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70. 벨리키.
70. 벨리키.
서후가 세르토리우스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미 그곳엔 천으로 된 옷 위에 동물 가죽을 걸친 켈타이족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왔느냐? 자리에 앉거라.”
“예. 아버지.”
서후의 대답에 켈타이족들이 일제히 서후를 바라봤다. 그가 예비된 자리에 앉자 세르토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루시타니아 사람들이라고?”
“그렇습니다. 세르토리우스님.”
“당신들과 내가 무슨 접점이 있었던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이 누구인지는 되었고 나를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봐.”
“저희 루시타니아를 다스려주십시오.”
대표로 보이는 루시타니아인의 말에 세르토리우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다스려달라? 그게 무슨 의미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름이 뭐지?”
“에고르라고 합니다.”
“좋아. 에고르. 어느 날 당신과 연관도 없는 자들이 갑자기 찾아와 자신들을 다스려달라고 한다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에고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대답했다.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님을 기만하고 그 진노를 사고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그렇겠지. 그 정도로 어리석은 자들 같지는 않으니. 하지만 나를 납득시킬만한 충분한 이유가 자네들에게 있어야 할 거야.”
에고르는 세르토리우스에게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세르토리우스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루시타니아는 척박한 곳입니다. 또한 베토네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켈타이족들로 구성된 연맹체가 아닙니다.”
그때 서후가 입을 열었다.
“다른 켈타이족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께 전권을 이양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인데 왜 이제 와?”
“역시 저희 상황을 잘 알고 계시군요. 테세우스님.”
“내 아들을 아나?”
“모릅니다. 저희도 이곳에서 처음 뵀으니까요. 다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갑작스럽게 세르토리우스님을 찾아오긴 했지만 결코 가볍게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다스려달라고 말하는 건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뜻과 동일한데 그걸 어찌 가볍게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음..”
세르토리우스가 침음을 뱉으며 생각에 잠기자 에고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테세우스님의 말씀은 합당한 지적입니다. 만약 그것뿐이라면 솔직히 말해 이렇듯 세르토리우스님을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바에티카에 자리한 로마인들이 저희 땅을 노리고 있습니다. 저희 전사들은 용맹하고 강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의 막강한 로마군을 막을 정도는 아닙니다.”
“바에티카의 로마가 루시타니아를? 왜?”
“추측하건데 금광이나 은광과 같은 광물 자원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에고르의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뭐라고 했나? 금광과 은광?”
“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희 루시타니아에 금광과 은광이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저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자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비누스가 거들었다.
“하지만 바에티카의 로마인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을 텐데? 당신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글쎄요. 저희가 로마인들보다 채굴기술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금광과 은광을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자들은 아닙니다.”
서후는 에고르가 짓는 미묘한 표정에서 그가 모든 걸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부분을 캐묻지는 않았다. 정말 루시타니아에 금광과 은광이 있다면 통치를 부탁하는 자에게 구태여 그것을 숨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을 숨기고 무력적인 부분을 이용하려 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내부에 적을 들이는 행위나 다름없으니 여러모로 악수에 가까웠다.
“그 부분은 일단 넘어가고 바에티카의 로마군을 상대하기 위해 나의 통치를 받으려 한다 이 말인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우렐리우스 코타군을 용맹과 지혜는 물론 이곳 팅기스에서 펼친 선정은 저희 부족원들에게도 명성이 자자합니다.”
“산악부족이 소문에 정통하다? 과장이 심하군.”
“말씀 중 외람되오나 루시타니아는 척박한 곳이라 외부와의 소통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하신 것처럼 외부소식에 둔감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바에티카 로마인들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오늘 세르토리우스님을 찾아뵙지도 않았겠지요. 과장이 다소 섞여 있을지는 몰라도 부족 내에서 세르토리우스님의 명성이 높은 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외부의 위협에 대항할 구심점이 필요한데 그게 아버지다?”
서후의 발언에 에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장군으로서의 명성만 자자하다면 재차 숙고해봤겠지만 예전에 바에티카를 다스릴 때도 그러셨고 이곳 팅기스에서도 세르토리우스님은 선정을 베푸셨습니다. 저희 스스로는 결코 이 위험을 넘어설 수 없는데 그 누구보다 적합한 통치자가 계시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희를 다스려주십시오. 목숨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으흠. 이 자리에서 단번에 결정할 문제는 아니군. 일단 자네들은 나가보게.”
세르토리우스의 말에 에고르와 그와 함께 온 루시타니아 사람들은 공손하게 예를 표한 뒤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난 뒤에도 깊게 생각에 잠겨있던 세르토리우스가 서후에게 대뜸 물었다.
“요 근래 켈타이 사람과 어울리더니 테세우스. 네가 저들을 부른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 여겨서 알음알음 아버지에 대한 소문만 더 키웠을 뿐입니다. 이렇듯 저들이 직접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아예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구나. 그건 되었고 이 문제에 대한 네 생각을 말해봐라. 들어보고 싶구나.”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이는 아군에게 좋은 일입니다. 어쨌든 팅기스는 반환해야 할 곳입니다. 부를 쌓기엔 나쁘지 않지만 적을 막아내기엔 부적합한 곳입니다. 작정하고 군대를 보내온다면 1년 전과 같은 요행은 또 일어나기 힘들 겁니다.”
사비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언했다.
“확실히 팅기스에 계속 남아있겠다고 한다면 육전과 해전을 동시에 수행해야 할지도 모르지요.”
“맞습니다. 왕위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지금이야 마스타네소스가 필요에 의해 이곳 마우레티나아 북서부 지역의 활동을 반기고 있지만 내심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마스타네소스가 아스칼리스와 그 잔당을 처리하기 전에 이 문제를 매듭짓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도 현명합니다. 아무래도 왕권 정립 후보다는 정립 전이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얻을 수 있겠지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왕위쟁탈전을 더 빠르게 종결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서후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이대로 루시타니아를 거점으로 삼을 수 있다면 아군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튼튼한 대지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아울러 저들이 정말로 바에티카의 로마인들에게 위협을 느껴 아버지께 복종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바에티카를 점령할 때까지는 적극적으로 협조할 겁니다. 어쩌면 그것을 노리고 아버지께 통치해달라고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비누스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희는 로마인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본디 바에티카를 다스리던 분이었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어떤 통치를 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저들의 반응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아버지께서는 켈타이족들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감히 함부로 넘보지 못할 매서움도 갖추셨겠지요.”
사비누스는 감탄한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켈타이족들은 레가투스를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아 그래서?”
“예. 아버지께서 바에티카를 점령하게 되면 루시타니아인들은 로마인들의 침략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들은 아버지를 신의가 있는 분이라 여기고 실제로도 그러하시니 바에티카를 점령한 아버지가 구태여 루시타니아를 칠 이유도 없어지는 셈이죠. 또한 바에티카로 아버지가 이동한 시점에서 저들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권은 소멸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욱이 켈타이 부족의 변동성을 생각해 볼 때 어떤 통치권이나 정책이 일관성 있게 유지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저들이 정말로 위협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를 통치자로 내세우는 건 그야말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절묘한 수가 되었을 겁니다.”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후에게 말했다.
“협상에 나서는 자는 결코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스스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것을 우려하는 것이냐?”
“예. 아버지. 어쩌면 바에티카의 위협보다는 주변 켈타이 연맹과의 사이가 극도로 험악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루시타니아인을 아군으로 삼는 대신 주변 여러 켈타이 연맹을 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켈타이 사람과 친밀하게 지낸 것은 결국 이런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더냐?”
“딱히 그런 것은..”
“쯔. 시련이 너를 금세 어른으로 만들었으나 그게 네게 좋은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단편적으로 보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이 좋아 보일 수는 있으나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느리더라도 차근하게 절차를 밟아 일반적인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 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찰나를 살아가는 사람이 언제 좋은지, 언제 나쁜지 그것을 어찌 판단할 수 있으랴? 지나고 나니 어렴풋이 깨달을 뿐이다. 또 그 깨달은 것이 오롯한 진실이라 어찌 단정 지을 수 있으랴. 따라서 세르토리우스는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그것이 좋다 나쁘다 단정 짓지 않았다.
“······.”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아들을 사지로 밀어 넣는 비정한 아비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이미 장성한 아이를 품 안에 두고 화초처럼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네 뜻대로 하거라.”
“예. 염려하시지 않도록 믿을 만한 자들과 함께 루시타니아로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루시타니아인과 함께하는 것이 아군에게 이로운지 혹 저들 외에 다른 곳을 근거지로 삼는 것이 좋은지 등 모든 부분에서 철저하게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준비할 것이 많은 텐데 나가보거라.”
서후는 세르토리우스에게 절도있게 군례를 표한 다음 몸을 돌려 집무실로 나왔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가 이젠 그가 정말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이런 관계는 그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자연히 세르토리우스 말고도 지난 1년간 꽤 오랜 시간을 같이한 사람이 떠올랐다. 벨리키와 파이살 말이다. 따라서 서후의 발걸음은 대장간으로 향했다.
*
‘피? 피냄새?’
대장간으로 향하던 서후는 바람을 타고 온 미약하지만 비릿한 혈향을 느꼈다. 바람의 방향과 위치를 가늠해본 결과 피냄새의 출처가 대장간이라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확인했다.
‘어째서 피냄새가?’
서후는 의아함은 뒤로 하고 급히 대장간을 향해 달렸다.
탁 탁 탁
확실히 대장간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진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대장간에 들어선 순간, 서후는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확인했다. 바닥에 흘러나온 흥건한 피와 더불어 미동조차 없는 것으로 봐선 죽은 것이 분명했다.
‘확정 지을 순 없지만 일단 복색은 켈타이족의 것이다.’
그 순간, 벨리키의 과거가 떠올렸다. 벨리키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거론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가 입은 상처라든가 과거에 대해 말하길 꺼리던 것을 생각하면 대략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벨리키!!”
이들이 왜 이런 곳에 널브러져 있는지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벨리키는 다르다. 서후는 목청을 드높여 벨리키를 불렀다.
“쿨럭. 쿨럭. 귀청 떨어지겠다. 이놈아.”
그러자 대장간 한쪽 구석에서 피가래 끓는 기침 소리가 퍼지더니 벨리키의 늙수레한 음성이 작게 울려 퍼졌다.
서후는 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인상을 일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배와 어깨에서는 피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서후의 눈빛에 서린 분노와 당황을 읽은 벨리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을 죽인 자의 숙명이다. 그러니 당황해하지 마라. 네 녀석의 이런 표정을 볼 수 있으니 이것도 나쁜 일은 아니구나. 클클클.”
“벨리키!”
“소리치지 마라. 이놈아. 쿨럭. 쿨럭. 제길. 어쩐지 오늘따라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싱숭생숭하더니. 클클.”
입은 상처를 볼 때 벨리키가 살아남기는 틀렸다. 따라서 서후는 냉정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떤 놈들입니까? 어떤 놈들이!”
“아니.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어.”
와장창창. 우루루.
그때 묵직한 철괴가 떨어지는 소음이 들렸다. 그건 바로 철괴를 구하러 갔던 파이살이 대장간에 돌아와 참상을 발견하고 놀라 떨어뜨린 철괴로 인한 소음이었다. 이윽고 파이살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 벨리키! 이.. 이게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