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43. 바람.
43. 바람.
로마에서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적자, 양자 구분이 희미하다.
말한 바 있지만 관습법의 가부장권에 따라 가장은 씨족 구성원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적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가장이 양자를 후계자로 삼으면 거기에 대해 어떤 이견도 가질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적법한 입양절차를 걸친 양자는 후계자로서 모든 권한을 온전하게 인정받는다.
실례로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카이사르, 즉 시저의 양자였고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황제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였다. 이들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많은 양자 황제들 중 대중적인 인물을 뽑은 것에 불과하다.
로마식 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로마는 가문을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문의 이름보다 혈연관계가 중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확실히 다른 문화권에 비해 혈연관계의 중요성이 낮았다.
따라서 로마에서 입양자를 후계자로 삼는 일은 상당히 비일비재했지만(육아비용이 상당했기에 그런 문화가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입양하는 경우는 말 그대로 후계자로 삼기 위한 경우가 많기에 함부로 거론할 문제가 아니었다.
사비누스가 괜히 놀란 표정으로 세르토리우스와 서후를 번갈아 가며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후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고 이런 정황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저 황당한 심정으로 세르토리우스에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세르토리우스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왜? 싫나? 나의 아들이 되면 네가 원한 시민권은 자동적으로 얻는다.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당황한 서후에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서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 이크.”
세르토리우스가 말을 이을 때 집채만한 파도가 그들이 타고 있던 갤리선을 덮쳐들었다. 그 여파로 인해 배가 크게 요동쳤고 당연히 세르토리우스는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서후는 흔들리는 배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배를 꽉 붙들었다. 폭풍우가 갈수록 거세지는데 무저갱 같은 바다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이번엔 넵투누스가 서후를 죽일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바다와는 악연이로군.’
생각해보면 항우도 리처드도 바다와 그렇게 친한 삶은 아니었다. 서후, 본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촤아아악
거대한 파도가 덮치고 배 전체가 물속에 잠기자 이대로 침몰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막연함에 휩싸였으나 배에서 들려오는 거센 북소리와 고함이 그 의심을 산산이 깨뜨렸다.
둥둥둥둥
“저어! 계속 저어라! 이 새끼들아! 죽기 싫으면 계속 저어!”
둥둥둥둥
노잡이들을 격려하는 북소리에 맞춰 필사적으로 노를 젓는 노잡이들의 모습이 서후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서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지랄 맞은 폭풍을 무사히 지나가길 염원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천하가 좁다 하며 이곳저곳을 정복하나 현상에 불과한 폭풍조차 이기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니..’
전쟁에선 패배했을지 모르나 전투에선 승리했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영광과 고난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고 성공과 실패도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주체가 되는 인간은 100년도 채 살지 못한다.
서후는 흉흉한 기세로 몰려오는 폭풍 앞에 두려움보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
수직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튜니카를 입고 테두리에 넓은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크림색 토가를 걸친 두 명의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의 형태는 토가 프라에텍스타로 그 둘은 현 로마의 집정관들로 보였다. 바로 술라와 메텔루스 말이다.
“그래서 그 애송이가 나를 모욕하고 도망가게끔 내버려 뒀다?”
“방금도 언급하셨지만 그는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애송이 말입니다.”
“그럼 죽이지 그랬나?”
“시민들의 이목이 그에게 쏠려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자신의 영광을 챙기기도 전에 꽁지 빠져라 도망쳤으니 술라님의 권위를 무시할 자는 여전히 없습니다. 당장은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영리한 놈이군. 영리한 놈이야. 내 이름에 먹칠한 그 무례한 놈의 이름이 뭐라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그게 그 변호사의 이름입니다.”
괜한 짓을 벌여 자신의 이름에 먹칠한 크리소고누스는 곰치 연못에 던져 죽여 버렸다. 자신의 해방노예라고는 하나 해방노예인 이상 함부로 죽이면 곤란해 지지만 그는 술라다.
마리우스 일파를 쳐부수고 로마의 전권을 장악한 뒤 시민들마저 범죄자로 몰아 무참히 죽여버린 잔혹한 통치자. 그런 그가 범죄자로 분류된 자신의 해방노예를 죽이는 일에 딴죽을 걸 수 있는 간 큰 로마인은 없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라.”
후 불면 날아갈 솜털 따위에 불과하나 자신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셈이니 기억해야 할 이름 중 하나였다. 미약한 바람이라 할지라도 때를 잘 만나면 폭풍이 되기도 하는 법, 술라는 키케로의 이름을 머리에 새겨넣었다.
실제로 자신의 시작도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삼천 세스테르티우스 하던 3층 방에, 그것도 세들어 살며 천한 무희와 광대와 어울리며 시대를 한탄하며 방탕하게 보내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물론 지금도 술에 취하면 그 시절의 버릇이 나오긴 한다.
어쨌든 현재 로마를 쥐락펴락하는 건 명성이 자자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일로 유명한 몰락가문의 방탕자에 불과했던 술라 자신이다.
수치스러운 일이란 그의 조상 중 루피누스라는 집정관이 당시 법에 금지된 4.6kg이상으로 만든 은식기를 소유함으로 지위를 박탈당한 일을 말한다. 그로 인해 가세가 무너졌고 결국 술라는 셋방이나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술라는 젊은 시절 그 점이 항상 불만이었다. 고작 은식기가 문제가 돼? 금식기로 도배한 돼지들이 두룩두룩한 세상이 아닌가? 하여 이 자리에 오른 뒤에는 보란 듯이 재물로 온 집안을 도배했고 저들의 재물을 가차 없이 빼앗았다.
술라는 차가운 눈빛으로 메텔루스 피우스를 바라봤다.
“뭐. 그 일은 후에 처리하면 될 일이고. 놈은 어찌 되었나?”
“율리우스 카이사르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그놈을 놓아주기는 했지만 카이사르 그놈 안에는 수백 명의 마리우스가 도사리고 있다. 놈은 반드시 죽어야 해.”
“하지만 현재는 별다른 명분이 없습니다. 단 카이사르가 로마로 돌아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 휘하에서 참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누키우스 총독은 레스보스 섬을 공략한다고 로마에 알려왔으니 아마 그 공략전에 함께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그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제거하고자 아시아 총독과 척을 지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러니 이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후환이 될 싹들이 많았다. 때문에 술라는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히스파니아의 세르토리우스는?”
“카이우스 안니우스가 피레네 산맥에서 세르토리우스군을 격파하고 히스파니아를 장악했다는 보고가 도착했습니다.”
“의외로군. 벌써 세르토리우스를?”
“내분이 있었다는군요. 패퇴한 세르토리우스를 추격 중이라 보고되긴 했는데 진행사항은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술라는 눈매를 좁히며 메텔루스에게 말했다.
“흐음. 그래? 후속 보고가 올라오는 대로 그에게 로마로 돌아오라고 해.”
“으음..”
술라의 저의를 알지 못해 침음을 뱉었지만 메텔루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헌법 개혁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정무관의 수를 늘렸고 새로 선출되는 쿠에스토르(quaestor, 재무관)들은 자동으로 원로원에 입성할 수 있게끔 토의했으며 원로원 의원들의 규모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리는데 동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프라에토르(praetor, 법무관)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에 역시 모두 동의했으니 법안을 발의하면 모두 통과될 것입니다. 플레비안 의회(평민의회)을 개혁함으로 트리뷴(Tribune, 호민관)들의 입법 권한을 무효화시켰고 전직 트리뷴들은 다른 관직에 나아갈 수 없게끔 금하는 법안도 마련했으니 능력 있고 야심 있는 자들은 더 이상 트리뷴에 입후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천한 생활을 하긴 했으나 술라는 뼛속까지 귀족이었다.
현 로마가 공화정이라고는 하나 현대의 민주제가 아니라 소수의 권력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과두제에 가까웠고 그 소수집단은 바로 로마의 귀족가문들이었다.
그것에 반발하여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면서 형성된 것이 평민의회와 평민을 대변하는 호민관들이었다.
뼛속까지 귀족인 술라는 당연히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호민관들과 평민의회를 멸시하고 미워했다. 이 같은 법안은 합헌적이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키기 위해 헌법을 개헌하고자 하고 있었다.
정무관의 수가 늘어나면 결국 모든 정무관들의 권한이 약해진다. 특히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 법무관의 역할은 꽤 강력한데 이 법무관의 수마저 늘린 것은 결국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원로원의 중요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술라의 책략이었다.
게다가 이번 법안이 통과되면 호민관은 사실상 원로원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호민관 위에 오른 자는 어떤 관직에도 나갈 수 없게 되었으니 똑똑하고 능력 있는 자들은 호민관에 입후보하지도 않을 터, 이로써 원로원의 행사에 걸림돌이 될만한 장애물은 모조리 치워진다.
“이번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또한 있어도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 같은 법안을 귀족들이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그럴 만한 자들을 모조리 숙청한 뒤이니 혹 있어도 감히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당장 입후보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아진다는 소리인데 그걸 누가 반대하겠는가? 권한이 약해지는 건 법안이 통과된 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러니 눈앞의 달콤한 미끼에만 정신이 팔린 저들이 후에 일어날 일까지 고려할 리가 없었다.
그제야 술라는 흉흉한 기세를 지우고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메텔루스에게 말했다.
“이제야 좀 안심할 수 있겠군. 로마의 공화정은 이 법안으로 탄탄대로를 걸을 걸세.”
“물론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의 용맹한 사위는 어찌하고 있나?”
독재관에 오른 술라는 폼페이우스의 뛰어난 용기와 힘에 감탄해 반드시 자신의 품에 안고 싶었다. 그건 그의 아내 메텔라도 마찬가지였기에 안팎으로 폼페이우스를 흔들어 그의 아내 안티스티아와 이혼시키고 자신들의 딸 아이밀리아와 결혼시켰다.
심지어 아이밀리아는 메텔라의 전 남편 스카우루스 사이에서 난 딸이고 아이밀리아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 아이까지 배고 있었다. 실로 몰상식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야심을 위해 술라는 밀어붙였고 결국 결혼을 성사시켰다. 어쨌든 그래서 술라가 폼페이우스를 사위로 부르는 것이었다.
“시칠리아의 반군을 처리하고 아프리카로 도망친 도미티우스를 상대하고 있을 겁니다.”
“역시 믿음직스럽군. 좋아. 아주 좋아. 원로원으로 가지. 더 머뭇거릴 것 없이 이대로 일을 마무리 짓자고.”
“알겠습니다.”
흥분으로 술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얼굴의 곰보가 유난히 더 도드라져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