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8화 (28/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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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정의의 대가.

28. 정의의 대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공화정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고대의 철학자이자 저술가였던 플루타르코스의 표현에 따르면 필리포스보다 여색을 멀리했고 안티고노스보다 신의를 잘 지켰으며 적에 대한 인정은 한니발보다 더했고 판단력과 전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두 장군, 퀸투스 메텔루스 피우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협공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여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정도로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정적의 손이 아니라 아군의 배신으로 인한 암살 때문이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당한 후에야 폼페이우스 등이 히스파니아 반란을 종식 시킬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비운의 명장이었다. 하지만 서후는 세르토리우스에 대해 알지 못했다.

“세르토리우스?”

“그는 로마의 프로콘술(Proconsul, 집정관 대행)이었기에 거버너(Governor, 속주 총독)에 임관할 자격은 충분하지만 말했다시피 술라와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공명정대한 다스림으로 속주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긴 하지만 바에티카의 관리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어.”

속주 총독의 자격은 집정관이나 법무관, 그 대행들에게 주어진다. 속주에 한해 총독의 권한은 무제한에 가까웠기에 원주민들은 극심한 수탈을 당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세르토리우스는 폭정이 아니라 선정을 베풀고 있는 모양이었다.

“으흠.”

서후가 침음을 뱉자 나디르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군권이 세르토리우스에게 있으니 저들이 그의 통제에 따르고 있긴 하지만 술라가 토벌군을 보내면 내응(內應)하여 그를 칠 것이다. 누가 봐도 대세는 술라고 세르토리우스가 프로콘술이라고 해도 엄연히 말해 공화정이 인가하지 않은 불법점령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서후는 나디르가 반군에 합류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곧 토벌당할 것이다?”

“뛰어난 명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가 히스파니아 지역을 떠난 지 2년은 더 흐른 것 같군. 그러니 이미 토벌당했을 수도 있겠지.”

나디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세르토리우스에게 합류하여 승리를 거둔다면 로마시민권은 물론 많은 재물도 얻을 수 있겠지.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마리우스와 킨나가 죽었으니 세르토리우스는 반 술라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야. 더욱이 무력화되지 않은 정적이지. 그런 자를 술라가 내버려 둘 리가 없어. 귀가 있다면 들어봤겠지만 마리우스 일파라면 누명이라도 씌워서 죽여버리는 잔혹한 자가 술라다.”

‘이대로 해적이 되느냐? 아니면 곧 토벌당할 반군이 되느냐? 둘 중 뭐가 더 나은 건지 영 판단이 서질 않는군.’

두 선택 모두 장래가 밝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신이 당면한 현실인가 싶어 서후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디르에게 말했다.

“일단은 그를 만나보고 싶군.”

“그게 네 선택인가?”

“일단은..”

“아직 티레눔해(Tyrrhenum, 티레니아해)를 지나지도 않은 상황이니 급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겠지. 그럼 피티우사 제도까지 우리와 함께하는 것으로 해두지. 다만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친 놈들이다. 보아하니 별로 문제 될 것도 없겠지만 네 앞가림은 네가 알아서 하도록. 그렇다고 죽이지는 말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서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손에 남아 있는 치즈를 입에 마저 털어 넣었다.

*

저 멀리 카피톨리누스 꼭대기에 있는 로마를 상징하는 두 개의 신전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에 유피테르 신전과 왼쪽에 위치한 유노(Juno, 헤라) 신전이었다. 그 두 신전을 중심으로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능선을 따라 신전과 건물들이 물결치는 파도처럼 늘어서 있었다.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넓은 계단과 탁 트인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볼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 위치한 세 그루의 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주변에서도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그 어디에서도 긴장할만한 광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스물 중반쯤 되어 보이는 이 사내는 매우 긴장한 표정으로 포룸(forum, 공공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말했지만 로마가 거대한 집이라면 이 공공광장은 손님을 만나는 응접실이라 할 수 있었다. 만남의 장이자 정치, 세금, 경연대회, 식사초대, 오락 등등 온갖 최신소식이 오가는 일종의 거대한 소식지랄까? 그러니 아무리 봐도 사내가 포룸을 바라보며 긴장할 까닭이 없어 보였다.

깡마른 사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시종을 바라봤다. 시종의 복장을 보니 잡일을 맡는 노예가 아니라 노멘클라토르(nomenclator, 교육받은 노예)로 보였다. 노멘클라토르는 주요인물의 이름을 기억했다가 알려주거나 메모해 요긴한 정보를 주인에게 전달, 기록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티로, 공판이 몇 시 시작이지?”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로마 역시 현대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12시간으로 나눴다. 6~7시를 첫 번째 시간으로 5~6시가 열두 번째 시간이었다. 따라서 다섯 번째 시간은 10~11시를 가리키는 시간이었다.

“서둘러야겠군. 그나저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자신의 시종 티로를 바라봤다.

“네 생각은 어때?”

노멘클라토르라고 해도 주인이 노예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티로는 이런 경우를 많이 겪었기 때문에 잠시 말을 아끼다가 키케로에게 대답했다.

“정확히 어떤 것을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네 생각에도 내가 너무 경솔하게 이 사건을 받았냐고 묻는 거다.”

“글쎄요.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키케로는 티로의 말에 더욱 긴장하며 대답했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주인님께서 이 사건을 맡지 않았다면 오늘 한 사내는 누명을 쓴 채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겁니다. 그에게 누명을 씌운 자의 면면을 생각하면 채찍질과 같은 고문을 당한 후에 십자가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키케로는 티로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었겠군.”

“예. 주인님께서 이 사건을 맡지 않으셨다면 말이죠.”

키케로는 티로의 말에 피식 웃으며 저 멀리 하얀 기둥으로 이뤄진 바실리카(basilica, 로마에서 법정, 상업거래소, 집회장으로 사용된 건물)를 바라봤다. 법정의 계단 위로 파피루스로 이뤄진 서류 묶음을 든 변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리숙한 자들은 이런 부류의 카우시디키(엉터리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긴다. 법에는 무지하고 말만 뻔지르르한 자들 말이다. 당연히 패소할 수밖에 없다.

키케로는 자신이 맡은 사건을 떠올렸다.

술라의 해방노예 크리소고누스는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토지를 2천 데나리우스에 사들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 프로 로스키우스 아메리노라는 자가 원래 그 토지의 가격은 250탈렌트의 가치가 있다고 소송을 걸었다. 1 탈렌트는 6천 데나리우스와 맞먹는 금액으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술라가 그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고 매우 화가 난 술라는 로스키우스에게 도리어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고발하고 크리소고누스를 증인으로 세워 거짓증언하게 했다.

애초에 정치범으로 몰아 죽인 자가 누굴까? 술라다. 이제는 아들마저 죽이려 했다. 당연히 술라가 두려운 나머지 아무도 로스키우스를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로스키우스가 찾아와 간청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 사건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물을 마셔도 목이 바짝바짝 말랐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이상, 반드시 승소한다. 반드시.

볼살이 푹 패인 키케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법정으로 들어섰다.

“저 자가 키케로인가?”

“이겨도 이긴 게 아닐 텐데 배짱 한 번 두둑하군.”

주변의 수근거림을 뒤로 하고 법정 안으로 들어서자 홀 구석에 공판을 주재하는 집정관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술라는 아니었고 또 다른 집정관 메텔루스 피우스였다. 그 옆으로는 판사들이 자리했고 두려움에 질린 로스키우스도 보였다.

이 재판의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 사람들로 가득한 법정은 후덥지근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키케로는 열기가 과중되면 될수록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히 긴장했던 표정도 전보다 자연스러워졌다.

그때 메텔루스 피우스의 음성이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공판을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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