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0화 (20/298)

# 20

20. 전설의 시작.

20. 전설의 시작.

주르륵

검투장 노예들이 축 늘어진 검투사의 시체를 흙바닥 위로 끌고 사라졌다. 그로 인해 피와 모래가 뒤엉키며 질척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주변에서는 당연히 소음과 환호성이 연신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폼페이시의 시민 대부분이 검투장에 모인 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을 돌아다니는 상인들에게 간식을 사서 그것을 먹으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다.

노예가 끌고 가는 검투사의 시체를 힐끗 바라본 진행자는 큰소리로 외쳤다.

“폼페이 시민들이여! 즐거우십니까?”

“와아아아.”

“이제 곧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카푸아의 챔피언 오이노마우스와 네아폴리스의 챔피언 에우메네스의 경기가 시작됩니다.”

“빨리 진행해!”

“나는 그 경기만을 기다렸어!”

“우우우 넌 꺼지고 어서 시작해라!”

진행을 맞은 베레스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 전에! 네메아의 사자를 기억하십니까? 가죽이 너무 튼튼해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화살을 날려도 죽지 않아 헤르쿨레스가 한 달의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다 목 졸라 죽인 그 사자를 말입니다.”

“네메아의 사자?”

“헤르쿨레스?”

관중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베레스가 다시 외쳤다.

“여기 그 네메아 협곡에서 잡아 온 거대한 수사자가 있습니다.”

그러자 관중들이 성난 표정으로 성토하기 시작했다.

“시시한 경기는 더 이상 필요 없어!”

“오이노마우스와 에우메네스의 경기나 시작해라!”

“결국 사자가 찢어발길 게 뻔한 경기 따위 집어치워!”

여기저기서 야유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베레스는 전혀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자자 진정하시고 더 들어보십시오. 오전의 어린 영웅 테세우스가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헤르쿨레스의 신화를 재현하겠다고 합니다.”

“뭐? 테세우스? 표범을 잡은 그 어린 소년?”

“미친. 이거 흥미진진한데?”

“와아아아아! 어서 시작해라!”

“테세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글라디우스(Gladius) 한 자루! 바로 위대한 로마군이 사용하는 검입니다. 그는 과연 헤르쿨레스의 신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요? 자! 여러분이 고대하는 경기가 곧 시작될 예정이니 서두르십시오!”

“와아아아!”

관중들은 열광하면서 서둘러 돈을 걸기 시작했다. 대부분 수사자에게 돈을 걸었지만 오전과 달리 서후에게도 돈을 거는 자들도 꽤 많았다.

*

“하하하. 데메트리우스는 자네는 정말 대단해. 전문 프로모터(검투 주선 및 계약자)로 뛰어도 크게 성공하겠어. 이 열기를 보게나. 하하하.”

경기장의 과열된 모습에 집정관 발구스가 크게 만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그를 권위를 나타내는 파스케스(도끼날을 나무가지 가운데에 심어놓은 무기)로 무장한 릭토르(집정관 수행관원)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한 수완입니다. 표범에게 살아남은 아이를 다시 사자에게 밀어넣다니..”

살짝 비꼬는 것 같은 말에 발구스가 말했다.

“정치란 것도 결국 나의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 그런 면에서 데메트리우스. 자네의 그 수완 나도 좀 배우고 싶구만.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데메트리우스는 고개를 숙이면서 웃음을 지었다.

글라디우스는 약 60cm, 무게 약 1kg의 단검으로 근접전을 위해 탄생한 검이다. 로마 군인들은 방패 뒤에 숨어 글라디우스로 적의 급소를 찔러넣는 방식으로 많은 승리를 거뒀다.

군의 전술은 잘 모르지만 방패가 없다면 글라디우스보다는 창이 훨씬 유용한 무기라는 걸 데메트리우스도 알았다. 그 상대가 월등한 힘을 가진 맹수라면 더더욱 그랬다.

*

오후의 뜨거운 햇살에 흙바닥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오르고 그 열기와 함께 피비린내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숨이 턱턱 막혀왔고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불쾌한 땀과 피 냄새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들었다.

서후는 묵직한 검을 쥐락펴락하면서 철창 안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수사자를 바라봤다.

창도 아니고 고작 한 자루 검이라. 게다가 그 검은 단검류에 불과했다. 그 말인즉 강력한 사자와 근접전을 벌여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쯤 되면 눈치가 둔한 자도 데메트리우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와아아아! 테세우스!”

“테세우스!”

“사자를 죽여라! 나는 너한테 걸었다!”

관중들의 광기 어린 환호성이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랴? 저들의 환호가 사자의 입을 봉하기라도 하나? 아니면 저들의 환호가 자신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라도 하나? 타인이 주는 명예와 환호란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

드르르륵 철컹

“크허어어헝”

풍성한 갈기를 가진 수사자가 살벌하게 울부짖었다. 자연히 서후는 긴장한 눈으로 수사자를 바라봤다.

사자는 건장한 성인 남자의 12~13배에 달하는 근력을 지니고 있고 치악력은 300kg이나 된다. 심지어 수사자는 자신 몸무게의 4배나 되는 사냥감을(800kg) 단독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영장류 중 최강이라는 고릴라도(7배 정도) 사자의 사냥감에 불과하다. 그러니 서후의 연약한 육신은 앞발에 스치기만 해도 갈가리 찢겨나갈 것이다.

표범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이 서후의 몸을 짓눌렀다.

꿈틀거리는 근육을 과시하듯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목을 물어뜯을 기회만 노리는 사자의 모습에 서후는 글라디우스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크르르르”

‘네메아의 사자라..’

헤라클레스의 신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면 네메아의 사자는 1.5배 정도는 더 거대한 고대종, 모스바흐사자나 동굴사자일 확률이 높다. 헤라클레스가 있던 시기에 이미 멸종했지만 드물게 명맥을 유지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하지만 서후가 맞닥뜨린 사자는 고대종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대종은 갈기가 눈앞의 사자처럼 풍성하지 않다. 그러니 이 사자는 이 일대에 서식했고 기원후 100년경 멸종한 유럽사자일 확률이 높았다.

눈앞의 사자가 어떤 종인지 서후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지만 일단 고대종은 아니니 신화에 나온 사자처럼 창칼이 들어가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겐 눈앞의 사자가 신화 속의 사자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이다.’

그래도 헤라클레스는 네메아의 사자와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체력과 힘이 있지 않았나? 서후 자신에게는 글라디우스 한 자루가 전부다. 물론 나중에 육체가 모두 성장하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게 지금도 아니다.

“크허허헝”

그 순간 수사자가 땅을 박차고 서후에게 달려왔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놈의 체중이 실린 공격을 막는다? 역시 불가능하다. 피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반사신경이 엄청난 맹수는 피하는 즉시 몸을 뒤틀어 자신을 후려치거나 물어뜯을 것이다. 그럼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도망칠 수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

서후는 도리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야말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이 따로 없었다.

탁 탁 탁

흙바닥을 박차고 달려오는 서후의 모습에 수사자가 잠시 멈칫하는 기세를 보이긴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느낌적인 느낌일 뿐, 수사자는 여전히 사나운 기세로 달려오다가 서후를 향해 도약했다.

가장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체중을 받아낼 수도 없는 사냥감이 자신의 체중과 함께 물어뜯긴다면 그걸로 사냥은 종료되니까 말이다.

‘지금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서후는 들고 있던 글라디우스를 놈의 얼굴을 향해 재빠르게 집어 던졌다.

붕붕붕붕

글라디우스는 파공음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막 도약하는 수사자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러나 사자는 과연 사자였다. 수사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글라디우스를 확인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앞발로 글라디우스를 쳐냈기 때문이다. 서후는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그건 곧 자신의 죽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후의 공격타이밍이 절묘했기 때문에 수사자도 제대로 쳐내지 못했고 결국 그렇게 쳐낸 글라디우스의 검끝이 수사자의 왼쪽 눈알을 베고 지나갔다. 실로 운이 좋았다.

스아악

“크아아앙”

수사자는 눈알을 도려내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울부짖으며 땅에 나뒹굴었다. 서후는 수사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급히 글라디우스가 떨어진 곳으로 가서 검을 주워들었다.

“크르르르”

왼쪽 눈에서 피를 흘리던 사자는 그런 서후를 향해 분노의 울음을 터트리며 다시 쇄도했다.

“크와와왕!”

서후는 검을 집자마자 뒤를 보지도 않고 옆으로 몸을 날려 공중으로 뛰어오름과 동시에 제비돌기를 실시했다. 서후의 모습은 탁월한 곡예사 같았고 관중들이 보기에 그 모습은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우오오오”

“허어.”

“크허어엉”

관중들의 탄성과 동시에 수사자는 다시 공연히 허공을 움켜잡은 채 바닥에 착지했다.

두근 두근 두근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서후의 귓가에 거세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호흡은 침착했고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조차 규칙적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힘은 몰라도 유연성과 민첩함은..’

서후는 글라디우스를 빙글 돌려 잡으면서 히죽 웃었다.

‘네놈에게 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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