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 전설의 시작.
22.
크레스트(Crest, 닭벼슬 모양 장식 투구)에 스쿠툼(scutum, 직사각형 방패)와 단검류를 들은 에우메네스가 둥근 나무방패에 긴 장검을 든 오이노마우스를 찔렀다.
“와아아아 죽여라!”
“네아폴리스의 챔피언! 카푸아의 촌놈 따위 죽여버려!”
“와아아아”
하지만 오이노마우스는 꽤 긴 장검을 변칙적으로 휘둘러 에우메네스가 더 깊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훙 후훙
삼니움인 풍의 무장이라 삼니테(Samnite)라 불리는 검투사의 종류가 바로 에우메네스였고 갈리아 풍의 갈리(Galli)가 바로 오이노마우스였다. 삼니움인이나 갈리아인 모두 로마의 적들이었다. 그 중 삼니움인은 로마에 흡수되었지만 말이다.
에우메네스라는 그리스 이름답지 않게 그는 탄력적인 근육을 지닌 흑인이었는데 이는 그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에 위치) 지역 출신의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리스인 이름을 지닌 이유는 로마인들은 자신의 노예에게 그리스식 이름을 붙이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열에 여덟, 아홉은 그리스식 이름을 붙였다.
붕붕
잠시 소강상태가 된 상황에 오이노마우스가 장검을 허공에 휙휙 돌리자 에우메네스는 단검의 검자루 부분을 스쿠툼에 가격한 다음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퉁 퉁
“우워!”
갈리아족은 로마인들과 다르게 적을 베는 데 유용하도록 검의 끝부분이 길고 날카로운 검을 사용했다. 로마인들의 검은 찌르기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 갈리아족과 전투를 치르며 베기에도 적합한 형태로 검의 형태가 변모했다. 사실 이 시대 다른 민족들은 베기 위주의 검술로 발전했기에 로마의 찌르기 위주의 검술이 상당히 특이한 형태였다.
오이노마우스는 이 누미디아 출신의 에우메네스를 푸른 눈으로 노려봤다. 네아폴리스의 챔피언이라고 하더니 과연 지금껏 만나온 어떤 검투사보다 사납고 노련한 상대였다. 무엇보다 스쿠툼을 다루는 실력이 상당했다.
에우메네스가 흙바닥을 박차고 스쿠툼을 앞세운 채 오이노마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흙바닥을 박차는 소리와 점점 더 커져가는 관중들의 열기에 오이노마우스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저 흑인은 탄력적인 근육도 근육이지만 체구도 자신보다 컸다. 오이노마우스는 날렵한 체구를 지녔기에 이대로 부딪친다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무작정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보다 짧은 거리를 만들기 위해 에우메네스가 전략적으로 움직였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장검보다 단검에 적합한 거리가 유지되면 좋을 것이 없다.
따라서 오이노마우스 역시 달려오는 에우메네스를 향해 돌진했다. 자신보다 체구도 작은 저 갈리아놈이 돌진하자 에우메네스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스쿠툼을 더욱 강하게 움켜잡았다. 부딪히는 순간 스쿠툼을 위로 쳐올려서 놈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그대로 놈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을 속셈이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가 예상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이노마우스가 그대로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크레스트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치아를 내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스쿠툼을 가진 자신에게 저런 공격따위 통할 리가 없다. 도리어 허공에 뜬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게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오이노마우스는 에우메네스가 강력한 힘으로 방패를 치켜드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는 스쿠툼을 박차고 날아올라 공중돌기를 하며 허공에서 긴 장검으로 에우메네스의 목을 베었다.
촤아악
“크흐흑!”
에우메네스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치명적인 급소를 피하긴 했으나 왼 어깻죽지가 베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에우메네스는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시종일관 우세를 유지하게 만든 스쿠툼을 바닥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왼팔을 못 쓰게 된 고로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치열한 공방 끝에 드디어 둘 중 하나가 상처를 입은 상황이다. 때문에 관중들은 더욱 크게 열광했다.
*
“오오. 역시 바티아투스 자네의 검투사로군. 노련함과 민첩하기가 전갈의 꼬리만큼이나 매섭군.”
그네우스 콘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는 저편 상석에 앉아 즐거워하는 주최자, 즉 집정관 무리를 보다가 페루사니에게 말했다.
바티아투스는 카푸아는 물론 여러 도시에서 명성이 높은 검투사 양성소의 주인이었다. 주요 검투경기에 빠짐없이 그의 검투사를 초청하는 편이었다.
“그놈은 누군가? 비싼 값을 치를 테니 내게 팔게.”
페루사니는 바티아투스가 누구를 언급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테세우스, 바로 서후를 언급하는 발언임을 말이다.
“이미 내 손을 떠났어.”
“그 자가 제시한 금액이 얼만가? 아니 그 자가 얼마를 제시했든 그것의 두 배를 지불하지.”
“내 말을 오해했군. 테세우스는 루디스를 소유하게 될 거다.”
“루디스를?”
루디스는 단순한 나무검이지만 검투사의 자유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테세우스가 노련한 검투사라면 이해하겠지만 그는 고작 두 경기밖에 뛰지 않은 소년이다. 그런 검투사에게 자유를 줬다고?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계약이 그런 걸 어쩌겠나?”
“계약이라.. 테세우스라는 소년이 자유민이었나 보군.”
검투사 중 열에 하나 이상은 자유민이었으니 특이할 것은 없지만 소년인지라 당연히 노예일 거라 생각했었다.
“맞아. 처음에는 뭔 미친놈인가 싶었건만 지금은 왜 야료를 부리지 않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군.”
바티아투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계약서만 내게 팔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제길..”
페루사니의 욕설에 바티아투스가 의문서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계약서도 없어. 계약이 종결된 의미로 파기 되었지.”
“파기라.. 아무래도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군.”
자유민인 소년이 검투사로 계약한 것은 그렇다 쳐도 단 두 경기만에 계약이 종결되었다? 이건 분명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자연히 드는 의구심에 바티아투스가 페루사니를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딱히 비밀도 아니니 말하지 못할 것도 없네. 테세우스는 데메트리우스가 데려온 사람이네. 자네도 들어봤을 거야.”
“아.. 그 데메트리우스?”
“듣기로 그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는데 그게 테세우스였던 거지. 넵투누스의 화를 피하기 위해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단순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그게 아니면?”
“소문을 들었다면 알 거 아닌가?”
노예에게 잔인한 주인은 많지만 해방노예는 언제나 그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흐음. 그럼 테세우스가 루디스를 소유하게 되는 상황이 데메트리우스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겠군?”
“그런 재능있는 소년을 단순히 재미를 위해 죽이려고 해? 데메트리우스가 그런 자였다면 자네나 나나 해방노예의 이름 따위 거론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도 몰랐던 게 분명하고 당연히 예상하지도 못했겠지. 그나저나 자네. 뭘 어쩌려고 그러나?”
“특수한 상황 아닌가? 계약이 완료되었지만 아직 그는 검투사의 신분이고 원래 법이라는 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일세. 아아. 데메트리우스. 그가 재물이 그렇게 많다지? 자신을 검투사로 판 소년 따위를 변호할 한심한 변호사는 본국 전체를 뒤져도 없을 걸세. 재물을 마다할 사람도 마찬가지.”
“허. 자네?”
페루사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루디스를 주기로 한 자들도 결국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용하다가 죽게 만든다더니..
“나도 욕심이 나긴 매한가지지만 나는 이 일에서 손을 떼겠네.”
페루사니의 말에 바티아투스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준다면 나야 고맙지. 데메트리우스 입장에선 면식이 없는 나보단 자네가 더 편할 테니.”
페루사니는 바티아투스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충고 하나만 하지. 자네 그러다가 끝이 좋지 않을 걸세.”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다고 그 일이 자네에게 화로 돌아오던가?”
검투사가 천한 취급을 받는다지만 어찌 개미에 비할 바랴? 하지만 페루사니는 더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렇게 살아온 자고 또 그렇게 살아갈 자다. 더 말을 해봐야 자신의 입만 아플 뿐이다.
“와아아아아.”
그때 검투장을 진동시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이노마우스! 오이노마우스!”
“오이노마우스!”
“오이노마우스!”
관중들은 오이노마우스의 이름을 열광하고 또 열광했다.
바티아투스는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신들도 나를 축복하는군. 그나저나 이번 제전은 정말 엄청난 성공이로군.”
당연히 바티아투스는 그 주역에 바로 테세우스라는 소년이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