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4화 (74/298)

# 74

74. 어둠조차.

74.

에고르는 별수 없다는 듯 수신호로 루시타니아인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루시타니아인들은 나무 위나 수풀에서 활을 꺼내 들고 저들을 향해 겨누었다.

어젯밤과 달리 화살 공격은 그렇게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경무장한 정찰대와 달리 저들은 잘 무장한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찰대는 강에 빠질 수도 있으니 무장이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두 연맹 사이가 안 좋긴 하지만 전시상황도 아니었고 그 정도 분란은 항상 있었던 일이다. 오히려 정찰대가 중무장을 하면 상대방 연맹에 위협을 가할 수 있으니 무장이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어젯밤 연맹에 속한 부족의 정찰대가 당했기에 이들은 전투를 대비해 방패나 갑옷을 잘 갖춰 입었다. 기습을 한다면 피해를 줄 수는 있겠지만 화살 몇 번 날리는 것만으로는 이들을 전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 명에 이르는 루시타니아인들은 모두 긴장한 눈으로 서후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 정도 인원이라면 근방의 부족 전사들이 모두 집결한 모양인데.. 별수 없다. 모두 죽인다. 어차피 투르둘리 진형을 더 들쑤실 필요가 있다. 일치된 적이 위협적이라면 일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될 일.’

서후가 눈을 빛내며 손을 내리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활줄이 일제히 풀려나며 매서운 화살을 날렸다.

피이이잉 피이잉

서후 역시 활에서 화살을 재고 저들을 선동하고 있는 대장을 향해 냅다 날렸다.

그렇게 날아간 화살은 공기의 저항을 뚫고 살가죽과 근육을 뚫고 피를 뿜어내게 만들었다.

서후가 쏘아낸 화살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선동하던 이가 고꾸라지고 여기저기서 활을 맞는 이들이 속출하니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크아아악!”

“적습이다!”

“으아아아아악!”

“방패 들어!”

퉁 투퉁!

그러나 저들은 금세 방패를 들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무려 100여 발에 이르는 화살이 날아갔지만 20명의 사상자만 낸 것으로 보였다.

서후군은 계속해서 화살을 날리며 사상자를 미미하게나마 만들었지만 함성을 지르며 가까이 접근한 저들을 더 이상 화살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후는 활을 바닥에 버리고 두 자루의 검을 검집에서 뽑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언어는 라틴어가 아니라 켈타이어였다.

“켈티시를 위하여!”

“켈티시를 위하여!!!”

서후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에고르가 곧바로 따라 외쳤다. 그러자 루시타니아인들도 비슷한 말을 하며 함성을 질렀다.

“와와아아아아!”

“죽여라!”

“와아아아아!”

루시타니아 내에서 믿을 수 있고 가장 뛰어난 전사들로 뽑아왔다. 그러니 이들이 전투에서 겁을 먹고 도망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

켈티시 연맹 놈들을 갈아버려야 한다고, 저들의 머리를 베어 삼나무 기름을 발라 나무통 속에 처박아 전리품으로 삼아야 한다고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바카에이 부족장, 모르크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목이 꿰뚫려 죽음을 맞이하자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카우치 부족장의 아들, 아라인은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망할 켈티시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아라인의 명령에 안 그래도 동료가 죽어 분개하고 있던 바카에이족과 카우치족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폭풍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놈들에게 자신들의 진노가 얼마나 매서운지를 똑똑히 맛보게 해주리라.

아라인도 방패를 앞세운 채 매섭게 들판을 질주했다.

퉁 투퉁

간간이 화살이 날아왔지만 방패로 거뜬하게 처리한 아라인은 수풀 속에 숨어있는 놈들을 발견했다. 켈티시. 역시나 켈티시 놈들이었다. 지난밤 투르둘리 연맹 소속의 정찰대를 죽인 건 바로 이놈들이리라. 정찰대를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강을 건너 투르둘리 연맹의 땅을 밟아? 놈들이 전면전을 펼치기 전에 이쪽의 전력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다.

“말을 할 수 있는 놈은 한놈이면 충분하다.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아!”

아라인의 외침에 저들은 다시 거센 분노를 터트리며 서후군에게 질주했다.

*

서후 역시 들판을 박차고 짓쳐드는 놈들을 마주해갔다. 진형도 전술도 없다. 말 그대로 백병전이자 개싸움이다. 이런 전투에선 자신에게 달려드는 놈들의 숫자라고 해봐 전후좌우 네 명에 불과하다. 후방은 아군이 자리하고 있으니 많아야 세 명에 불과하다.

진형을 갖춘 채로 자신만 노리는 로마군도 분쇄한 서후가 고작 세 명 정도를 베지 못할까?

“죽어라!”

자신을 향해 검을 날리는 투르둘리의 검을 빙글 돌면서 피해낸 서후는 회전력을 그대로 유지하며 적의 목을 날려버렸다.

촤아아악

그리고 옆에서 짓쳐드는 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하지만 노련한 전사인 모양인지 그는 급히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나 서후는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왼손의 검으로 놈의 배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오른손 공격은 일종의 페이크에 불과했다. 물론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를 베어버렸을 테니 막지 않을 도리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촤아아악

“으아아아악!”

베어진 배에서 창자가 와르르 쏟아져나오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투르둘리인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서후가 다시 소리쳤다.

“모조리! 모조리 죽여라! 켈티시의 이름으로!”

“와아아아아!”

서후의 용맹무쌍한 모습에 루시타니아인들은 미친 듯이 함성을 지르며 적들과 전투를 치르기 시작했다.

서후는 자신의 뒤에서 달려오는 놈을 발견하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의 검자루를 걷어차 뒤로 날렸다.

붕 붕 붕

불안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던 검은 달려오던 놈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놓은 뒤에 바닥에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크헉!”

놈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서후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목젖을 검으로 무참하게 갈라버렸다.

촤아아아악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즉시 모로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다.

잔혹한 일이다. 저들과 자신이 이렇게 싸울 필요도 없고 서로 목숨을 빼앗을 필요도 없다. 어떤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죽이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이게 전쟁이다. 원치 않아도 목숨을 잃어야 하고 원하지 않아도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서후는 냉정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 명의 투르둘리인을 바라봤다. 서후는 저들의 검을 양손의 검으로 현란하게 쳐낸 다음 저들의 팔과 다리를 순식간에 베어버렸다. 그러자 마치 원래 붙어있지 않았던 것처럼 너무나 수월하게 끊어져 이리저리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모습은 마치 달려오다가 말고 갑자기 거대한 뭔가에 부딪혀 뒤로 내동댕이쳐지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서후에게 달려왔던 자들은 신체의 일부를 잃고 꿈틀거리다가 이어진 검격에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금 서후의 주변으로 피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

아라인은 선두에서 전설의 용사 오그미오스처럼 아군을 베어내는 자를 바라봤다. 다른 놈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두에서 볏단을 베어내듯 전사들을 베어내는 저자에 비한다면 태양 앞에 반딧불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오늘 당신에게 용맹한 전사의 피를 먹일 테니 나를 더욱 뛰어난 전사로 변화시켜주시오.”

아라인은 자신의 검에 대해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건 켈트인들의 풍습과 관련이 있었다. 켈트인, 즉 켈타이인은 검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었다.

단순히 물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전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함께하는 전우였던 것이다. 따라서 검에 대해 맹세하고 검을 숭배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아라인이 자신의 검에 대고 중얼거리며 말한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아라인은 살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두 다리의 근육에 힘을 주고 서후를 향해 달려갔다.

쿵 쿵 쿵

“으아아아아!”

아라인은 방패를 앞세우고 서후를 향해 몸통박치기를 행했다.

*

촤아아악

또다시 적의 목을 끊어낸 서후는 고함과 함께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아라인을 발견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부족장 중 한 명으로 보였다. 저들의 공격이 제법 거셌기에 그들을 상대하느라 발이 묶인 서후는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아라인의 몸통박치기를 피할 겨를이 없었다.

때문에 서후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놈을 향해 달려갔다.

탁 탁 탁

*

서후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자 아라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신이 달려온 속도가 더 빨랐다. 이대로 부딪치면 자신이 이득을 본다. 육중한 체중을 실은 돌격에 놈이 비틀거릴 때 재빨리 놈의 몸에 검을 박아넣으면 자신의 승리였다.

전장의 소음마저도 마치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서후와 아라인이 부딪쳤다.

아라인은 방패를 쥔 손잡이를 으스러질 것처럼 더욱 강하게 쥐었다.

으드득

그리곤 서후를 향해 곧장 밀어냈다. 방패로 후려쳐서 서후의 자세를 완전히 흐트러뜨릴 생각이었다.

우뚝

그러나 웬걸? 방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윽!”

오히려 역동작에 걸린 것마냥 팔과 다리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아라인은 어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서후를 바라본 순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방패 한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서후는 한 손으로는 방패의 중앙을 막아 그의 돌격을 막아내고 한 손으로 방패 상단을 붙잡아 아라인을 제자리에 멈추게 만들었다.

그리곤 우악스럽게 방패 귀퉁이를 잡은 한쪽을 잡아당겨 그에게서 방패를 빼앗아 버렸다.

“이.. 이 무슨?”

강제로 방패를 빼앗겨 자세가 흐트러진 아라인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분명 자신보다 작은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그간 치른 전투가 한두 번이 아닌데 그런 계산도 하지 않고 달려들었을까? 그런데 이런 힘이라니? 무슨 정말 오그미우스라도 된단 말인가?

방패를 뒤로 집어 던진 서후는 서늘한 눈빛으로 아라인을 바라보며 그를 두 쪽 내버릴 것처럼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서후는 섬뜩함을 느끼고 급히 몸을 뒤틀었다.

피이이잉

피이잉

두 발의 화살이 간만의 차로 그의 몸통을 스치고 지나갔다. 파이살이 만든 갑옷은 튼튼하지만 화살을 정면에서 튕겨낼 정도로 방호력이 뛰어나진 않았다.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중상은 입지 않았겠지만 갑옷을 믿고 피하지 않았다면 앞으로의 일정에 큰 지장을 초래할 뻔했다.

저 멀리 보니 호리호리한 체형을 가진 궁수가 다시 화살을 재고 있었다. 서후가 다시 아라인을 바라봤을 때는 아라인은 이미 제 부족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음. 증원군? 증원군까지는 아닌가?’

지금 나타난 이들이 다른 부족의 증원군이라면 눈앞의 이들이 후퇴할 기색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서후는 뒤로 도망치는 자에게 소리쳤다.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도망칠 것이냐?”

“카우치족의 아라인이다! 네놈은 어디의 누구냐?”

“그건 내가 죽인 자들에게 물어봐라!”

서후가 다시 저들을 향해 달려들려고 할 때 뒤에서 나타난 에고르가 급히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자가 아라인이 맞다면 그를 죽이면 곤란합니다.”

“왜?”

“투르둘리 차기 연맹 대표로 거론되는 이들 중 하나입니다. 그가 죽는다면 켈티시 연맹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 먼저 나서서 몸을 숙일 겁니다.”

서후는 에고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극심한 진전은 분란을 키우는 게 아니라 도리어 진화시킨다. 하지만 서후는 그 이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에고르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에고르는 난처한 표정으로 서후에게 대답했다.

“보다 자세한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서후는 서둘러 도망치는 투르둘리인을 바라봤다. 지금 추격하기엔 늦었다. 모두 죽이라고 명하긴 했지만 도망치는 자들까지 모두 죽이는 건 지금의 병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고르에게 말했다.

“저들이 아군을 켈티시인이 아니라 여길 확률은?”

“제가 볼 때는 미미합니다.”

“필요한 물품을 챙긴 뒤 이곳을 빠르게 벗어난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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