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37화 (37/298)

# 37

37. 슬링(sling).

37. 슬링(sling).

해적무리 가운데 소년이라.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불명예스러워 그 이유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저 소년이 자신의 생각대로 동성애를 위해 해적무리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같은 공간에 자리할 가치조차 없다.

로마인들에게 동성애에 대한 선입견은 없는 편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과 무슨 짓을 하든 그건 추문 거리가 될 수 없다. 동성애 역시 마찬가지.

다만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에 놓인 자들은 파티쿠스(타락한 자)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혹 로마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투표를 할 수 없고 스스로 재판에 나설 수도 없다. 법적으로도 다른 신분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다.

바로 그렇기에 세르토리우스는 소년이 해적무리에 있는 연유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친 해적들 가운데 예쁘장한 소년이라니. 뽀송뽀송한 애송이들보다는 해적들이 낫겠지라는 생각 뒤에 그 애송이들보다도 뽀송뽀송한 소년이 눈에 들어오니 황당함에 잠시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런데 소년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처럼 자신을 날카롭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여 세르토리우스는 호기심을 느꼈다. 신을 딱히 믿지는 않았지만 저 소년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가늠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올 운명은 해적과 같은 도적떼나 파티쿠스와 같은 운명뿐인지 아니면 다른 운명이 놓여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며 세르토리우스는 자신이 많이 지쳤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예전이라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르토리우스는 이리저리 분주한 가운데 병사에 의해 자신 앞에 불려온 서후를 바라봤다. 호기심에서라지만 괜한 추문에 얽히기는 또 싫었던 세르토리우스이기에 병사를 시켜 조용히 서후를 불러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테세우스라고 합니다.”

“테세우스? 그리스의 영웅이로군. 영웅의 이름은 영웅에게 가야 할 것인데.. 글쎄. 너는 영웅인가?”

서후는 세르토리우스의 발언에서 그가 무엇을 의심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망할. 어딜 가든 자신을 동성애자로 보고 있다. 나디르의 선원이 아닌 다른 해적들의 눈초리도 눈앞의 이 자, 세르토리우스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굳이 그것을 해명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쓰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온다면 해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부끄럽게 행동한 적은 없습니다.”

“뭐. 네 의사와는 관계없었다는 뜻인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 이 이야기는 이쯤 하지.”

서후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다시 말했다. 더 오해가 일어나지 않게끔 이번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송구하지만 짚고 가야겠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부끄러움을 전가하거나 제 몸에 가져올 생각은 없습니다.”

능동적으로 한 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수동적으로 임한 자에게만 모든 책임을 묻는다? 참으로 이기적이고 편리한 관습법이 아닌가?

허. 이것 봐라? 세르토리우스는 남은 오른눈을 좁히며 서후를 바라봤다.

“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테고.. 테세우스. 너는 왜 이곳에 와 있나? 그리고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군.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 같은 소년이 어떻게 해적무리에 속해 있지?”

욕망을 위해 살인까지도 불사하는 자들이 도적이다. 앞서 말한 이유들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해적들과 함께하고 있단 말인가? 둘 중 하나다. 소년이 거짓을 고하고 있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있거나.

“누명을 썼습니다. 도망치다 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누명? 네 나이에 누명을 쓸만한 일이 뭐가 있지? 그리고 도망이라.. 누명의 내용이 뭐지?”

“데메트리우스라는 자가 제게 백 아우레우스를 훔쳤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백 아우레우스? 소년이 얻을 수 있는 금액의 수준이 아니다. 금액만을 생각할 때는 누명이 아니라 여겨졌지만 소년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진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 소년을 통해 자신의 앞날을 가늠해보기로 하지 않았던가? 진실 같은 거짓이 찾아올 것인지 예상치 못할 일들이 펼쳐질 것인지 심히 궁금해졌다.

“좀 더 자세히. 지금 내용만 봐선 누명이 아니라 사실로 보이는군.”

서후는 그간 자신에게 일어난 일 전부를 가감 없이 세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세르토리우스가 믿든 안 믿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선 어차피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가 실권을 잡게 되면 그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데메트리우스가 바다에서 표류하던 저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검투장에서 싸울 것을 제안했죠. 넵투누스의 화를 피하기 위해서 넵투누스 축제 때 벌어지는 검투장으로 보낸다고 했지만 제가 보기엔 본인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서였습니다. 단 세 번. 단 세 번만 싸우면 된다는 계약 아래 저는 자유민으로 검투장에서 싸웠습니다. 한 번은 표범과 싸웠고 마지막 한 번은 사자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루디스를 받았습니다. 두 번 만에 받은 이유는 데메트리우스가 사자와 싸우면 모든 계약이 종결된다고 제안했고 저는 데메트리우스가 제게 주기로 한 돈을 제게 걸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싸우고 이기고 풀려났습니다. 백 아우레우스는 정당한 거래의 대가였습니다. 데메트리우스의 악의를 느꼈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저의 목숨을 구한 장본인이기도 하니까요.”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서후의 입에서 흘러나왔음에도 그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하던 세르토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시 그가 네게 누명을 씌웠다?”

“그렇습니다. 폼페이의 야경꾼들이 저를 수색하고자 폼페이 곳곳을 뒤졌고 저는 몸을 피하기 위해 나디르라는 해적에게 백 아우레우스를 대가로 피신시켜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누구도 저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더욱이 데메트리우스 그는 술라의 해방노예로 보이는 상황이니..”

“아아. 데메트리우스.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내가 기억하는 자가 맞다면 그는 술라 밑에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놈이었지. 공교롭군. 참으로 공교로워.”

서후는 세르토리우스를 직시하며 반문했다.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소년의 몸으로 표범과 사자를 잡은 일? 믿기 힘든 일이지만 믿지 못할 것도 없지. 이곳 짐네시안 부족민들만 봐도 돌멩이 하나로 곰도 때려잡는 마당에.”

짐네시안 부족의 여인들은 아이가 슬링으로 목표한 지점을 맞추지 못하면 밥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의 부족들은 모두가 슬링의 달인이었다.

가죽이나 천에 돌멩이를 넣고 붕붕 돌리다가 그 원심력으로 휙 던지는 슬링의 위력은 갑옷을 입었어도 그 충격을 완화할 수 없었다. 맞으면 무조건 부러지거나 중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막강한 위력을 지녔다. 어떤 강력한 맹수라도 급소에 슬링을 얻어맞으면 즉사할 수밖에 없는 위력 말이다. 다시 말해 곰을 때려잡는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세르토리우스가 이곳 마이오리카를 점령한 두 번째 목적, 바로 짐네시안 부족민들을 부대원으로 소집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네 눈빛이 맑군. 내 남은 오른눈마저 썩은 눈깔이 된 것이 아니라면 네 눈빛은 거짓을 말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다.”

이렇게 쉬이 자신의 말을 믿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서후는 말없이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건가? 해적이 되기는 싫고 그렇다고 로마에 대적하기는 싫고 로마의 영향력을 벗어난 곳에서 살기엔 너무 막막하고. 맞나?”

자신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짚어오자 서후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세르토리우스는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 것인지 갑자기 대소를 터트렸다.

“비슷하군. 비슷해. 하하하하하.”

이 소년의 마음은 곧 자신의 마음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술라에 의해 로마의 반역자로 몰리긴 했으나 도적떼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이 그간 쌓은 명예와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로마를 적대하고 로마를 전복시키기엔 그는 로마를 사랑했다. 타국을 떠나 사는 것도 탐탁지 않다. 도시에서 살던 자가 아무것도 없는 오지에 들어가 살 수 있을까? 세르토리우스가 느끼는 거부감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이름이 테세우스라면 그리스인일 것이다. 그러니 로마를 떠나 산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겠지. 게다가 주적도 어떤 면에서 동일했다. 자신은 술라가 적이고 이 소년은 그의 해방노예인 데메트리우스가 적이다. 이것이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인가?

세르토리우스는 서후가 매우 기꺼웠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왔겠지만 자신에게 희소식을 가져온 전령이나 다름없었다.

술라는 적이 많다. 포기하지 않고 살아 있으면 그들을 규합하여 술라를 거꾸러뜨리는 날이 올 것이다. 세르토리우스는 서후를 통해 그것을 확신했다. 이 어린 소년도 술라의 적으로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역시 술라의 적인 자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 말이다.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무엇이든 맡겨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서후의 그런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운이 좋았든 어쨌든 간에 네가 표범과 사자를 창이나 검으로 죽였다면 네 또래 수준보다는 월등한 실력을 지녔겠지. 하지만 네 신장은 성인들보다 월등하게 왜소하고 네 힘 역시 마찬가지다. 고로 대열을 유지하고 방패를 들 수 없는 너는 군단에 아무 쓸모가 없다. 병사의 조건으로 17살 이상인 자를 뽑는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한데 넌 10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군.”

대열이 무너지면 끝장이다. 개개인의 용맹도 중요하지만 로마군이 가장 중요시하는 건 군의 체계다. 그 체계를 통해 자신들보다 몸집이 크고 강력한 야만족들마저 무참하게 패배시켰다. 소년의 몸은 그 체계를 받아들이고 유지하기에 결코 적합한 신체가 아니다. 이런 자가 군단에 합류한다면 오히려 대열을 무너뜨리고 종국엔 모든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서후는 말없이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봤다. 이미 자신의 힘이 일반 성인보다 강력하고 수백의 적을 상대로도 그들의 대장을 사로잡을 정도의 용맹마저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오히려 허풍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할 여지가 훨씬 높았고 그건 오히려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로 다가올 것이라 여겼다. 또한 세르토리우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과 달리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에는 호의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어린 만큼 습득력도 뛰어날 터, 혹시 말을 탈 줄은 아나?”

왜 아니겠는가? 항우는 기마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의 경험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서후 역시 마찬가지. 서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리스인들이 기마술에 뛰어났던가?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무엇보다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탈 줄 안다라.. 기마술의 숙련 여부에 따라 전장에 나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군. 하지만 현재는 말 한 마리 없는 상황이니 음. 슬링은 사용할 줄 아나?”

항우와 리처드도 슬링을 사용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배우고자 하면 못 배울 것도 없었다.

“사용할 줄 모르지만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곧 짐네시안 부족들을 합류시킬 예정이다. 그들이 합류하면 그들에게 슬링의 사용법을 배워라. 테세우스. 너를 믿어도 되겠나?”

데메트리우스가 호의를 베푼 과거가 있기에 그 악행을 알고도 한 번은 넘어간 소년이다. 당연히 이런 자는 호의를 함부로 저버리지 않는다. 따라서 믿지 못해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확답을 받음과 동시에 서후의 통찰력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에 가까웠다.

“짐네시안.. 예.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하하하하.”

세르토리우스는 기꺼운 표정으로 다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작은 소년이 어떤 바람을 타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할 바람과 함께 왔으니 휘하에 두고 부리기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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