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46화 (46/298)

# 46

46. 어둠 속 그림자.

46. 어둠 속 그림자.

팅기스는 수도답게 수많은 물품이 넘쳐났다. 이곳 역시 근방의 해안 도시들이 그렇듯 푸뉘쿠스, 즉 페니키아인들이 기원전 7세기경에 식민지로 삼은 도시였는데 이미 그때부터 이 지역 해상교역의 중심지였으니 당연히 물자가 풍부할 수밖에 없었다.

자홍천, 아마포, 석류석, 산호와 홍옥을 비롯한 물품은 물론 상아와 흑단도 거래되고 있었다. 로마에서 흘러온 것으로 보이는 포도주와 유리제품들도 더러 보였으며 화려한 문양을 새긴 수공예품들도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당연히 항구 저편으로는 노예시장도 서 있었지만 현재 서후와 나디르가 향하는 방향과 동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시장통을 지나가느라 가볍게 몸을 피한 나디르가 서후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적을 손쉽게 무너뜨릴 기회니까.”

“······.”

나디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서후에게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너무 위험하다. 네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너 스스로를 너무 맹신하는 거 아닌가?”

“그럴지도. 어쨌든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나디르는 굳은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그렇기에 한 번 더 말을 꺼내는 거다. 목숨은 하나뿐이다. 설혹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목숨을 걸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더욱이 이 문제는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꼭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문제 아닌가?”

서후는 나디르의 만류에 다시 한번 더 자신의 결정을 되짚어봤다. 자신이 너무 무모하게 나서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리한 상황으로 변화시킬 기회가 있을 때 위험하고 어렵다고 그냥 보내버린다면 결국 그 기회는 적의 손에 들려 자신의 목을 옥죄는 무기로 사용될 확률이 높다. 결국 늦고 빠르고의 문제일 뿐, 나서나 나서지 않으나 위험하긴 매한가지다.

게다가 세르토리우스군의 상황은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이번에 제대로 된 거점을 얻지 못하면 싸우기도 전에 궤멸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사람인 이상 먹고 마실 것들이 필요한데, 지난번 전투 후로 제대로 된 보급품도 얻지 못했고 피티우사 제도에서 얻은 물자는 얼마간 군을 버티게 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니 근거 없이 낙관한 채 ‘어떻게든 되겠지’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절박한 마음으로 바늘구멍이라도 통과해야 할 때였다.

‘승리하기 위해선 실낱같은 기회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알 수 없는 위기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예측할 수 있는 위험에 나를 던지는 것이 낫다. 무엇보다 재차 생각해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그러니 이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말했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나디르는 별수 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사람들을 제치고 한 상인에게 다가갔다. 나디르가 다가가자 풍만한 살집에 비싼 장신구를 치렁치렁 착용하고 있던 상인이 그를 알아봤다.

“나디르!”

“바라카 오랜만이군.”

바라카는 나디르가 팅기스에서 주로 거래하던 상인이었다. 알다시피 그는 폼페이에서는 자세르라는 노예상을, 메노르카의 마고바르카에서는 바짐이라는 상인과 거래를 트고 있었다. 서후는 그 기억을 토대로 이곳 팅기스에도 나디르가 거래하던 상인이 있을 거라 꿰뚫어 봤고 예상대로 나디르는 이곳에서도 거래를 트고 지내는 상인이 있었다. 바로 그가 눈앞의 바라카라는 상인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자도 킬리키아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역 특색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다시 말해 무어인에 가까운 복색을 하고 있어서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쯔. 보이지 않기에 역시 자네다운 행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야. 듣기로 자네는 세르토리우스와 함께 남았다고 들었는데 자네마저 이곳에 왔다면 그는 정말 가망이 없는 모양이군.”

“도케인에게 들었나?”

“맞아. 자네의 배를 떠났다고 하더군. 어떻게 된 건가? 듣기로 후사인 쪽에 가담했던데 자네는 메노르카가 주요근거지 아니었나?”

후사인은 에부수스를 휘어잡고 있는 해적이었다. 그러니 도케인과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나디르는 가볍게 일축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일 아닌가?”

“하긴 뭐.”

“장사는 여전한가?”

“내전이 벌어지고 여러 차례 격돌이 일어나긴 했지만 아스칼리스든 마스타네소스든 팅기스의 경제가 무너지는 걸 원치 않으니 큰 차이는 없네. 다른 도시가 전화에 휩싸인 격이라 오히려 이곳은 호황이지.”

“그렇군.”

“내 안부나 물으려고 나를 찾아온 것 같지는 않고 용건부터 말해봐.”

“이곳에서 말하긴 조금 그렇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니 확실히 기밀한 이야기를 꺼내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흠. 안으로 따라오게.”

바라카는 나디르와 서후를 상점 안쪽으로 안내한 뒤 입을 열었다.

“말해봐. 알고 싶은 게 뭔지.”

“현재 이곳 팅기스를 다스리고 있는 자가 누구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후사인을 무시하는 행동은 신상에 별로 좋지 않을 텐데?”

바라카는 나디르가 후사인을 통하지 않고 이곳의 통치자와 거래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권위를 침해받은 후사인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상륙한 해적의 대표자는 바로 후사인이었으니까. 바라카는 그 부분을 짚어 말한 것이었다.

“염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부탁하지.”

바라카는 나디르의 담담한 모습에 그의 뒤편에 자리한 서후를 힐끗 바라봤다. 도케인이 나디르의 수하들을 데리고 함께 떠난 이상 현재 휘하 수하도 변변찮을 터, 터무니없는 행동을 일으키진 않을 거라 생각되었다. 시종인지 동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위험한 일에 가담하지는 않을 테니..

“익티다르. 아스칼리스가 총애하는 장수 중 한 명이다. 그가 이곳 팅기스의 경계를 맡고 있다.”

“보아하니 해전에 능한 장수겠군.”

“맞아. 이번에 후사인의 합류를 크게 반겼다고 들었다. 또한 꽤 유능하고 용맹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것치고는 성벽의 병사들이나 군대의 규모가 적은 것 같던데?”

“그야 아스칼리스가 군을 이끌고 마스타네소스에게 속한 루사디르를 점령하려 이동했으니까. 후사인의 해적들이 합류한 이상 익티다르도 군을 재편해서 선단을 이끌고 루사디르로 향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 말에 나디르와 서후가 가볍게 눈을 마주쳤다. 나디르는 다시 바라카를 바라보며 그에게 질문했다.

“이번 전쟁은 누가 승리할 거라 보이나?”

바라카는 나디르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쓰읍. 정말 자네답지 않은 모습이로군. 높은 자들의 권력다툼에 끼어들면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바라카.”

나디르가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뱉자 바라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내 예상을 말하라는 거라면 8대2 정도로 아스칼리스가 우세해.”

“그 정도로 차이가 나나? 마스타네소스가 더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마스타네소스에게 줄이라도 서려는 모양인데 일찌감치 마음을 접는 게 좋아. 아스칼리스의 아버지 아프타는 마우레타니아의 용맹한 장수로 명성이 자자해. 사망하기는 했지만 보쿠스 왕 아래에서 로마를 상대로 얼마간 선전했던 장수기도 했어. 그의 아들 아스칼리스도 용맹하기로 이름이 높아. 반면 마스타네소스? 보쿠스왕의 적자라는 것을 빼곤 그에 대해선 뭐 어떤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군.”

“통치자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어쨌든 병사와 장수들이 아스칼리스를 더 선호한다는 뜻이로군.”

“맞아. 외부의 개입이 없는 한 아스칼리스가 승리할 거다. 아직은 그래도 버티고 있지만 루사디르까지 아스칼리스의 손에 넘어가면 그것으로 왕위쟁탈전은 끝났다고 봐야 해.”

“예전부터 마우레타니아는 누미디아와 우방국이었다. 비록 보쿠스 왕이 유구르타를 로마에게 넘기긴 했지만 유구르타는 당시 누미디아 내에서도 축출하고 싶은 여론이 강한 걸로 알고 있고 실제로 보쿠스왕은 그 후로도 누미디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걸로 알고 있다.”

“마스타네소스가 누미디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달라질 거라 말하는 건가? 누미디아도 현재 정신이 없을 걸세.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군.”

“무슨 소문?”

“인간백정으로 유명한 폼페이우스가 도미티우스와 그에게 협력한 히아르바스의 목을 쳐버린 사실을 말이야.”

“더 자세하게 말해보게.”

“히아르바스는 대략 1년 전쯤 반란을 일으켜 누미디아를 장악한 자다. 그는 로마의 반란군 도미티우스와 친분이 있었고 그와 협력해 로마에 대항했는데 폼페이우스가 그 둘을 그대로 썰어버리고 동부는 히엠프살 2세에게 서부는 마시니사 2세에게 주어 다스리게 했다는군. 내부적으로도 안정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 마스타네소스의 도움 요청이 제대로 들어갈지나 모르겠어. 혹 도움을 주게 된다면 서부의 마시니사 2세가 될 텐데 그는 심약한 성품을 가졌다고 들었고 더욱이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셈이니 애초에 타국의 전쟁에 발을 디디려 할지 의문이며 그런 자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야. 더욱이 서부 누미디아는 동부보다 훨씬 작고 힘도 약한 곳이지.”

누미디아의 왕 미킵사 역시 본래는 마나스타발, 굴룻사와 동시 통치자였다. 하지만 그 둘에게 질병이 있어 미킵사 홀로 누미디아를 통치했던 것으로 유구르타는 마나스타발의 아들이었다.

미킵사의 두 아들 아데르발과 히엠프살은 유구르타의 손에 의해 죽었기에 유구르타가 로마로 끌려간 후 누미디아의 왕권은 유구르타의 이복동생 가우다에게 넘어갔고 가우다는 자신의 두 아들 히엠프살 2세에게 동부를, 마스테아바르에게 서부를 다스리게 했다. 그런데 히아르바스가 반란을 일으킬 때 마스테아바르는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마시니사 2세는 바로 이 마스테아바르의 아들이었다.

나디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바라카가 쇄기를 박았다.

“더욱이 아스칼리스는 영리한 자다. 이미 로마에 사신을 보내 왕권을 보장해달라고 공작을 부렸을 거다. 로마의 위세까지 등에 업으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이지. 명분이 마스타네소스에게 있기에 그나마 많이 쳐준 셈이다.”

바라카의 말에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서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더더욱 빨리 움직여야겠군.”

나디르는 그런 서후를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다가 바라카에게 말했다.

“익티다르. 그자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 와서 아스칼리스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니야. 말했지만 후사인이!”

“바라카. 자네의 염려는 알겠지만 일단 대답부터 해 주게.”

“후우.. 그는 주로 병영과 가까운 자신의 집에서 업무를 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자네가 만나고자 해도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자가 아니야.”

‘정보는 충분히 얻었다. 루사디르가 함락되기 전에 팅기스를 얻거나 저들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하기도 전에 패배할 것이고 로마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마우레타니아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놓이고 말 것이다. 그러니 죽인다. 반드시.’

서후는 머릿속에서 떠도는 생각을 정리한 뒤 바라카에게 말했다.

“하지만 만날 방법이 없지는 않겠지. 후사인을 환대했다고 했으니 분명 그쪽으로 방법이 있을 거야.”

“음. 뭐 방법이 없지는 않겠군. 그런데 이 소년은 대체 누군가?”

나디르는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카에게 말했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일단 대답부터 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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