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 어둠 속 그림자.
48.
익티다르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다는 것을 파악한 순간 이미 서후는 그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낼 생각이 없었다.
‘막아내지 않고 흘린다.’
서후는 세밀한 힘의 배분을 통해 익티다르의 균형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건 마치 절묘한 곡예와 같은 기술이었다.
채애앵
익티다르는 서후가 검을 들어 올리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놈이 아무리 날쌔고 뛰어나도 이 공격으로 끝장낼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응? 읏!”
그러나 익티다르는 서후와 검을 마주하는 순간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자신의 검을 막았으니 저항감이 있는 건 당연한 부분인데 통상적으로 검이 부딪쳤을 때 느껴지는 반탄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를테면 그건 마치 물 밖에서 휘두른 검이 물속에 잠겼을 때의 느낌에 가까웠다.
물속에 잠긴 검이 급속하게 그 추진력을 잃으며 멈춰서는 순간, 익티다르는 도리어 자신의 균형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크게 당황했다.
서후는 높이 뜬 공을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어떤 미동도 없이 받아내는 뛰어난 축구선수같이 익티다르의 공격을 받아냈다. 가히 불가능에 가까운 신기였다.
그렇게 익티다르의 체중까지 실린 강맹한 힘을 대부분 죽인 순간, 서후는 익티다르의 오른팔을 잡아당겨 그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와 동시에 왼손에 검을 옮겨 잡고 당긴 방향 그대로 회전하며 무너진 균형을 잡아보려고 힘이 잔뜩 들어간 익티다르의 대퇴부를 끊어냈다.
푸아아악
“크흑!”
날카로운 검이 헤집고 간 익티다르의 대퇴부는 검의 궤적을 따라 사정없이 갈라졌고 시뻘건 피를 폭포수처럼 터트렸다.
“익티다르님!”
파드와가 당황과 분노가 섞인 어조로 익티다르를 부르며 검을 휘둘렀지만 서후는 이미 몸을 피했기에 파드와의 검은 공연히 허공을 갈랐다.
‘목표는 제거한 셈이니 이제는 탈출을 염두에 둔다.’
익티다르는 대퇴부에 중한 상처를 입었을 뿐,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퇴부에는 대동맥이 자리한다. 그 대동맥을 정확하게 끊었기에 서둘러 그것을 잇지 않는 한 과다출혈이나 출혈성 쇼크 등으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 다량의 피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온 것은 바로 대동맥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 완전히 절단된 대동맥을 이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외과 의사가 있을 확률은 희박하며 현대에서도 이 대동맥이 끊어지면 높은 확률로 사망한다. 그러니 익티다르의 상처는 심장이 꿰뚫린 것과 다름없는 치명상이라 할 수 있었다.
한쪽 다리를 완전히 잃은 셈이니 기동력마저 잃은 상황, 여러모로 익티다르는 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으드득. 반드시 죽인다.”
파드와는 맹렬한 살의를 표하며 그에게 쇄도했다. 살의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서후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졌을지도 모를 지경. 하나 서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파드와를 바라봤다.
전장의 광기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은 광기의 주인이 되거나 냉정함을 유지하는 법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광기는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니 마지막 순간까지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만이 전장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도라 할 수 있었다.
서후는 사선으로 베어오는 파드와의 검을 또다시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 흘려낸 뒤 그의 목을 단번에 쳐냈다. 실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냉정함도 잃었으니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과 같았다.
촤아아악
파드와의 머리는 허공으로 치솟았고 그의 육체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털썩
후두둑
서후는 검에 흐르는 피를 바닥을 향해 털어낸 뒤 바닥에 주저앉아 허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익티다르를 바라봤다.
“네놈은 대체 누구냐?”
수많은 질문이 그 짧은 문장 안에 숨어있었다. 하지만 익티다르는 자신의 질문이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말했다.
“나를 죽인 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군. 또한 내 목숨을 거두고자 했다면 직접 거두는 아량 정도는 베풀길 바란다.”
익티다르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렇게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건 치욕스런 죽음이라 여겼다. 생각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바로 그래서였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세르토리우스? 아아. 그런 거였나? 이거 크게 한방 먹었군.”
서후의 대답에 크게 놀라워하던 익티다르는 부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더니 눈을 감았다.
“베라.”
서후는 익티다르의 담담한 모습에 ‘자신이 익티다르였다면?’이라고 자문해봤다. 그건 그와 같은 순간에 이르기 전에는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생각은 많았지만 서후의 행동은 간결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익티다르의 목을 쳤다.
서걱!
*
쾅! 덜커덕.
집무실의 문을 세게 걷어찼지만 문은 무언가에 걸린 듯 반쯤 열리다가 말았다. 문을 막아선 것은 병사들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의 시신 말이다.
나디르의 작품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디르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때 서후의 눈에 나디르의 후위로 은밀하게 이동하는 한 병사가 눈에 들어왔다.
서후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 그 병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쐐에엑
푸우우욱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또 하나의 생명이 꺼졌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손에 검을 나눠 쥔 서후는 현란하게 검을 휘두르며 나디르와 싸우는 병사들의 신체를 사정없이 갈라버렸다.
촤아아악!
으아악!
크하아악!
그렇게 몇 번의 전투 후 나디르와 등을 마주한 서후가 질문했다.
“상황은?”
“보다시피. 그것보다 목표는?”
“제거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백전노장으로 보이는 두 사내를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모두 죽였다고? 나디르는 혀를 내두르며 서후에게 말했다.
“이제 살아남는 일만 남았나? 으차!”
나디르는 자신을 향해 창을 내지르는 병사의 팔을 베어낸 뒤 그를 발로 걷어찼다.
“크허헉!”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는 병사의 모습을 힐끗 바라보던 나디르는 말을 마저 이었다.
“이래서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서후는 나디르의 말에 별 대답 없이 병사들을 베어 넘기다가 집무실 쪽 병사들의 동요를 확인하고 갑자기 큰소리로 일갈했다.
“너희들의 장군. 익티다르는 오늘 나, 테세우스 손에 죽었다. 누가 나와 상대하겠느냐?”
“헛소리! 장군께서 너 같은 꼬마 놈에게 죽었을 리가 없다.”
“죽여라! 저 버러지 같은 해적 놈들을!!”
“자.. 장군께서 사망하셨다.”
“이.. 익티다르 장군께서 저.. 정말로 죽으셨다.”
“수.. 수석장교 파.. 파드와께서도!”
익티다르와 파드와의 시신을 확인한 병사들이 대경하며 소리치자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저들의 혼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말을 증명할 증인들이 나타날 때까지 잠시 기다린 것이었다.
서후는 나디르와 짧게 눈을 마주친 뒤 그에게 말했다.
“내가 앞장선다.”
나디르는 서후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혼란에 빠진 지금이 기회였다. 팅기스에 주둔한 아스칼리스군 병영의 중심부라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전히 의문이긴 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계획하고 실제로 성공한 서후를 보니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이상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
“방패는? 스쿠툼이면 더 좋고.”
호라티우스가 무기를 챙기며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에게 말했다.
“방패라면 있지만 스쿠툼은 준비된 것이 없소.”
“사람은?”
“거론한 지역으로 벌써 보냈소. 당신이 로마군이 맞기를 바라는 수밖에.”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기본적으로 나는 사람을 믿지 않소. 상황을 믿을 뿐이오.”
“그런데 나한테는 선뜻 다가왔군. 또 그런 것치고는 너무 쉽게 내 말을 믿은 것도 있고.”
“때론 신중함보다 신속함이 중요할 때가 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을 뿐이오.”
호라티우스는 사나워 보일 정도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사내, 이크람을 바라봤다. 그리곤 혼잣말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흠. 설마 이것까지 감안하고 나를 선술집으로 보낸 건가?”
“그게 무슨 소리요?”
이크람이 반문하자 호라티우스는 신경 쓰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그래서 댁들이 지금 모두 몇 명이라고?”
“지금은 스무 명 정도가 전부요. 모두 뛰어난 전사들로..”
호라티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이크람의 말을 끊었다.
“제길.”
후사인이 거느린 해적들의 숫자만 천 명이 넘는다. 그런데 아군은 스무 명이 전부다. 호라티우스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팅기스 주변에 은신하고 있는 병사들을 불러 모으면 오백은 족히 넘을 거요.”
“즉시 불러 모을 수 있는 병력은?”
“당신이 강력하게 요청해서 백 명 정도가 더 모이긴 할 거요. 다만 말했다시피 그렇게 되면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테니..”
“일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당신들은 이제 안중에도 없어. 한 가지만 기억해. 당신들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싶은 게 맞다면 테세우스라는 소년을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만 말이야.”
“테세우스? 소년?”
“자세하게 말할 시간이 없으니 준비되는 대로 병영 주변에 은신하도록. 때가 되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게 될 테니.”
이크람은 고압적인 호라티우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팅기스의 익티다르를 살해하는 일보다 로마와 동맹을 맺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 일단은 그가 시키는 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팅기스를 전복시키지 못하고 이어서 루사디르를 잃어도 로마를 우방으로 둔다면 왕위는 마스타네소스의 것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까.
*
“제길. 갈수록 태산이로군.”
나디르가 급히 몸을 피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피하자마자 수많은 화살들이 그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후두두둑
심지어 그가 몸을 피한 나무기둥에도 빼곡하게 박혔다. 그렇게 생사의 위기 앞에 놓였건만 나디르는 또다시 서후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다고? 한두 발이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적병들 틈으로 스며들어 저들을 무참하게 도륙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나디르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정말 군신 마르스라도 된단 말인가?”
*
서후는 날아오는 화살에 검을 휘둘러 그 궤적을 뒤틀고 적병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방패로 삼았다. 아군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궁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서후는 종횡무진으로 날뛰며 병사들을 상대했지만 결국 병사들의 포위망에 갇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날카로운 창 여러 개가 한꺼번에 서후를 찔러왔다.
부부붕
사방에서 날아오다 보니 어디에도 피할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후는 바닥을 박차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심지어 내질러지는 창대를 밟고 더 높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쐐에에엑
홀로 공중에 떠오르자 다시 날카로운 화살 몇 개가 그를 향해 날아왔지만 그런 와중에도 서후는 정확하게 검을 휘둘렀고 결국 화살은 대가 꺾인 채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병사들이 악에 받친 표정으로 공중의 서후를 향해 창을 찔러왔다.
훙 후훙 훙
서후는 몸을 뒤틀어 몇 개의 창은 피하고 몇 개의 창은 검으로 쳐냈으며 그렇게 창을 잡아채거나 막아내는 과정에서 다시 몸을 움직여 그 모든 공격을 막거나 피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곡예도 이런 곡예가 따로 없었다. 당연히 그를 상대하는 병사들은 귀신을 상대하는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과 별개로 서후는 슬슬 자신의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병사들을 베었지만 병영을 벗어나기엔 아직도 요원한 일이었다.
익티다르의 집무실에서 병영의 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이동하면 간단하겠지만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서후 등이 그렇게 움직이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익티다르와 파드와가 죽었음에도 생각보다 기민한 아스칼리스군의 대처에 서후와 나디르는 탈출구 없는 전장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지금처럼 서후가 저들의 포위를 뚫어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다.
‘도무지 예상대로 되는 게 없군. 그나저나 아직인가?’
피이잉
그 순간 서후는 섬뜩한 소음에 급히 고개를 젖혔다. 서후는 볼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뺨을 스치고 간 날카로운 물체는 바로 화살이었다. 고개를 젖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가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분이 마치 1시간보다 더 긴 것처럼 느껴지는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죽여라! 저 암살자 놈을 죽여버려!”
“죽여라!”
하급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들이 외치자 저들의 기세가 마치 마른 들판에 불이 붙듯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서후는 그 모습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지치는 것을 느꼈다. 잠깐의 실수는 그대로 목숨을 잃게 만들 테니 서후는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젠 슬슬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
그때 병영 바깥에서 거센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스칼리스 놈들은 항복하라!”
“적법한 왕위계승자이신 마스타네소스 왕께서 로마와 손을 잡았다. 팅기스는 이제 마스타네소스 전하의 것이다. 그러니 헛되이 저항하지 말고 항복해라!”
“항복해라!”
“와아아아아아!”
저들의 외침을 듣는 순간 서후는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