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 영원한 것은 없다.
50.
익티다르와 파드와의 피로 얼룩진 집무실 바닥을 밟고 서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척안의 탄탄한 체구를 가진 사내는 익티다르가 바로 얼마 전까지 집무를 보던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 그에게 당황한 표정으로 항변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팅기스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에 속한 곳입니다. 저희를 도와 팅기스를 점령한 사실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세르토리우스가 차가운 눈빛으로 이크람을 바라보자 그의 충실한 수하 사비누스가 이크람에게 일갈했다.
“감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살기등등한 사비누스의 태도에 위축될 법도 했건만 이크람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팅기스는 마우레타니아에 속한 곳입니다.”
영토에 대한 내용은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긴 이 정도 강단도 없는 사내였다면 누군가를 암살한다는 건 엄두도 못 냈을 테고 그런 자였다면 마스타네소스가 신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비누스가 미간을 꿈틀이며 검자루에 손을 옮기려고 하자 세르토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팅기스가 마우레타니아의 것이 아니라 말한 적은 없다. 하나 팅기스는 내가 다스린다.”
“말씀드렸다시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생각은 없으니 하나만 질문하겠다. 현재 마우레타니아의 왕이 누구지?”
“당연히 저희 마스타네소스 전하께서!”
“아니 틀렸다. 너희 마우레타니아는 현재 왕이 없다. 내 말이 틀렸나?”
“······.”
두 왕위 후보자가 왕권을 노리고 싸우는 중이니 세르토리우스의 말이 옳았다. 오히려 마우레타니아 내에서의 세력과 인기는 아스칼리스가 우세했고 마스타네소스보다 하위서열이긴 하나 그 역시 왕가의 후예였다. 따라서 아니라 말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이크람은 머뭇머뭇거리며 결국 어떤 말도 뱉지 못했다.
“팅기스는 잠시 맡아두었다가 마우레타니아의 왕에게 돌려주도록 하지.”
아스칼리스가 팅기스를 점령하고 있던 전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로마의 반군으로 지정된 세르토리우스에게 팅기스를 넘긴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이는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 여겨졌다.
이크람의 그런 기색을 읽었기 때문일까? 세르토리우스가 사자 같은 기세를 발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 하는 것이냐? 팅기스 최고사령관을 살해한 자가 바로 내 아들이다. 또한 아스칼리스의 손에서 팅기스를 빼앗은 자는 나 세르토리우스다. 너희에겐 팅기스를 주장할 어떤 명분도 없다!”
입을 꾹 다물고 어떤 말도 뱉지 않았지만 이크람이 세르토리우스의 결정에 불복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한 사비누스가 그를 베어버릴 생각으로 검자루를 꽉 쥐는 순간 동석하고 있던 서후가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세르토리우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이크람을 일별한 뒤 기꺼운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서후는 가볍게 세르토리우스에게 예를 표한 뒤 이크람에게 말했다.
“팅기스를 원한다고? 좋다. 가져라.”
“그게 무슨?”
사비누스가 나서자 세르토리우스는 말없이 그를 제지했다.
이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지만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다만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라. 또한 너희가 팅기스를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군. 쯔.. 이제 보니 군사, 정치, 정보력, 경제에 이어 수하를 보는 눈까지 형편없군.”
대놓고 마스타네소스를 모욕하는 언사에 이크람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우리와 협상을 벌이려거든 네 주군으로부터 협상권부터 가져오던가? 감히 주제넘게 뭐 하는 짓거리지? 네가 결정하고 네가 제안할 수 있는 게 있기라도 한가? 말뿐인 감사? 그게 무슨 소용이지? 아니면 이대로 너를 죽이고 우리가 팅기스를 약탈하기를 원하는 건가?”
“으흠..”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으니 이번 한 번만 더 친절하게 상황을 짚어주겠다. 첫째, 팅기스를 지킬 힘이 너희에겐 없다. 우리가 팅기스를 점령하고 그 이득을 아스칼리스가 얻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해도 너희는 큰 이득을 얻는 셈이다. 그러니 그쪽이 우리에게 팅기스를 점령해 달라고 도리어 간청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둘째, 로마를 두려워하는 모양인데 술라에게 너희는 이미 반군과 협력한 세력이다. 아스칼리스보다 많은 이득을 보장해준다면 말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마지막으로 팅기스를 우리에게 넘기면 그걸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로마의 반군과 협력한 세력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팅기스를 넘기면 그걸 확증하는 셈인데 오히려 로마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게 무슨 소리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는 법이지.”
서후의 발언에 이크람은 물론 세르토리우스와 사비누스도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게 무슨?”
이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자 서후가 말했다.
“눈앞의 적도 처리하지 못하는 자가 적이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자를 두려워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이크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주제넘게 왕이 결정할 부분을 넘보는 게 아니라 팅기스에서 얻은 병력을 데리고 루사디르를 도우러 가는 게 우선이다. 그러니 가서 전해. 팅기스는 우리가 맡겠다고. 당신은 그 후에 우리와 적으로 만날지 아군으로 만날지 왕의 전언을 가져오면 될 뿐이다. 더 할 말이 있나?”
“······. 없소.”
“잠깐만! 그 말은 팅기스에서 항복한 병사들을 모두 저자에게 준다는 소리입니까?”
사비누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외쳤지만 서후는 세르토리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 아들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크람은 그렇게 말하며 예를 표한 뒤 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가기 무섭게 사비누스가 세르토리우스에게 말했다.
“레가투스! 잘 단련된 병사들입니다. 군단병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도 보조군으로 사용한다면!”
케이프 스파르텔은 이 지역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고지대였기에 케이프 스파르텔을 점령하고 정황을 살피던 사비누스는 당연히 팅기스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파악할 수 있었고 곧바로 그 소식을 세르토리우스에게 알렸다.
세르토리우스는 그 길로 모든 병력을 이끌고 팅기스를 향해 이동했고 그 가운데 이크람의 병사, 4백의 기병과 합류하여 팅기스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이크람의 병사들이 팅기스 외부에 숨어있었던 연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들이 기병이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팅기스의 아스칼리스군은 로마군이 들이닥치자 뿔뿔이 도망치거나 대부분 병장기를 버리고 곧장 항복했는데 그 수가 거의 천 명은 족히 넘었다. 사비누스가 말한 병력은 바로 이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엄연히 말해 이 일이 가능했던 건 서후가 익티다르 암살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병사들이 대항하지도 않고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세르토리우스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비누스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저들은 로마에 항복한 것이 아니다. 나 세르토리우스에게 항복한 것은 더더욱 아니지.”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사비누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흠.”
“마스타네소스가 가진 선왕 보쿠스 왕의 위엄에 몸을 숙인 것이다. 테세우스가 아니었다면 항복이 아니라 저들을 모조리 죽여야 했을지도 모르지. 마스타네소스군이 함께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세르토리우스는 그 말을 하며 흡족한 눈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익티다르를 죽이고 마스타네소스군의 합류를 이끌어 낸 것도 모두 서후가 한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일을 고작 2명의 병사를 데리고 해냈다.
사비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들을 우리 품에 두었다면 날카로운 비수를 몸 안에 둔 형국이 되었겠군요. 확실히 그럴 바에는 저들의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마스타네소스에게 보내는 것이 보다 현명한 처사였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뒤 사비누스는 서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임시 따위가 아니라 지금 당장 트리뷰누스 라티클라비우스에 임관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습니다.”
임시직이라지만 이미 군단의 제 이인자 역을 톡톡히 해내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대부분의 라티클라비우스는 행정업무를 배우기 급급하지 이런 식으로 군단에 도움이 되는 공적을 세우지도 못했다.
“과찬입니다.”
서후의 겸양에 세르토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왕위쟁탈전에 대해 여쭈시는 겁니까?”
세르토리우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루사디르를 지켜낼 수 있으냐 없느냐가 향후 전황을 좌우할 테니 조금 더 지켜봐야 그 결과를 추측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오늘 팅기스가 함락됨으로 아스칼리스군은 후방에 적을 둔 셈이니 설혹 루사디르가 함락된다고 해도 마스타네소스가 맥없이 무너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는 로마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서후의 대답에 세르토리우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하. 네 말이 심히 옳다.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내전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마스타네소스에게 술라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이제 팅기스는 로마군의 각축장이 될 텐데 마스타네소스가 이곳의 권한을 우리에게 넘기면 술라와 직접 척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모를 로마의 원군 역시 팅기스를 향하게 될 테니 저들로서는 온전히 아스칼리스에게 집중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아군 역시 아스칼리스의 원조나 공격을 염려할 필요 없이 이곳에서 세력을 불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각 세력의 균형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전장이 이원화되는 셈입니다.”
사비누스가 고개를 주억이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술라의 군대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군요.”
고작 천 명의 정예병이지만 잘 활용한다면 이 숫자의 열 배에 해당하는 강병을 양성할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보내 물자를 징발하겠습니다.”
서후는 그 말에 집무실 한편에 굴러다니는 파피루스를 주워든 다음 입을 열었다. 피로 물든 것들이 많았지만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무리하게 징수하여 악명을 떨칠 필요도 없습니다. 팅기스가 임시거점이긴 하지만 아군의 장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전쟁을 위해선 막대한 물자가 필요합니다. 술라는 지체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올 겁니다. 그러니 당장의 전투를 위해서!”
“현재 아군의 숫자는 천명에 불과하며 또한 이미 우리를 위해 익티다르가 대부분의 일을 수행해두었으니 혹시라도 더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차근하게 결정하면 됩니다.”
“······.”
“허어.. 설마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에 옮긴 것이냐?”
세르토리우스는 서후의 영리함에 혀를 내둘렀다. 사비누스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당연히 모든 것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익티다르를 암살하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대해서는 계산한 바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계산한 대로 이뤄졌지만 제 행동이 현명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 죽을 뻔한 게 몇 번이던가? 위험천만한 순간들이 떠오르자 서후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또한 자신의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으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서후의 대답에 세르토리우스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사비누스에게 말했다.
“사비누스!”
“예.”
“팅기스의 통치를 내 아들에게 일임할 것이니 테세우스와 상의하여 술라의 군대를 막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나는 놈들을 어찌 상대할지에 대한 군략을 구상해보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런 뒤 세르토리우스는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여러모로 수고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