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57화 (57/298)

# 57

57. 미친놈.

57.

소우판은 충각이 달려있는 뱃머리 위에서 수평선을 응시하는 서후를 바라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라틴어가 아니라 무어인들의 말인 베르베르어로 중얼거렸다.

“미친놈이다. 저놈은.”

“미친놈과 함께하는 우리도 미친 것 아닙니까?”

“그런가? 그럴지도.”

해적 놈들과 전투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승산이 없지는 않다. 해전은 자신들이 약할지 몰라도 육지전이라면 밀 까부수듯 놈들을 순식간에 밀어버릴 테니까. 어쨌든 자신들이 이번 토벌에 합류한 건 이런저런 기반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저 미친놈? 저놈 소유라고는 두 명의 수하가 전부다. 심지어 준비된 군선이나 상선 모두 제 소유가 아니었다. 아비라에서 제공한 군선과 상선이었다. 그야말로 황당할 노릇이다.

하지만 부족의 다른 자들처럼 아무것도 안 하느니 미친 짓이라도 동참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하긴 제가 봐도 미친놈 같긴 합니다.”

“미친놈이긴 한데 영리한 미친놈이다. 상선으로 말을 수송할 생각을 하다니.. 그러고 보니 저놈 소유 중에 말도 세 마리 있긴 했군.”

배가 미리 준비된 것으로 봐선 아비라와 먼저 협상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때 이미 이 그림을 그렸다는 소리다.

“로마. 자신들이 로마가 될 거라고?”

세르토리우스의 명성이야 자신도 들어봤지만 얼마 전에도 토벌군에 의해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허풍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우판은 그 말이 뇌리에 박힌 듯 잊혀지지 않았다.

“미친놈이랑 대화했더니 나도 미친 건가? 하긴 저놈 말만 믿고 에부수스로 향하는 우리도 정상은 아닐지도..”

그만큼 자신들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방증처럼 여겨져 소우판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대장! 대장!”

“무슨. 무슨 일이냐?”

“프루멘타리움 앞바다에 선단이 나타났습니다!”

에부수스는 두 개의 섬으로 이뤄졌는데 에부수스는 북쪽의 큰 섬을 말했고 프루멘타리움(frumentarium, 포멘테라)은 남쪽의 작은 섬을 가리켰다.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샤파트가 쳐들어오기라도 했냐?”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바이림만 스무 척이 넘고 상선도 중간중간에 섞여 있었으니 샤파트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후사인은 샤파트와 간단한 협상을 통해 전과 같은 체제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메노르카를 기점으로 하는 해적들과 에부수스를 기점으로 하는 해적들의 활동구역이 다른 편이고 거점을 점령한다고 근방 해적의 통솔권을 얻는 건 아니기에 괜한 싸움으로 피 볼 것 없이 샤파트는 후사인이 돌아오자 깔끔하게 그에게 에부수스를 넘기고 본래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둘 사이가 앙숙이 아닌 건 아니었다. 서로 싸우면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다른 놈들에게 먹잇감이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을 뿐, 오히려 둘 사이는 전보다 나빠졌다.

“바이림 뿐이라면 토벌군도 아닌 셈인데?”

2단 갤리선, 바이림은 과거엔 전투선으로 사용되었을지 모르나 현재는 해병들을 나르거나 전투를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해적들이 이를 개조한 헤미올리아나 이걸 다시 개조한 미오파로(myoparo)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나 정규군은 주로 3단 갤리선, 트라이림을 사용했다. 따라서 저들은 토벌군도 아니라 봐야 했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일단 배를 출정시켜서 막아!”

“바이림이 해전에 적합한 배는 아니더라도 그 수가 스무 척이나 되니 무작정 배를 몰고 나갈 선장들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아시다시피 현재 대부분의 해적들은 샤파트의 해적들을 감시한다고 마리오리카 주변을 맴돌고 있는지라..”

“제길.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야? 휘하 해적들을 집결시켜! 서둘러라.”

후사인은 갑작스런 선단의 출몰에 불길함을 느끼고 수하에게 급하게 외쳤다. 설마 세르토리우스군이? 하지만 3단 갤리선을 두고 저런 낡아빠진 배로 3일 거리나 되는 이곳까지 추격해올 리가 없지 않은가?

바다를 건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하를 아끼는 세르토리우스가 단순히 자신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저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한다고? 자칫 잘못하면 모조리 수장당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세르토리우스의 로마군일 확률은 낮았다.

어쨌든 예고 없이 찾아온 불청객들이니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놈들이 감히 나 후사인을 어떻게 보고!”

*

서후는 뱃머리에서 해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소우판에게 말했다. 저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프루멘타리움에 상륙해서 기회를 엿볼 필요도 없어 보였다. 에부수스까지 이동해도 육지에 상륙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해전을 치를 필요도 없이 바로 육상전으로 돌입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프루멘타리움에 상륙하려던 계획을 바꾼다. 이대로 에부수스로 향한다.”

소우판은 서후의 명령을 듣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도 말았어야 했다. 단 세 명에 불과해도 그는 로마군의 대표이기도 했고 어쨌든 그는 자신들에게 에부수스까지 항해할 수 있게 만든 모든 준비를 완료한 자다. 그러니 일단은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수순이었다.

첨벙 첨벙

이윽고 수많은 자들이 배에서 해안으로 내려섰다. 무려 그 수가 천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노잡이가 따로 없었고 저들이 직접 배를 몰아 이동했기 때문에 한 척당 거의 100명이 안 되게 탑승했고 나머지 군선이나 상선에는 누미디안 말을 실었다. 그 말의 숫자만 100필은 되었다.

2단 갤리선 따위로 말을 수송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말들이 스트레스를 잔뜩 받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총 병력은 기병 100에 보병이 1000에 달했다.

서후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 위에 오른 나디르에게 말했다.

“말했지만 후사인은 네 몫이다. 또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나디르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상 위에 오른 자들은 저마다 투창을 들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누미디안과 마우레타니아가 자랑하는 투창 기병이었다. 그때 호라티우스가 서후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자신들만 에부수스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호라티우스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으나 그건 팅기스 때도 그랬기에 말없이 서후를 추종했다. 그리고 막상 전장에 서니 이건 패배할 수 없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경계가 느슨했다. 그러니 지체할 것도 없다. 대비하기 전에 몰아친다.”

이들 중 삼분지 이만 상륙해도 성공이라 생각했는데 별다른 저항도 없이 육지에 상륙했으니 성공적인 상륙작전이라 할 수 있었다.

서후는 자신을 바라보는 마사에실리족을 바라보고 외쳤다.

“항복하는 적은 살려두되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라.”

“우우우!”

마사에실리족이 함성을 지르자 서후는 호라티우스에게 명령했다.

“보병대를 이끌어라. 나는 이들을 이끌고 저들을 선제타격하겠다.”

만류한다고 멈출 서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호라티우스가 굳은 표정으로 당부했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서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올라타고 있는 흑마의 배를 가볍게 찼다.

히이이잉

그와 동시에 흑마는 쏜살같이 에부수스의 해안가를 벗어나 구릉지를 향해 질주했다. 그 뒤로 100명의 투창 기병들이 매섭게 질주했다.

두두두두 두두두.

적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 전술의 기본. 육상전으로 해적을 상대하는 것보다 탁월한 전술은 없다. 후사인이 이들을 막으려고 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들이 육지에 오르는 것을 방해했어야 했다.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이 그의 불운이었지만 말이다.

*

슈슈슈슝 슈슝

푹 푸푹

“크아아악!”

“아아악!”

“으아악! 내 다리!!”

변변찮은 갑옷도 입지 않은 해적들이 마상에서 던지는 투창을 막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해적들은 투창 기병이 내던진 투창에 꿰뚫려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서후는 말 위에서 슬링을 던져 해적들의 머리통을 여지없이 부숴버렸다.

빠악 퍼어억

머리뼈가 박살나고 허연 뇌수와 시뻘건 피가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서후의 슬링에 머리를 얻어맞은 해적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의 뒤에서 다시 투창이 날아올랐고 해적들의 처참한 비명으로 피의 궤적을 완성했다.

“크아아악!”

서후는 말 뒤에 준비해 두었던 투창을 잡아뺌과 동시에 도망치는 해적의 등을 향해 그대로 집어 던졌다.

푸아아악

서후가 던진 창은 그대로 해적을 뚫고 바닥에 박혔다. 다행히 심장이 꿰뚫린 해적은 그대로 즉사했다.

“항복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참하리라!”

서후는 큰소리로 외치며 폭풍처럼 해적들을 휘몰아쳤다. 창을 든 서후는 해적들을 향해 짓쳐들며 무참하게 저들의 팔과 다리를 찔러 넣었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종횡무진으로 날뛰고 있음에도 그를 막아서는 해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뒤따르던 소우판은 그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익티다르와 파드와를 죽인 건 테세우스, 이 자가 확실했다. 전장에서 날뛰는 모습을 보니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소우판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큰소리로 자신의 부족에게 소리쳤다.

“죽여라! 에부수스의 해적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우아아아아!”

*

“이.. 이게? 대체?”

왜 갑자기 무어인들이 에부수스를 공격한단 말인가? 투창 기병은 무어인들이 자랑하는 병사들이 아니던가?

후사인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낡은 바이림이나 타고 에부수스로 향했길래 어디서 급히 도망친 자들이 에부수스의 해적으로 합류하려는가 싶어 권위를 내세우고자 병력을 이끌고 포진했거늘, 다짜고짜 이런 식으로 공격하다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사인은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으드득. 이 새끼들이!”

그때 삼쉬르를 쥐고 바람처럼 자신에게 쇄도하는 킬리키아인이 있었다.

“나디르! 네놈이!”

나디르가 어떻게 무어인들과 한편이 되어서 자신을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후사인은 그 모든 분노를 나디르에게 쏟아부었다. 눈이 뒤집힌 그는 자신의 말을 달려 나디르를 마주하러 이동했다.

다가닥 다가닥

차아앙

후사인도 킬리키아인이었다. 나디르와 동일한 형태의 검을 든 그는 그대로 여러 번 나디르와 검을 나눴다.

히이이잉

분노에 휩싸인 후사인의 검은 과격하기는 했지만 정교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의 말을 노리는 나디르의 노림수를 읽지 못하고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나디르의 검에 베인 후사인의 말은 길게 울음을 터트리며 앞발을 치켜세우다가 그마저도 힘이 빠진 듯 모로 쓰러졌다. 후사인은 말이 쓰러지기 전에 말등을 박차고 날아올라 있는 힘껏 나디르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채애앵

다행히 나디르가 그것을 받아내긴 했으나 균형을 잃은 나디르는 낙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하마 하기로 했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내려선 후사인은 주변의 전황이 어떻게 되는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나디르만 눈에 들어왔다.

“네놈이 감히! 나의 일을 망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나를 농락하려고 들어? 당장 죽여버리겠다!”

“나를 죽일지언정 바라카는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

“바라카? 아. 팅기스의 그 돼지 같던 상인 놈을 말하는 것이냐? 죽을 때 얼마나 꽥꽥거리던지 꽤나 시끄러웠던 기억이 나는군.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목도 잘라서 곧 전시해줄 테니 저승에서 해후를 나누거라!”

후사인이 이죽거리며 말을 뱉자 나디르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곱게 죽이지는 않겠다.”

나디르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후사인에게 달려들었다. 나디르가 자신의 머리를 베어오자 후사인은 이죽거리며 나디르의 검을 흘려내고 반격을 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패착이었다. 마치 흘려내려는 검의 궤적을 따라 나디르의 검이 강하게 밀려 들어왔기에 검을 흘리기는커녕 얼굴이 베일 정도로 검이 뒤로 밀려나 버렸다.

채애앵

후사인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에부수스도 아니고 메노르카에서 작은 배의 선장이나 하던 놈이니 자신이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대체 이만한 실력을 가진 놈이 왜 지금껏 작은 배의 선장 노릇이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나디르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대로 빠르게 검을 놀려 후사인의 양 허벅지를 얇게 베어냈다.

“크흐흐흑.”

후사인이 섬뜩한 고통에 비척거리며 물러서자 나디르는 기다렸다는 듯 이번에는 그의 양어깨를 베어냈다. 별다른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기는 후사인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나디르의 날카로운 검은 그의 살갗을 사정없이 저몄고 후사인은 그 소스라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으으윽!”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디르는 후사인의 목을 벨 수 있음에도 그를 검으로 난도질하며 그에게 고통을 주다가 후사인이 빈사 상태가 된 이후에야 그의 목을 베어냈다.

나디르가 후사인의 목을 벤 그 순간이 에부수스가 서후에게 완전히 점령당하는 순간이었다. 조금 뒤늦게 나타난 호라티우스가 이끄는 둥근 방패에 기다란 창을 든 천 명의 보병을 발견한 해적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내팽개치고 그들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기 때문이었다. 후사인의 처형식은 그 가운데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디르가 차가운 표정으로 잘린 후사인의 머리를 서후에게 가져오자 서후는 말없이 그의 머리를 창에 꿰뚫어 높이 추켜올렸다. 그리곤 외쳤다.

“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에게 대항하는 자는 누구든 이 꼴이 될 것이다. 누가 내게 또 대항하려느냐?”

서후의 일갈에 소란스럽던 전장이 한순간이나마 고요해졌다.

대관절 저 나이에 살육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단 말인가? 소우판은 그 모습에 마른침을 삼키며 서후에 대한 평가를 하나 더 덧붙였다. 미친놈. 제대로 미친놈이다. 영리하고 거기에 사납기까지 한 정말 제대로 미친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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