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51화 (51/298)

# 51

51. 영원한 것은 없다.

51.

어슴푸레한 빛이 하늘을 밝히고 그 푸르스름한 기운을 땅에 스며들게 만들 때 잠이 든 세상은 죽음 같은 고요함으로 침묵을 지켰다.

“후우우.”

서후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새벽의 공기를 한껏 들이쉰 다음 길게 내뱉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렇게 많은 세계가 그대로 종식되었다. 누군가에겐 천지가 개벽할 일들이건만 세상은 어제와 같이 잠들었고 침묵으로 그들을 거론하지도 않았다. 허무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욕망의 도가니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어떤 흐름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면 새벽이 주는 고요함도 밤이 주는 안식도 아무도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어버릴 테니까.

마음에 스며드는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내버려 둔 채 몸의 근육을 이완하며 관절을 가볍게 풀었다.

명료하지 않다. 벨 수밖에 없었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하지만 단말마와 함께 피를 흩뿌리며 쓰러진 자들의 환영과 환청이 자연스럽게 그의 머릿속과 귀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어차피 명료한 건 없었다. 모든 것이 모호하다. 겪고 있는 기이한 일들도, 자신의 미래도, 혹 무엇이든 명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애써 명료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폐부를 가득 채운 서늘한 공기가 새벽의 기운으로 자신을 씻어주길 바라나 그러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산자 들의 세상이다. 현재란 어차피 순간의 연속이다. 그러니 주어진 순간을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게 후회가 되고 혹 영광이 될지라도 살아내고 나면 결국 지나간 과거에 불과하다.

부우웅

마치 서후의 잡념을 모두 털어내겠다는 듯 창두를 떼어낸 기다란 창대가 파공음과 함께 파르르르 제 몸을 떨었다.

서후는 그것을 시작으로 가볍지만 묵직하게 느리지만 정확하게 창을 내지르고 거두어들였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 나무는 거목이 될 수 없고 오래 살아남지도 못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다. 무술이라고 창술이라고 다를까?

찌르고 베고 밀어내고 때리고 돌리는 등 몇 번만 보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지극히 기본적인 동작을 서후는 집중해 펼치고 또 펼쳤다.

최적화된 동선은 두 개가 아니다. 무조건 하나다. 적을 벨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역시 하나다. 그게 두 개일 수는 없다.

그러니 현란한 무예도 화려한 언변도 극에 달하면 간결해질 수밖에 없다. 간결하지만 그 무엇보다 날카롭다. 단번에 적의 방어를 뚫고 심장을 꿰뚫어 목숨을 취하고야 만다. 현란하고 화려한 것들은 그 간결한 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버릴 건 없다.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한 가지,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자신의 오만함이다. 그 오만함이 방심을 낳고 그 방심은 반드시 화를 자초할 것이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움직이던 서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변화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땀이 흐르고 근육과 관절이 격렬한 움직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자 서후는 빙글빙글 돌면서 창두가 없는 창을 허공을 향해 현란하게 휘둘렀다.

부부붕 부부붕

서후는 항우와 리처드를 대상으로 두고 무예를 수련하고 있었다. 부족하다. 너무나 부족하다. 자신은 이미 여러 차례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소년의 몸이라서? 저들보다 힘이 약해서? 어디 적들이 친절하게 사정을 봐주며 목숨을 빼앗으려 하던가? 그 모든 건 핑계에 불과하다.

현실의 한계를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현 상황에서 준비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서후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더 준비할 수 있고 더 강해질 수 있다. 저 멀리 성인이 되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의 몸으로 성인의 몸을 가지지 못했음을 한탄함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그저 어제의 나보다 성숙했으면 그것으로 된 거다.

‘항우와 리처드에게 둘러싸였음에도 생존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전장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일은 없겠지. 그렇다고 해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요원한 일이다. 이룰 수 없는 목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후의 이런 노력이 헛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심상이긴 하나 항우와 리처드로 이뤄진 자들과 대련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 효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

푸르르륵 푸륵

호라티우스는 자신이 고삐를 잡고 이끄는 검은 갈기를 가진 말을 바라봤다. 잘생긴 놈이다. 꽤 많은 말을 봤지만 이렇게 잘 빠진 놈은 또 처음이었다.

이크람은 자신이 보유한 500마리의 말 중 50마리를 세르토리우스에게 바쳤다. 그 대가로 루사디르까지 진군하는데 필요한 적당한 물자를 세르토리우스에게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 역시 서후의 계산 안에 있었다.

이크람이 말을 바치고 물자를 얻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결정권은 세르토리우스에게 있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서후는 사비누스와 팅기스 도시 전반에 걸친 운영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이야기를 나눠야 했고 무엇보다 휴식을 가져야 했기에 그 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가운데 두 마리는 이곳 누미디안의 말처럼 생기지 않았다. 각각 흑색과 적갈색을 가진 두 마리의 말은 누미디안 종을 압도하는 기세가 있었다.

마우레타니아 왕실에서 저 멀리 파르티아의 상인으로 보이는 자에게 고가의 돈을 주고 구매한 종이라고 들었다.

그중 로마를 떠올리게 하는 적갈색의 붉은빛이 도는 말은 세르토리우스가 취했고 윤기 나는 털을 가진 흑마는 자신의 양아들에게 하사했다. 지금 호라티우스가 이끄는 날렵한 몸에 늘씬한 다리를 가진 흑마는 바로 서후를 위한 말이었다.

대부분 잠이 들어 있는 새벽이었고 어제 격렬한 일을 겪었으니 서후 역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거라 여긴 세르토리우스의 깜짝 선물이었다. 호라티우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이른 아침 채비를 마친 뒤 말을 이끌고 서후에게 온 것인데 그들의 예상과 달리 서후는 이미 잠에서 깨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홀로 훈련을 하고 있었다.

호라티우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르토리우스가 하사한 말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는데 서후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세르토리우스의 양아들 테세우스가 정식 군인이었다면 군단이나 군대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훈장인 코로나 그라미데아, 즉 풀잎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술라가 정권을 장악한 로마에서 그것을 인정해주느냐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이미 지난 선상과 이곳 팅기스에서 세운 군공은 세르토리우스 휘하 모두를 압도할 정도였다.

“역시 놀라울 정도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쌓은 게 아닌 모양이야.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는지 매우 궁금해지는군.”

호라티우스는 다시 한번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날렵한 흑마가 얼마나 희귀한 종인 건 알겠지만 눈앞의 테세우스보다 놀라울까?

호라티우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서후의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프레펙투스 사비누스였다. 다시 보니 그뿐만 아니라 이른 아침 눈을 뜬 꽤 많은 자들이 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나디르도 있었다. 서후는 병영 연병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라티우스가 사비누스에게 군례를 표하자 그 역시 군례로 답한 뒤 지금 막 훈련을 마친 서후에게 가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호라티우스는 흑마를 이끌고 서후에게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건 향후 로마를 뒤흔들 사람 앞에 서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갑작스런 자각 때문이었다.

*

서후는 훈련을 시작할 때와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이 꽤 많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고 훈련에 집중했다. 자신의 실력을 애써 드러낼 필요도 없었지만 숨길 필요는 더더욱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몸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 적당한 훈련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귓가에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다그닥 다그닥

서후는 경쾌하고 규칙적인 걸음 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호라티우스가 유려한 몸을 가진 흑마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서후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흑마를 힐끗 바라보며 호라티우스에게 시선을 주자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서후에게 대답했다.

“레가투스 세르토리우스께서 하사한 말입니다.”

서후는 호라티우스의 태도에 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호라티우스가 자세를 바로 하며 다시 말했다.

“센튜리온 호라티우스! 앞으로 상관의 예로 당신을 대할 것입니다.”

왜 갑자기?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서후의 머릿속을 파고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상관인 사비누스도 자신에게 예를 표하고 있는 마당에 그걸 따질 이유가 없었다.

푸르르륵

앞발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투레질하는 흑마를 바라봤다.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놈이 아니었다. 서후는 말을 볼 줄 몰랐지만 항우나 리처드는 그렇지 않았으니 말에 대해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라비안(Arabian)인가?’

확실하진 않지만 이런 종을 아랍 순종이라 불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의 예상대로 눈앞의 흑마는 아랍 순종이 맞았다. 이 아라비안은 기원전 3000년부터 순혈이 유지되었기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귀한 종이다.

아할테케와 마찬가지로 이 아랍 순종은 일반 말들과 달리 뼈 구조 자체가 조금 달라 다른 종이라 볼 수도 있었다.

참고로 알렉산더의 부케팔루스, 삼국지의 적토마, 조황비전, 절영 등이 아할테케의 품종이었고 한무제가 서극천마가라는 시를 지어 극찬한 한혈마 역시 이 아할테케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아할테케의 명성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랍 순종 역시 명마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이크람이 귀한 선물을 주고 떠났군. 역시 쉽게 생각해서는 곤란해.’

액면 그대로만 따지자면 말 50마리로 천 명이 넘는 군사와 부족하긴 해도 루사디르까지 도달할 수 있는 물자를 얻은 셈이니 상당한 이득을 얻은 셈이다.

아울러 일이야 어찌 되었든 팅기스를 탈환한 공 역시 제 주군에게 인정받을 테니 이크람으로서는 크게 남는 장사였다. 거기에 구하기 힘든 희귀한 종을 바침으로 세르토리우스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사려고 했으니 역시 어리석은 자라 보기는 어려웠다.

‘영원한 건 어디에도 없지. 언제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어질지, 또 언제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워질지 그걸 매번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러니 사람의 한 면만을 보고 그 사람을 멋대로 판단하는 건 극히 어리석은 자의 표본이라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이 시대 말이 가지는 위상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다. 로마의 에퀴테스(기사) 계급 역시 왕정 시대 로마 최고의 시민들로 특별 기병대를 임명한 것이 그 시초다.

또한 감찰관들은 공마를 가진 에퀴테스들이 말을 잘 관리하고 있는지 검사했고 공마 행진 등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게끔 했으며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기사는 공마 소유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대략 말이 가진 위상이 이러했으니 명마가 가진 위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단순히 명마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권위와 명예를 높이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내게 말은 말일 뿐이다.’

유명한 명언이 있지 않은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닌 건 결국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귀한 말이라지만 말에 수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자들과 같은 시선을 가졌다면 이크람이 과연 두 마리의 말을 선뜻 세르토리우스에게 바칠 수 있었을까? 귀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나 사람들로 인해 부풀려진 가치를 제 목적을 위해 이용한 것이다. 이런 자를 어찌 어리석다 폄훼할 수 있을까? 그것을 알고 행했든 모르고 행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럼 이크람의 제안을 받아들인 세르토리우스가 어리석은가? 글쎄. 그 역시 모르는 일이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보는 것이 꼭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서후는 수많은 잡념을 끊어냈다. 잡념과 별개로 말 자체는 마음에 들었다. 또한 세르토리우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귀한 선물이군.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전하도록..”

“명마는 두고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직접 타고 달려봐야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비누스가 다가오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라티우스에게 고삐를 넘겨받은 후 그대로 말 위에 잽싸게 올랐다.

푸르르륵 히이이잉

흑마가 투레질과 함께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앞발을 높이 치켜 세웠지만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건 서후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흑마의 목을 가볍게 두드리며 교감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비누스 역시 미리 말해두었는지 병사가 가져온 말에 오르더니 서후에게 말했다.

“같이 가볼 곳이 있습니다. 원래라면 조금 더 휴식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함께해주시겠습니까?”

서후는 마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부할 권한은 없는 것 같군요.”

그 말에 사비누스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 대답했다.

“뭐.. 저희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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