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29. 정의의 대가.
29.
“카르타고군.”
“크하하하. 아랫도리 좀 돌릴 수 있겠어.”
“그거 좋지. 하지만 난 일단 따뜻한 음식부터 먹어야겠어.”
서후는 얼핏 잠이 들었다가 해적들이 떠드는 소리에 눈을 떴다.
카르타고. 카르타고를 어떻게 모르겠는가?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니발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것이다. 한니발의 도시인 카르타고 역시 마찬가지. 서후는 카르타고라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도시를 바라봤다. 해상도시국가로 유명한 카르타고의 전경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음..”
하지만 서후는 감탄은커녕 침음을 삼켰다.
“로마인들의 작품이지.”
폐허. 그곳엔 부서지고 허물어진 폐허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카르타고를 아예 잿더미로 만들고 카르타고인을 살육하고 그들을 노예로 잡아갔지. 그래도 우리는 도시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는 않아.”
카르타고는 기원전 3세기 전반까지 서지중해의 패권을 잡고 있었다. 지리적 이점으로 인한 무역으로 크게 번성했는데 카르타고가 번성할 때는 이들의 허락 없이 항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이 움켜쥐고 있는 지중해 서쪽은 그리스인들조차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로마와의 세 번에 걸친 전투, 포에니 전쟁으로 패권을 잃고 결국엔 완전히 멸망해버린다. 서후가 기억하는 한니발 바르카는 2차 포에니 전쟁의 주역으로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당해 굴욕적인 조항을 로마와 맺어야만 했다.
어쨌든 이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탁월한 기술을 지녔는데 이 농법이 로마에 전해져 라티푼디움(거대 농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는 자영농과 부농의 양극화 현상을 극대화시켰고 이로 인해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이 대두되기도 했다.
나디르의 말대로 로마는 카르타고를 폐허로 만들고 대부분의 카르타고인들을 죽였으며 살아남은 5만 명의 사람들조차 모조리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소금까지 뿌렸다. 한마디로 철저하게 멸망시켰다. 그러던 것이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이르러 다시 크게 번성하게 되지만 이때는 카르타고가 폐허로 존재할 때였다.
서후는 건축물의 잔해를 바라보며 나디르에게 말했다.
“않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겠지.”
약육강식의 법칙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고대다. 심지어 이들은 약탈을 주업으로 삼는 해적이고 약탈만이 이들의 전부다. 따라서 이들이 힘을 가진다면 로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나디르는 그 말에 서후를 빤히 바라봤다.
“네게 누명을 씌워 노예로 삼거나 죽이려고 한 이가 로마인이다. 내가 너라면 로마에 이를 갈 것이다. 그런데 왜 로마에 미련을 두지?”
왜 로마에 미련을 두냐고? 로마는 점점 더 커져서 지중해 전체를 삼키는 대제국이 된다. 수천 년 동안 회자 되는 대제국 말이다. 지중해를 떠날 게 아니라면 그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많은 피는 많은 두려움을 낳고, 많은 두려움은 결국 많은 적을 낳으며, 그 많은 적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창칼을 들고 내 피를 탐할 테니까. 항우라면 즐겼을 테지만 난 항우가 아니다.’
지중해를 떠난다? 이 시대는 어디를 가든 비슷하다. 그나마 로마가 더 낫다. 로마가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그 이유만 생각해봐도 간단한 일이다.
“미련? 미련이 아니라 현실적인 판단일 뿐이다. 카르타고의 계보를 이어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나라가 어디지?”
“······.”
서후는 배가 파도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파도의 움직임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에 현대의 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요동쳤다.
“해적이란 삶은 이 요동치는 배와 같다. 언제 뒤집힐지 모르지. 나디르 당신이 선 자리에도 언제 파도가 들이칠지 모를 일이다. 강한 두 팔을 가지고 있다면 거센 풍랑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나이가 들고 두 다리에 힘이 빠지면? 그때는 저 깊은 바다에 수장될 수밖에 없겠지.”
단순히 폭풍우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적대장 노릇을 뜻하는 것임을 눈치채지 못할 나디르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자였다면 서후가 길게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음.”
나디르는 침음을 삼키다가 서후에게 동전 하나를 튕겼다.
팅
서후가 그것을 잡아서 보자 1 아우레우스였다. 이걸 왜 내게 주느냐라는 표정으로 나디르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서후에게 말했다.
“너를 팔아도 백 아우레우스를 얻을 수는 없다. 아니 1 아우레우스도 얻을 수 없지. 뭐 그것을 떠나서 거래로 인한 것이었으니 내 입장에선 주지 않아도 상관없겠지만 호의. 네 호의를 사기 위함이라고 해두지.”
곧 카르타고에 상륙한다. 배에선 돈이 필요 없어도 육지에서는 다르다.
“호의. 호의라.. 고맙게 받지.”
“나중에 돌려주면 더 좋고. 그러니까 내 두 다리에 힘이 빠졌을 때 말이야.”
나디르의 말에 서후는 빙그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배를 지킬 인원을 제외하고는 선원들 모두 카르타고에 들어섰다. 도시가 폐허라고는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제법 커다란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말했다시피 카르타고는 원해를 항해하는 자들이 거쳐 갈 수밖에 없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지만 로마의 부유한 자들은 카르타고인들이 일궈놓은 땅을 구매하여 경작하고 있었고 그것을 다시 로마로 가져가 이윤을 남겼다. 겉모습은 폐허에 불과해도 도시는 생동감이 넘쳤다. 다만 이곳의 주역이었던 카르타고인만 사라졌을 뿐이다. 바로 이런 점을 파악했기에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시를 재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선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여자를 사러가거나 막 조리한 음식을 먹으러 이동했다.
로마에서 카르타고까지 무역선으로 삼 일이 걸린다. 서후 등이 타고 온 배는 전투형 갤리선으로 당연히 무역선보다 빠를뿐더러 폼페이는 로마보다 카르타고와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따라서 폼페이에서 카르타고까지 이틀 남짓 걸렸으니 선원들과 친분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친분이 있는 나디르마저 몇몇 선원들과 함께 배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서후는 덩그러니 홀로 카르타고의 폐허를 걷고 있었다.
서후는 발걸음을 옮기다가 자신을 은밀하게 따라오는 움직임을 파악했다.
‘해적 놈들인가?’
나디르가 자신에게 건넨 아우레우스를 확인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근 150명 정도 되는 자들이 탑승할 정도로 배가 크긴 했지만 누군가의 눈을 피해 무슨 일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결국은 나디르가 알게 된다.
나디르가 두려워 참았던 자들이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면 지금이 기회였다. 그 순간 서후는 나디르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보호 아래서 이틀이나마 편하게 지냈으니 그의 당부를 깡그리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죽이지는 말라고 했으니 어지간하면 목숨은 붙여두마.’
서후는 일부러 막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서후를 따라오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정말 꼬맹이 하나뿐이야?”
“뭘 꼬나보냐. 이 핏덩어리 새끼야.”
서후의 앞에 지저분한 몰골을 하고 있는 대여섯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옷은 피와 기름때로 찌들어있었다. 따라서 저들이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서후와 안면이 있는 자가 한 명 있었다.
‘저 자는?’
갑판장 도케인의 명령을 자주 수행하던 사내였다. 당연히 이름이 있을 테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한다길래 선원들 뒤라도 치는가 했더니 고작 꼬맹이 놈 하나 아냐? 카시안 네놈도 한물갔나 보군.”
그래 카시안. 저 대머리 사내는 카시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뭐? 이 새끼야?”
카시안이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욕설을 내뱉자 다른 사내가 말했다.
“일이 쉬우면 더 좋다. 어쨌든 분명 이 일의 대가로 1 아우레우스를 지불한다고 했겠다?”
“물론.”
“꼬맹이 하나 상대하는 것치고는 과한데?”
“그럼 너는 빠지던가?”
“그럴 수는 없지.”
서후는 순간적으로 나디르를 의심했지만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일을 이렇게 번거롭게 할 이유가 없다.
‘배의 모든 선원이 나디르의 명령을 듣는 수하나 다름없으니까.’
“갑판장 도케인의 뜻인가?”
카시안이 히죽거리면서 서후에게 말했다.
“역시 눈치가 비상해. 그래서 네놈을 더 살려둘 수는 없는 거지만.. 그런데 헛짚었어. 도케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하긴 나중에 알아도 그는 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아무튼 나디르 앞에서는 조심해야 하지. 일단은 말이야.”
그러자 한 무뢰배가 웃음을 터트리며 카시안에게 말했다.
“하하. 하여간 이 새끼 쓸데없이 치밀하기는.. 그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하지. 예쁘장하니 상등품인데? 나도 같이 끼워주겠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카시안이 씩 웃으며 대답하자 일행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도 입을 열었다.
“네놈도 상당한 악취미로군. 나디르를 죽일 수는 없으니 그와 친분이 있는 소년을 욕보이고 죽이겠다?”
그러자 카시안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뭐? 뭐 문제 될 거 있나?”
“나야 돈만 얻을 수 있다면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 안 한다. 다만 죽일 거면 나한테 넘겨.”
“뭐? 네르마. 너 이 새끼 설마?”
카시안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네르마가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그에게 말했다.
“아 오해하지는 말라고. 나도 죽일 거야. 나디르에게 데려가서 괜한 분란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다만 죽일 거라면 이왕이면 돈 되는 제물로 바쳐서 죽이는 게 더 낫지 않겠나?”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 큭큭큭. 좋아. 그렇게 하지. 그렇게 하고말고.”
서후는 저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에서 자비라는 단어를 지워버렸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모조리 죽여야만 내 속이 시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