습을 관람하게끔 만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화산폭발로 죽을 일은 없겠군. 그래도 장담할 수 없으니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겠다.’
서후 자신이 알기로 베수비오 화산은 사화산이라 여겨질 만큼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화산이었다. 때문에 화산폭발이라는 라틴어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 이후에나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리처드의 기억이 아니라 서후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정보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화산이 폭발하면 어떤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폭발하려는 조짐이 보였음에도 도망치지 않은지도 모른다. 도망치고자 했어도 지각변동으로 인한 해일, 날리는 화산재와 화산암으로 인해 벗어나지 못했을 확률이 매우 높지만 말이다.
각광받는 휴양지라고 했던가? 서후는 지옥의 아가리로 머리를 들이미는 섬뜩한 기분이었다.
심상찮은 서후의 표정에 미소를 지우고 진중한 태도로 데메트리우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신의 주시씩이나 받는다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질문은 왜 던진 건가?”
서후는 잠시 고민했지만 말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미신과 같은 신화를 원체 좋아하는 족속들이니 조금 각색하기로 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미친 소리로 여기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아이러니한건 현대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약간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기 십상인데 이곳에선 이게 일상적인 발언이라는 점이었다.
“지난밤 꿈에 제가 서있는 땅밑으로 거대한 불덩이가 스며드는 것을 봤기에 질문 드린 겁니다. 마침 향하는 곳이 폼페이라고 하니 여쭤봤을 뿐입니다.”
서후의 말이 마치자마자 베루스가 소리쳤다.
“불카누스(Vulcanus)!”
불카누스는 불의 신으로 볼케이노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기도 했다. 그리스에선 헤파이스토스(Hepaestos)라고 불렀던 이름이기도 하다.
데메트리우스 역시 불길한 표정에 휩싸여 서후를 바라봤다.
“불카누스? 폼페이에 지진이라도 발생한다는 뜻이냐?”
“그걸 제가 안다면 질문하지도 않았겠지요.”
서후는 그쯤에서 선을 그었다. 괜히 무슨 신의 계시를 받는 자라는 등 그러기 시작하면 매우 골 아파진다.
“베루스. 이걸 어찌 해석해야겠소?”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얼씨구? 지어낸 말에 두 가지 해석씩이나? 서후는 내심 기도 차지 않았지만 당연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게 뭐요?”
“첫째는 말씀하신대로 폼페이 지역에 지진이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테세우스라는 소년이 향하는 곳이 어디였든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폼페이로 향하는 판국이니 그게 가장 타당한 해석입니다. 둘째는 테세우스라는 소년의 운명이 결코 순탄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 꿈입니다. 땅은 기반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역동하는 불이 스며들었다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 위에 자리한 사람은 또 어찌되겠습니까?”
꿈보다 해석이라더니 딱 그 꼴이 아닌가? 서후가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데메트리우스가 서후를 힐끗 바라 본 다음 베루스에게 말했다.
“자신의 과거도 기억나지 않는 자가 꾼 꿈이네. 자신의 과거가 부풀려졌거나 잡스런 꿈에 불과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더 명료해지지 않으셨습니까?”
베루스의 발언에 데메트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의 말이 맞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눈앞의 소년을 가까이하는 건 여러모로 현명한 태도가 아니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다. 그렇게 생각되니 테세우스라는 소년을 옆에 두기도 싫어졌다. 소년이 밟고 선 땅이 자신이 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불길한 기분에 데메트리우스는 코락스에게 손짓했다.
“적당히 먹을 것을 챙겨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도록.”
“알겠습니다. 다만 저것은?”
코락스가 바라본 것은 바로 아까 풀어놓았던 쇠고랑이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서후를 힐끗 바라 본 뒤 고개를 저었다.
“그건 필요 없다.”
데메트리우스의 눈빛에 서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