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45화 (45/298)

# 45

45. 바람.

45.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일을 위해선 보다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서후의 차분한 어조에 세르토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비누스에게 물었다.

“이 근방에 도시라면 팅기스(Tingis, 탠지어)와 릭서스(Lixus)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마우레타니아 서쪽 해안선의 도시가 그렇고 동쪽으로는 아비라(Abyla), 타무다(Tamuda), 루사디르(Rusadir) 정도입니다. 타무다를 제외하고는 과거 푸뉘쿠스인들이 세운 도시로 알고 있습니다. 타무다는 과거 이 지역 무어인들이 세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이 지역의 수도가 팅기스였나?”

“예. 맞습니다.”

사비누스에 대답에 세르토리우스는 턱을 매만지며 서후를 바라봤다.

“섣불리 공격부터 할 것이 아니라 아스칼리스가 주둔한 지역과 마스타네소스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부터 알아내야겠군. 테세우스 네 말은 정탐꾼부터 보내자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잠시 사비누스와 눈을 마주친 뒤 서후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네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나?”

“이 지역을 잘 아는 자와 함께라면 해낼 수 있습니다.”

팅기스는 해안도시이니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서후의 겉모습은 소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정탐꾼으로 활약하기에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세르토리우스가 말을 꺼낸 것이기도 했다.

‘일단 경계가 극심한지 아닌지 그리고 저들의 병력을 파악해서 승산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내 눈으로 직접보고 판단하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하다.’

“이 지역을 잘 아는 자라면 사비누스, 자네가 함께.”

“아닙니다. 프레펙투스 사비누스는 아버지와 함께 군을 이끌어야 합니다. 협상이 목적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정탐이 목적인 이상 과한 인사입니다.”

서후의 말에 곁에 있던 사비누스는 기묘한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이 아이가 소년이 맞긴 하단 말인가? 마치 그런 눈빛이었다.

세르토리우스는 흡족한 미소를 미미하게 지으며 서후에게 반문했다.

“그럼?”

“제가 알고 있는 나디르라는 자가 이 지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와 함께 정탐하겠습니다. 게다가 그는 킬리키아인이라 정탐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확실히 지역 특성상 로마인이 도시를 활보하는 것보다야 킬리키아인이 이목을 훨씬 덜 살 것이다.

“나디르?”

알다시피 대부분의 해적들이 세르토리우스를 떠났지만 떠나지 않은 해적들이 있었고 그 해적들 가운데 많은 수가 나디르가 이끄는 해적들이었다. 물론 나디르 휘하의 해적들도 후사르를 따라 떠난 자들이 꽤 많았다. 갑판장 도케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저들이 배를 버리고 다른 해적들을 따라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전투와 폭풍 등으로 다른 배의 선원이 그만큼 줄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도 그 이유지만 저들은 약탈과 살육을 즐기는 자들이다. 세르토리우스와 잠시나마 함께하며 그의 성향을 파악했기에 그와 함께해서는 약탈과 살육을 함부로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후사인과 함께 떠난 것이었다.

당연히 생소한 이름에 세르토리우스가 반문했지만 그에 대해 더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건 서후를 신뢰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알겠다. 대신 너와 함께 싸웠던 센튜리온 호라티우스를 붙여주겠다.”

백부장 호라티우스라면 충분히 뒤를 맡길 수 있는 매우 든든한 장수였다. 곁에서 같이 싸웠기에 다른 자들보다 더 친밀하기도 했다. 정탐과 같은 긴밀한 임무를 하기에 적합한 동료였다. 따라서 서후는 군례를 표하며 세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

세르토리우스가 이끄는 선단은 야음을 틈타 팅기스와 릭서스가 위치한 중간 지점에 정박했다. 당연히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로마군이 이 지역에 정박했다는 정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저들에게 이곳의 소식이 도달하기 전에 서둘러 정탐을 마쳐야 했다.

두두두두

“케이프 스파르텔이라 불리는 고지대는 사비누스 프레펙투스가 이끄는 병사들이 점령할 거다. 그러니 이대로 우리는 계속 달린다.”

호라티우스의 말에 서후와 나디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았다.

세르토리우스군이 상륙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이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케이프 스파르텔 지역에 위치한 경계병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케이프 스파르텔은 이 지역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고지대였기에 이미 자신들을 발견했거나 발견할 여지가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이들이 어느 편이든 일단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스칼리스군이라면 죽이고 마스타네소스군이라면 구금하겠지만 상황을 보니 저들은 아스칼리스군일 확률이 높고 어느 편이든 아군의 안전을 위해 제거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서후 등이 타고 있는 말은 누미디아산 말이었다. 말이 다른 지역보다 조금 작기는 하지만 그만큼 빠르고 날쌘 말들이었다. 급박한 상황에 말장수에게 말을 구매한 건 아니고 해안경계를 서고 있던 자들을 급습하고 빼앗은 말이었다.

이 해안경계를 서고 있는 자들은 적과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적의 침투를 알리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당연히 세르토리우스군을 발견하고 도망치려 했으나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얻어맞고 그대로 즉사했다.

파로가 이끄는 짐네시아인들로 구성된 투석용병의 위력이었다. 용병으로 고용된 만큼 당연히 이들도 세르토리우스 곁에 남았다.

빠르게 말을 달린 서후 등은 결국 팅기스를 앞에 두고 말을 멈춰 세웠다. 그제야 나디르가 서후를 바라보며 감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을 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들보다도 능숙하군.”

안장도 등자도 없는 시절이다. 맨몸으로 빠른 말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소리니 단순히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후는 누구보다 능숙하게 말을 다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우 시절에도 등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 항우는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고. 더 말해 무엇하랴?

호라티우스도 혀를 내두르며 서후에게 말했다.

“테세우스. 넌 여러모로 놀라운 소년이다. 내 상관이 되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세르토리우스가 언급한 트리뷰누스 라티클라비우스의 직함이 거창하긴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서후는 임시직으로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아직 호라티우스의 상관은 아닌 셈이었다. 서후도 지금은 이게 편했다. 권한이 많아진다는 건 곧 책임도 막중해진다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서후도 전처럼 호라티우스를 대할 때 예를 갖추지는 않았고 편하게 대했다. 어쨌든 서후가 이 일행의 책임자였고 이제 그는 세르토리우스 아들의 신분을 지녔다.

“경계가 제법 삼엄하군.”

“더 자세한 건 도시 안으로 들어가 봐야 알 수 있다.”

호라티우스의 대답에 나디르가 말을 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도시에 들어가면 되겠지. 그나저나 테세우스, 어쩔 생각이지?”

그간 서후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나디르는 단순히 서후가 정탐을 목적으로 온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서후는 해안선을 따라 납작납작한 형태로 지어진 황토색의 건물들을 바라봤다. 역시 황토색의 성벽이 있긴 했지만 적을 막기에 용이한 구조가 아니었다. 그건 공성 시에는 이점이 되지만 수성 시에는 단점이 된다.

“일단 도시에 입성하면 팅기스의 항구부터 확인한다.”

“항구를?”

병영이나 성벽, 병사들의 경계배치나 병력 규모 등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항구부터 확인한다고? 하다못해 이 지역의 생생한 소식을 얻기 위해서라면 선술집에라도 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긴 선술집은 항구 가까이에 자리하긴 했다.

하지만 서후의 발언은 선술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라티우스는 의구심을 가지고 서후를 바라봤다.

“그곳에 후사인의 선단이 정박해있는지 확인한다.”

나디르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잠깐. 잠깐만. 아스칼리스의 병력도 아니고 후사인의 선단은 확인해서 대체 뭘 어쩌려고?”

도무지 서후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이곳이 수도라고 해서 경계가 막중할 줄 알았는데.. 아무리 봐도 수성에 용이한 지역으로 보이지는 않는군.”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나디르와 호라티우스는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후사인의 선단이 이곳에 있는 것만 확인된다면 더 알아볼 것도 없이 이곳은 아스칼리스의 영역이다. 또한 이곳이 아스칼리스의 도시가 맞다고 해도 수성이 어려운 만큼 팅기스엔 아스칼리스가 없을 확률이 높다. 그건 곧 도시의 경계가 그만큼 약하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한 가지 사실만 확인하면 도시를 점령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파악할 수 있다.”

“허어..”

탄식을 터트리는 호라티우스와 달리 나디르는 눈매를 좁히며 서후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게 전부인가?”

“아스칼리스가 이 도시에 없다면 후사인은 아직 그들과 결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탁했더라도 견고한 동맹을 맺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스칼리스가 있다고 해도 후사인은 저들과 견고한 동맹을 맺을 수 없다. 해적이란 신분이 가진 한계성 때문이지.”

“그.. 그래서?”

“우리는 그 동맹을 파기시킨다.”

그 말에 호라티우스가 멍한 눈빛으로 서후에게 말했다.

“잠깐만! 지금 뭘 할 생각이라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했으면 그걸 알리는 게 우선이다. 게다가 테세우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는 고작 세 명이다.”

“세 명이라 할지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진 않다. 또한 그 소식을 알리는 건 우리가 아니라도 할 사람들이 있겠지.”

“뭐?”

호라티우스가 황당함에 더 말을 잇지 못하자 나디르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우리 일행의 결정권은 네게 있으니... 다만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할 것이며 그게 어떤 결과를 자아내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후는 저 멀리 팅기스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

얼굴을 천으로 가린 나디르가 서후에게 작게 속삭였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나디르처럼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가린 경우가 꽤 있었기에 크게 눈에 띄는 행색은 아니었다.

“해적들이다. 우리와 함께했던. 너도 모를 수가 없겠군.”

서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는 얼굴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갑판장 도케인이 웃음을 지으며 해적들과 북적거리는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항구도 아니고 서후 등이 항구로 향하는 길 위에서 저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라티우스 역시 작게 서후에게 말했다.

“이제 어쩔 생각이지?”

“말한 대로 움직인다. 호라티우스. 당신은 마스타네소스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찾는다. 분명 첩자들이 곳곳에 숨어있을 것이다. 마스타네소스에게 명분이 있는 이상, 그들과 소식이 닿아있는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서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나보고 선술집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어라?”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다.”

나디르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칼끝 위에서 술을 마시는 기분일 테니 나라면 취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로마군인 걸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만큼 안전하겠지만.”

서후가 말을 덧붙이자 호라티우스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그만. 나는 로마인이다. 더욱이 자랑스런 레기온의 센튜리온 말이다. 죽음이 두려워 로마인인 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건 곧 내게 치욕이다. 무엇보다 내가 로마인인 것을 드러내야 저들이 먼저 다가올 것이라 하지 않았나?”

꼭 마스타네소스쪽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스칼리스의 사람들이 호라티우스에게 다가올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가 선술집에서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선별할지는 모두 호라티우스 그에게 달렸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호라티우스가 맡은 일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후는 호라티우스의 강한 자부심에 그 부분에 대해 더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들이 다가오거든, 그러니까 그들이 마스타네소스의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한 마디만 전해라. 왕위쟁탈전에 로마는 당신 편에 설 것이고 그 증표로 팅기스를 점령하겠다고.”

호라티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후가 강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레가투스의 이름이 아니라 로마. 기억하고 있다. 다만 조심해라. 테세우스.”

호라티우스가 손을 내밀며 서후에게 말하자 서후 역시 그의 팔을 맞잡으며 말했다.

“호라티우스. 당신도. 하지만 말했다시피 저녁이 될 때까지도 소식이 없다면.”

호라티우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런 뒤 서후는 나디르에게 말했다.

“가자. 나디르.”

나디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라티우스와 눈을 마주쳤다. 호라티우스 역시 강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곧 이들은 복잡한 인파에 휘말려 제각각 어디론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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