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31화 (31/298)

# 31

31. 정의의 대가.

31.

서후는 차갑게 식어가는 카시안의 시신을 바라봤다. 네르마 등의 시체도 바닥에 쓰러져 피를 바닥에 낭자하게 흘리고 있었다. 이 주변 일대가 저들의 피로 참혹하게 물들었다. 서후의 양손 역시 붉게 물들어있었다. 손에 피를 묻힌 게 엊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후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서후는 단검을 허리춤의 검집에 집어넣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저들의 장검을 주워들었다. 완만하게 휜 곡선 형태의 삼쉬르(Samshir)였다.

절그럭.

그렇게 양손에 각기 하나씩 나눠진 서후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항구와 인근한 카르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자 작은 비석들로 이루어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시안이 언급한 토페트(Tophet)가 분명하리라. 바알과 타니트에게 제사를 하는 곳 말이다. 그는 카시안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카르타고 전역을 파괴한 로.. 로마군도 토페트는 건들지 않았다. 로.. 로마도 두려워하던 곳을 어..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그.. 그러니 노예라도 사서.. 커걱.”

더 듣고 싶지 않았던 서후는 그대로 카시안의 목을 베어버렸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고 고대에 가면 고대법을 따르라? 기억하는가? 서후가 테러리스트에게 몸을 던진 이유 말이다.

살릴 자는 살리고 죽일 자는 죽인다. 마음이 동하면 자신의 목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재 서후의 마음엔 분노만이 가득했다. 그런 그를 악습 따위가 얽맬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이 일로 목숨을 잃어도 그는 행할 것이다. 서후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흥. 아앗”

“헉 헉 헉”

그러나 작은 비석보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끈적한 비음과 함께 토페트 곳곳에서 벌거벗은 남녀가 난잡하게 성교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마치 뱀들이 발정기에 접어들어 한데 어울려 성교를 맺듯이 그들은 그렇게 난교를 벌이고 있었다.

난교야 뭐 현대에서도 어딘가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크게 새로울 것도 없었다. 저들의 선택이고 저들의 삶이니 그게 싫다면 관여하지 않으면 될 뿐이다.

하지만 서후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서후의 두 눈에는 실핏줄이 섯고 그의 양손에 나눠진 삼쉬르는 연신 파르르 떨렸다.

천인공노할 일들이 지금 서후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 가운데 새까맣게 탄 잔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잔해의 크기를 볼 때 희생물은 갓난아기에 불과했다. 게다가 저들은 어린아이들을 산채로 불에 태웠다.

“아아아.”

흉물스럽게 불타서 소녀인지 소년인지도 모를 아이가 끔찍한 고통에 마지막 숨을 내뱉고 비참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바알과 타니트의 은총이 내려올 것이라는 소리를 지껄이며 즐거워하며 저들끼리 난교를 벌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치가 떨린다는 표현은 바로 지금의 상황을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이리라.

서후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너 이 새끼. 신성한 제사에 칼은 뭐고.. 그리고 그 피는 뭐냐?”

그때 검을 찬 몇 명의 사내가 서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제물로 쓸 양이나 염소라도 잡았나 보죠. 아앙.”

벌거벗은 여인이 서후를 유혹하는 눈빛으로 쳐다본 다음 경계를 서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자 검을 찬 사내가 거칠게 여인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년이 어디서 아양이야. 왜 이번엔 소년이라도 잡아먹고 싶었나 보지?”

“아흥. 함께 할 거 아니면 비켜봐요. 날름 삼키게.”

서후는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자각조차 없는 자들이다.

“네 년놈들은.. 으드득.”

살아 있을 가치도 없다. 서후는 이성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촤아악

서후는 벌거벗은 채 다가오는 여인의 목을 베어냄과 동시에 검을 찬 사내들 역시 거의 동시에 베어버렸다.

“크헉!”

“크아아악!”

“뭐.. 뭐야?”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깜짝 놀라 서후를 바라봤지만 광기에 휩싸인 저들은 저들의 행위에 집중하느라 누가 죽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광기는 광기로 마주해주리라. 무수한 사람을 쳐죽인 항우의 광기가 서후의 몸을 통해 재현되었다.

서후는 제단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 자들은 그게 누구라도 모조리 살육해버렸다.

촤아아악

크아아악

아아악

난잡한 쾌락에 물들어있던 공간이 지독한 두려움으로 바뀌는 것은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부랴부랴 사제복을 걸치고 나타난 자들이 있었다. 바알과 타니트의 사제들이었다.

바알은 남신이고 타니트는 여신이다. 그러나 사제들은 두신 모두 남녀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제사법은 인신공희뿐만 아니라 난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이걸 통해 신과 교접한다고 여겼다.

바알과 타니트 사제들의 난교는 두 신의 결합을 뜻했고 이는 가나안에서 비롯한 페니키아인들과 이 지역 토속민들의 결합을 뜻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제들과 난교하며 자신들도 신의 속성, 풍요나 여신의 총애 등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카르타고인들은 자신의 첫 아이를 제물로 바쳐서 신의 은총을 구하기도 했다. 끔찍한 일이지만 이들에겐 일상에 불과했다.

“무엄한 놈! 감히 신께 제사를 드리는데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네 손은 마르고 네 다리는 비틀어지며 네 육신과 영혼은 영원히 어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알과 타니트의 진노가 두렵지도 않더냐? 감히 신성한 제사를 드리는데!”

서후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왜 그 신들은 어린아이만 받고 너희 같은 자들은 안 받나 보지?”

“뭣이라?”

서후는 소머리의 형상에 거대한 남근을 지닌 바알과 초승달인지 그믐달인지 아무튼 누운 달의 형태를 머리에 가지고 있는 관능적인 타니트 여신의 우상을 바라봤다.

그리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알과 타니트의 사제들을 무참하게 도륙했다.

크아아악

으아악

저들은 서슬 퍼런 서후의 기세로 놀라 황급히 그를 피해 제단 밑으로 도망쳤다.

콰직 콰직 콰직

서후는 두 개의 검으로 바알과 타니트의 우상을 사정없이 부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두려운 가운데서도 서후의 행동을 멍하니 쳐다봤다. 사제를 살육한 것으로도 모자라 신상을 부수다니! 미친 짓도 도가 지나쳤다. 저자는 신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이것들도 신이라면 몇 번이고 죽여주지. 몇 번이고 말이다.”

콰직

그리곤 신상을 밟고 올라가 바알과 타니트의 목을 쳐버렸다.

쿠당탕탕탕

나무로 이루어진 육중한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하게 울리자 사람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피투성이가 된 서후를 바라봤다. 미친놈이다. 저 미친놈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바알과 타니트의 진노가 자신들에게 임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보다도 저 미친놈의 칼이 언제 자신의 목을 베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

“미친..”

수하들의 보고에 적이 쳐들어온 것으로 생각하고 급히 병력을 이끌고 토페트에 왔더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시.. 신상이.. 바알과 타니트의 신상이?”

다른 수하가 토페트에 일어난 참상에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카르타고 그림자회의 총 두목인 히밀코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보고를 한 수하를 바라봤다.

“적들이 쳐들어 왔다고 하지 않았냐?”

“그.. 그랬습니다.”

히밀코는 사내의 뺨을 오른손으로 거칠게 잡아챈 다음 토페트가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든 뒤 살벌한 어조로 말했다.

“눈까리가 제대로 박혀있으면 봐라. 저게 적들이냐? 내 눈에는 핏덩어리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데?”

“하.. 하지만 보.. 보.. 보십시오.”

히밀코는 그제야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소년 하나밖에 없는데 죽은 자가 너무 많았다. 순간 함정인가라는 생각에 보고를 한 수하를 노려봤지만 놈의 눈에선 두려움밖에 읽을 수 없었다. 히밀코는 거칠게 바닥으로 수하를 밀쳐버린 뒤 다른 수하에게 명령했다.

“병력을 퍼트려서 주변에 매복한 병력이 있는지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온다.”

*

나디르는 배 위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대.. 대장! 대장!”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내가 나디르의 달콤한 낮잠을 방해했다. 나디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뜨기 무섭게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크..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나디르는 일순간 짜증이 올라왔지만 억누르고 사내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차근하게 말해봐라.”

“그.. 그게.”

나디르의 눈빛이 사나워지자 사내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대장이 데려온 소년 있지 않습니까?”

“테세우스?”

“예. 예.”

“테세우스는 갑자기 왜? 설마.. 죽은 거냐?”

“그.. 그게 아니라.. 하아. 테세우스가 토페트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림자회의 히밀코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직접 보셔야.. 아니 서둘러 출항해야 합니다.”

로마인들은 안전한 우티카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병력들도 대부분 우티카에 밀집되어 있다. 따라서 그림자회 총두목인 히밀코는 숨어있는 카르타고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카르타고와 마찬가지로 우티카 역시 푸뉘쿠스, 즉 페니키아인이 상류층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히밀코 역시 페니키아인이라 우티카와도 은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런 그와 척을 지면 이곳 카르타고는 물론 우티카에서도 활동하기 어려워진다.

하여 나디르는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직접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직접 확인해야겠다.”

“직접 확인할 것도 없이..”

나디르가 말없이 호들갑을 떠는 사내를 바라보자 그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안내해라.”

*

서후는 무장한 사내들이 사방이 둘러싸는 것을 확인했다. 옷을 주섬주섬 입은 자들 역시 그들과 합류하자 그 수가 족히 수백은 넘어 보였다.

그때 다른 사람들보다 우람한 몸집을 지닌 사내가 조금 앞으로 나와서 제단 위에 선 서후에게 말했다.

“이 핏덩어리 새끼야. 네놈이 지금 무슨 일을 했는지.. 아니 아니 그러니까 네놈 새끼가 지금 누구를 건드렸는지 알고 있냐?”

신상이야 제단이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이 일은 자신의 이름 아래 일어나던 행사였다. 그 행사를 무참하게 파괴했으니 반드시 이 일을 처벌해야만 자신의 권위가 산다. 그럼에도 당장 놈을 잡아 족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는 건, 놈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히밀코의 살기 어린 말에 서후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네가 이 일의 책임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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