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12화 (12/298)

# 12

12. 베스티아리이.

12.

로마에서 문자의 서사 재료로 사용한 것은 크게 세 가지로 점토판, 파피루스, 피혁지(皮革紙)다. 가장 오래된 재료는 점토판으로 설형문자(楔形文字)를 발명한 메소포타미아를(기원전 4000년~3500년 무렵) 중심으로 서남아시아 일대에서 사용되었다.

점토판 이후는 파피루스로 기원전 3500년 무렵 이집트인들이 나일강 유역에서 재배하던 파피루스라는 식물을 이용해 만들었다.

피혁지는 짐승의 가죽을 이용한 기록방법으로 양피지(羊皮紙, parchment)와 독지(犢紙, vellum, 송아지나 염소새끼 가죽)이 있다. 독지는 양피지보다도 고가였기에 주로 양피지가 사용되었다.

이 양피지는 기원전 2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발명했는데 그 이전에도 가죽을 기록용으로 사용했지만 완전한 형태를 갖춘 건 이 무렵이었다. 이런 양피지의 발명에는 이집트 왕의 파피루스 수출금지 영향이 컸다.

가격은 피혁지가 파피루스보다 더 비쌌지만(양피지 한 장을 만드는데도 새끼양 한마리가 필요) 다른 서사재료에 비해 내구력이 월등히 좋았고 잉크흡수력도 뛰어났기에 중국 제지법이 알려지기 전까지 유럽에서 사용되었다. 파피루스는 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 사정이라 일반 평민들은 급한 서편이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 점토판을 사용했다. 점토로 만든 규격화된 판에 점토가 굳기 전 글자를 새기고 햇볕에 말리거나 구워 보존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중요한 기록은 금속으로 이뤄진 즉 청동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금속의 가격이 양피지보다 비쌌을 테니 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서후는 점토판에 써진 계약내용을 읽었다. 그곳에는 참으로 원색적인 글귀가 적혀 있었다.

‘몽둥이로 맞고 쇠사슬로 묶고 불로 지지고 칼로 죽여도 좋다라.. 뭐 이딴 계약서가 있지? 하아..’

다른 내용도 있었지만 그 내용이 핵심이었다.

“뭘 머뭇거리는 거지? 내가 프로모터(promoter, 검투 주선 밎 계약) 노릇도 겸하고 있으니 얼른 서명해라. 노예가 아닌 자가 검투시합에 서려면 반드시 계약을 해야 한다.”

서후는 페루사니의 말에 다시 한 번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네가 더 본다고 뭘 알!”

짜증난다는 듯 소리치려는 페루사니에게 서후가 말했다.

“세 번.”

“뭐?”

“세 번의 시합 후 계약이 종결된다는 말이 빠졌군요.”

페루사니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점토판을 돌려서 그것을 기록했다.

“아. 그걸 빼먹었군. 오해는 마라. 세 번만 시합을 뛴다는 경우 자체가 드문 것이니..”

로마 시대 역시 문맹률이 높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놀랍게도 로마는 남녀노소 빈부의 구별 없이 모든 사회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고 셈까지 할 줄 아는 사회였다.

물론 현대보다는 문맹률이 높지만 고대 역사상 로마와 같은 사회는 없었다. 고대 이집트는 필경사만, 중세에는 수도사만 읽고 쓸 줄 알았으며 이들 외에는 지배계층까지도 문맹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로마제국의 탁월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페루사니에게도 서후가 라틴어를 안다는 사실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빚으로 팔려오다시피 한 상황이니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자신의 불리한 조항을 짚어내는 모습에 이채서린 눈빛으로 서후를 힐끗 바라봤다.

리처드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서후는 글자를 읽거나 쓸 수 있었다. 듣고 말하는 건 그렇다쳐도 읽고 쓰는 건 이 시기 군주들도 문맹률이 높았다는 것을 기억하면 꽤 놀라운 일인데 그의 어머니,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은 공국의 후계자로 어린 시절부터 온갖 엘리트교육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리처드 1세는 단순히 읽고 쓰는 정도가 아니라 라틴어로 된 시까지 지을 수 있었다.

페루사니가 빠진 조항을 적어 넣자 서후는 다시 한 번 계약내용을 확인한 다음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적어 넣었다.

서후가 점토판에 기록한 라틴어를 본 페루사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코락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라.. 도대체 이해할 수 없군. 이리 영민한 소년을 검투사로 보내? 계약 내용을 세심하게 읽고 불리한 사항까지 집어낼 수 있는 지적수준이라면 검투사 일이 아니더라도 빚을 충분히 갚을 능력이 될 텐데?”

‘데메트리우스라는 놈이 그럴만한 여유를 준다면 그랬겠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지만 죽고 죽이는 검투대회도 있는 판국에 그런 것을 따진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때문에 서후는 침묵으로 응수했다.

“주인님의 뜻이야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계약이 완료된 이상 제가 할 일은 더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이만.”

코락스는 페루사니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서후는 쳐다보지도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태도는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을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서후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단 자유를 얻는다. 그 후에 무엇을 할지는 그 다음에 결정한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 그나마 차선이라 선택하기는 했지만 과연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항우와 리처드의 기억이 있다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은 항우도 리처드도 아닌 태서후가 아닌가?

그런 일말의 의심이 서후의 마음을 어지럽혔지만 모두 털어버리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더욱이 피를 보는 게 꺼림칙할 뿐이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전장의 광기와 잔혹함을 수도 없이 겪은, 아니 전장의 광기를 몰고 다니는 주역이었으니까. 바로 그랬기에 주저 없이 검투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부분이 컸다.

*

도크트레 쿠리오는 라니스타 페루사니가 데려온 예비 검투사들을 바라봤다. 모두 네 명이었는데 마음에 차는 놈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쯔.”

더 볼 것도 없었다. 이들은 검투사로 키우려고 데려온 자들이 아니고 이번 제전에서 죽이려고 데려온 자들이다. 그리스 놈 두 명에 아프리카와 갈리아족 한 명씩이라.. 검투사로 키우기에 쓸만한 놈이 한 명 보이긴 했다. 해적질을 했다는 드왈드라고 했나?

하지만 그보다 그의 눈을 사로잡는 건 바로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다른 자들과 달리 노예의 신분으로 검투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더 황당할 노릇이었다.

짜악

쿠리오가 채찍을 바닥에 후려치자 고막을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라니스타의 사정도, 저들의 사정도 알 바 아니다. 훈련관인 자신은 훈련을 시킬 뿐. 죽고 사는 건 저들의 운명에 달렸다.

“검투사는 사실상 로마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기술을 보유한 존재다. 군단병은 진지구축과 숙영 등 수많은 다른 기술을 배양해야 하지만 검투사는 오직 전투기술만 단련하고 또 단련한다. 네까짓 놈들은 숨 몇 번 들이쉬기도 전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도 있다.”

그 모습에 드왈드가 표정을 실룩거렸다.

짜악

“크흑!”

“네놈은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군.”

데메트리우스는 서후와 함께 드왈드를 페루사니에게 저렴하게 넘겼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이득이었기에 페루사니가 데메트리우스의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무튼 드왈드는 채찍에 얻어맞자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쿠리오를 바라봤다.

“가진 힘이 제법 대단한 모양이야. 그랬으니 해적질을 하며 연명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내일 당장에라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손수 알려주마.”

쿠리오는 채찍을 바닥에 던지고 가볍게 몸을 풀며 드왈드에게 손짓했다.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드왈드는 성난 멧돼지처럼 쿠리오에게 달려들었다.

퉁 퉁 퉁

훈련장의 흙바닥이 육중한 드왈드의 체중에 의해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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