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76화 (76/298)

# 76

76. 금과 은.

76. 금과 은.

“흐음.”

세르토리우스는 파피루스로 된 서신을 눈매를 좁히며 읽고 있었다.

<루시타니아의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아버지를 이용하려는 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파종한 곡식의 뿌리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잡초를 뽑으려 한다면 도리어 이로운 곡식의 뿌리가 상해 그해 농사를 망칠 수 있으니 저들을 함부로 쓸어버리기도 애매한 상황입니다. 하여 일단 루시타니아 해안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투르둘리의 분파 중 하나인 투르둘리 오피다니 연맹을 쳐 본보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 사료됩니다. 저들이 투르둘리 분파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이런저런 이유로 결코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 생략 - >

세르토리우스는 파이살을 바라봤다.

“이 서신에 뭐라 적혀있는지 알고 있느냐?”

“알지 못합니다. 밀봉된 그대로 장군님께 가져왔을 뿐입니다.”

세르토리우스는 파이살에게 다시 말했다.

“나와 함께 하고 싶다고?”

“실력 좋은 대장장이는 군에 항상 필요한 존재입니다. 실제 전투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전투 외적인 부분에서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레기온 내에 비전투병을 운용하고 있는 것을 들은 바 있으니 부디 제가 함께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버지. 남쪽 지역과 중앙 지역의 켈타이 족을 정탐하고 가능하다면 교란해볼 생각입니다. 비 켈타이인이 루시타니아에 섞여 있던 것이 한두 해가 아니거늘 그것이 척박한 산지 지역인 루시타니아를 점령하려는 주요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베토네스 연맹이 혼란에 휩싸여 있다고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여 저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도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제 추측이 틀릴 가능성도 있지만 그 또한 이번 정찰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이를 직접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서후가 남긴 서신의 내용이 다시금 떠올랐다.

“허한다. 테세우스가 이미 적진에 진입한 상황이니 누구의 도움이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출정준비에 최선을 다하라!”

세르토리우스의 강렬한 눈빛을 마주한 파이살은 굳은 결의가 서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가 보도록.”

그리곤 사비누스에게 서후가 남긴 서신을 보여줬다. 사비누스는 서후가 남긴 서신을 빠르게 읽으며 연신 탄성을 뱉었다.

“허어.”

잠시 뒤 그런 사비누스에게 세르토리우스가 질문을 던졌다.

“자네 생각은?”

“테세우스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켈타이인들의 사회구조를 단번에 변화시킬 수 없고 변화시키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만한 여력이 현재 아군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들 스스로 아군에게 복종하게 만들고 저들끼리 서로를 견제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 상황에선 최선으로 보입니다. 다만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합집산을 밥 먹듯이 하는 무리를 어떤 식으로 다룰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습니다. 게다가 남부와 중부를 무슨 수로 교란하겠다는 것인지.. 하지만 테세우스님께서 남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같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사비누스의 말에 동조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렸다.

<히스파니아 북서부 지역. 즉 칼라이치 지역에 금광과 은광이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사실 저는 중부와 남부 지역의 켈타이족들이 루시타니아를 얻으려는 주요동기가 여기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소자에게도 루시타니아산 철과 특유의 모양으로 날을 세운 검이 한 자루 있습니다만 루시타니아산 철은 히스파니아 내에서도 알아주는 품질을 자랑합니다. 루시타니아를 점령한 뒤 이곳을 교두보 삼아 금맥과 은맥을 독차지하려는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 그곳에 금광과 은광이 존재한다면 아군은 이 사실을 이용해야 합니다.>

세르토리우스는 덥수룩하게 자린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금광과 은광이라.”

“테세우스님의 말대로 칼라이치 지역에 금광과 은광이 존재한다면 차라리 저희가 먼저 선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테세우스가 남긴 뜻은 그 뜻이 아니다. 금과 은은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고 전쟁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나 금과 은 자체가 전쟁을 이기게 만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군대를 나약하고 게으르게 만들지. 금과 은으로 만든 검이 화려하긴 하나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금과 은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으나 시기상조다. 금광과 은광을 이용하라는 건 이것을 당근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탐욕은 언제나 화를 부르는 지름길이지.”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조금의 사치도 부리지 않는 자신이 아니던가? 세르토리우스는 서후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그 요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오면?”

“아군은 저들이 금과 은을 취하게 내버려 둔다. 아군은 그 대신 히스파니아를 취한다. 그 시작은 루시타니아 지역을 거점으로 삼는 일부터다.”

“으흠. 출정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비라의 야스미라에게 사람을 보내라. 협정을 새로이 갱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알아들을 것이다.”

“마스타네소스가 아니라 야스미라입니까? 아직까지 그녀에게는 팅기스에 대한 대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텐데요?”

“팅기스와의 교역은 기반을 잡을 때까지는 필수적으로 필요하고 기반을 잡은 후에도 필요하다. 마스타네소스에게 넘긴다면 테세우스가 공들여 만든 계획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다. 젖이 나오지 않는다면 피라도 뽑아낼 자들이 왕이라는 자들이니까. 마스타네소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장 팅기스의 경제가 마비되겠고 상인들의 발걸음조차 끊어지겠지. 이는 아군에게 좋지 않다. 무엇보다 야스미라와 거래하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마스타네소스조차 단번에 지불하기 어려운 정도의 금액을 야스미라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것을 그녀가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차후에 상환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하면 된다. 마스타네소스도 반길 것이다. 자신은 한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 팅기스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길 테니..”

“으흠.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아비라의 공주는 자신의 운명을 걸고 거래에 응하겠군요.”

세르토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아군이 루시타니아에서 적당한 기반을 구축할 때까지 팅기스의 상황이 유지될 것이다.”

“그 기반이 구축된 이후에는 아군의 영향력은 물론 야스미라의 영향력도 커질 테니.. 이건 뭐 숫제 운명공동체나 다름없군요. 이것까지 고려하고 무리수를 뒀던 것인가? 하아..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세르토리우스 역시 서후를 떠올리고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스미라는 아군의 승리를 염원할 것이다. 빚을 갚지 않은 그녀의 팅기스는 여전히 반쯤 아군에게 속한 것이고 아군의 힘이 강대한 이상, 마스타네소스조차 함부로 팅기스를 넘보려 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부유해지면 빚을 갚음은 물론 마우레타니아 왕국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마저 얻을 수 있을 테지. 영리한 여인이니 이번 거래가 어떤 의미인지 벌써 전에 파악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병력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특히 마사에실리족들의 합류가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소우판 그자의 성공이 저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처럼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괄시받는 마우리족들도 이미 상당수 아군에 합류했습니다.”

소우판을 따르는 마사에실리족들은 교역을 통해 나날이 부유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희망이 없던 마사에실리족으로서는 어둠 속에서 태양이 떠오른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식량문제는?”

“테세우스님과 인연이 있던 이집트 상인 캄바가 대량의 곡물을 팅기스에 수송해왔기에 문제없습니다. 산재해 있는 크고 작은 일들만 아니라면 오늘 당장 출정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야스미라와의 거래는 마스타네소스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일이니 그의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뇌물을 지불하도록.”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희가 몸을 낮출 필요가?”

“적은 것을 아끼려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는 법이다. 마스타네소스가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군이 기반을 잡는데 큰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재물은 다시 얻으면 될 일이고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의 가랑이 사이라도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더 중한 것인지를 명심하라.”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스타네소스가 충분히 흡족할 만한 뇌물과 더불어 그의 정복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달콤한 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세르토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히스파니아 쪽을 바라봤다.

뛰어난 모사는 흐름을 제 마음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흐름에 편승해 자신이 얻을 바를 찾아낼 뿐이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 든다면 그것이 도리어 네 발목을 잡을 수도 있으니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네 목숨을 구하는 것에만 주력해라. 네 뒤에는 내가 있음이니 결코 작은 승리에 연연해서는 아니 된다.

세르토리우스는 지금은 닿을 수 없는 말을 마음으로 삼켰다.

*

두두두

백여 기의 말이 빠르게 평야지대를 질주하고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일단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이곳은 카르페타니 연맹의 땅이다. 감히!”

서후는 에고르를 바라보고 외쳤다.

“솔리치냐? 메투리치냐?”

“메투리치입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나 그것이 이루어지느냐는 하늘에 달려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서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패들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자들을 바라봤다.

‘메투리치. 메투리치라.. 딱히 벨리키 때문은 아니다.’

벨리키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유혈사태를 일으켜야 했다. 잔혹한 일이지만 전쟁이다. 더 잔인하고 덜 잔인하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대로 저들을 쳐부순다. 투르둘리의 이름으로!”

에고르는 혀를 내둘렀지만 이내 곧 큰소리로 외쳤다.

“투르둘리를 위하여!”

“투르둘리를 위해!”

백여 명의 루시타니아인들은 제일 앞에서 달려가는 서후를 뒤따르며 주저없이 외쳤다. 정령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다. 오그미우스의 환생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강대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이 바닥을 박차는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함을 지르는 메투리치인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뒤로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활이라면 자신에게도 하나 있었다. 그것도 저들이 쓰는 직궁보다 성능이 좋은 파르티아산 복궁이 말이다.

서후는 두 허벅지에 힘을 줘 몸의 균형을 잡은 다음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활줄을 여러번 당겼다.

쐐에에엑 쐐에엑

말이 달리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은 화살은 그야말로 빛살처럼 메투리치인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서후는 좀 더 거리가 가까워지자 활을 다시 말에 거치하고 두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말이 돌격하는 속도에 겁에 질린 메투리치인이 눈에 들어왔다.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말의 돌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대로 부딪친다면 최하 중상 내지 사망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후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손의 검으로 그의 상체를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촤아아악

겁에 질린 메투리치족의 상체는 그대로 잘려나가 전장의 저편에 처박혔다.

“죽여라!”

“와아아아아!”

쇄기 형태의 돌격진형으로 달려오던 서후군은 파죽지세로 앞을 가로막는 적을 분쇄했다.

“으아아악!”

“크아아아악!”

루시타니아에서 고르고 고른 전사들이라 그런지 지금까지도 사망한 자가 없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들에 비견될만한 전사들을 만나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어쨌든 이들은 활이면 활, 검이면 검, 기마면 기마 모든 면에서 두루 능했다. 개개인의 능력으로는 단련된 군단병보다 뛰어날 것으로 보였다. 신체 능력이나 신장 역시 하나같이 우람했다.

거기에 서후의 용맹으로 사기까지 극에 달한 이들은 자신을 가로막는 메투리치 전사들을 무참하게 베어냈다.

결국 메투리치 경계병들은 모두 차디찬 바닥에 시신으로 변했다.

살아남은 자를 확인사살하는 루시타니아 전사를 말 위에서 바라보던 서후에게 에고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모두 사살했습니다.”

“사상자는?”

“없습니다. 이 정도 전투에 상처를 입을 정도로 나약한 자는 저희 가운데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대로 이 주변의 메투리치족을 쓸어버립니까?”

푸르륵

투레질 소리에 말을 목 언저리를 몇 번 두들기던 서후는 무심한 눈으로 에고르를 바라봤다.

“투르둘리 연맹의 증표를 바닥에 버리고 메투리치족의 증표를 챙겨라. 솔리치족의 영토로 향한다.”

에고르는 잠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후를 바라봤다. 복수 때문에 메투리치족을 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물론 그게 이유는 아니었겠지만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이건 복수와 전혀 연관이 없다는 뜻이 된다.

“메투리치족의 이름으로 솔리치족을 치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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