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 악의.
79. 악의.
테세우스 역시 방패를 앞세우고 달리다가 적당한 지점에 이르자 방패를 던져버리고 남은 검을 마저 뽑아 들었다.
스르릉
그가 검을 뽑을 때 전열에서 달리던 솔리치 전사들이 메투리치 전사들과 격돌했다.
쾅 콰광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는 육중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고 아우성치는 고함과 비명 역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 대가리를 터트려도 시원찮을 놈들!”
토우토릭스는 부족장답게 용맹한 모습으로 메투리치족의 전사들을 베어내며 전진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그를 막아서던 메투리치 전사는 머리가 찍힌 채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따라 솔리치전사들 역시 매서운 솜씨로 메투리치족을 베어냈다.
그러나 메투리치족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호전적인 것으로 치면 메투리치족이 훨씬 더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는 솔리치족과의 악연을 끝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선대의 염원을 드디어 자신의 대에 이룬다고 말이다. 켈티시든 투루둘리 연맹 놈이든 그건 솔리치족을 말살시킨 다음에 회합장에서 처리하면 될 문제다.
뒷말이 조금 나올 수 있지만 저들의 침략문제로 솔리치 지역을 점령한 문제는 유야무야 넘어가게 될 터, 어차피 혼란한 시기다.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시대다. 패배하여 노예로 팔려가게 될 부족의 소리 따윈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몰아쳐라!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참해라! 용맹하게 싸운 자에게는 반드시 보상할 것이니 전에 없던 향락의 극치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우아아아아아!”
“우아아아!”
이미 드러스트에게 길들여져 있던 메투리치족 전사는 광란에 찬 표정으로 솔리치족의 전사들을 밀어붙였다. 솔리치 전사들이 용맹하다고는 하나 수적으로도 불리했고 무엇보다 광기에 휩싸인 메투리치족 앞에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악!”
“아아아아악”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결국 쓸려나가는 건 메투리치족이 아니라 솔리치족이었다.
콰직
눈을 까집은 솔리치 전사가 도끼로 찍힌 머리에서 허연 뇌수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팔을 잃고 울부짖던 전사는 그 입에 차디찬 검이 틀어박혔다.
전선이 팽팽하게 유지되던 건 그야말로 전쟁 초반에만 그러했을 뿐, 전황은 급격하게 메투리치족으로 쏠렸다. 솔리치족 전원은 도살장의 소처럼 모조리 도축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다.
“뚫어라! 포위망을 뚫어야 한다!”
토우토릭스는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치며 메투리치족 전사를 베어 넘겼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아군은 계속 줄어드는데 적은 도리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조차 작금의 상황에 암울할 지경이었으니 부족 전사들의 사기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자신들이 이곳에서 죽으면 남은 전사들은 그대로 솔리치 진영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조직화된 이들과 다르게 축제기간이라고 들뜬 표정으로 축제를 준비하던 솔리치족은 순식간에 쓸려나갈 것이다.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가게 될 것이다. 솔리치족은 드러스트의 철저한 악의 아래 그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분쇄되고 말 것이다.
“뚫어라! 포위망을 뚫어야 한단 말이다!”
서둘러 뚫지 못하면 이곳의 포위망이 두터워지고 결국 앞뒤로 완전히 둘러싸이게 될 테니 그땐 정말로 끝이다. 토우토릭스는 사력을 다해 적을 베어내며 소리쳤지만 전공에 눈이 뒤집혀 달려드는 광전사들이 태반인 메투리치 족들은 제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던졌기에 솔리치족은 돌파는커녕 전전긍긍 제 자리를 지키는 것도 벅찬 상황이었다.
*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메투리치 전사를 베어내긴 했으나 전선의 선두에서 치열하게 싸우지는 않고 뒤편에서 전황을 살폈다.
‘포위망을 뚫지 못한다면 솔리치족의 전멸이다. 벨리키. 오늘 흘리는 피는 당신의 핏값이니 그것으로 넋을 달래도록 하시오. 어차피 복수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살려면 저들을 베어야 할 참이니 악연은 악연이로군.’
솔리치족이 모두 전사하면 이들과 함께하던 자신이라고 무사할까?
따라서 테세우스는 눈빛을 달리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던 솔리치 전사들을 뒤로 한 채 빠르게 메투리치족 전사를 향해 쇄도했다.
“어.. 어이! 위험해!”
테세우스 주변에 있던 솔리치 전사가 그리 외쳤지만 제 코가 석 자인지라 그 말이 전부였을 뿐, 테세우스를 따라 전진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크하하하하! 이 미친놈 좀 보게!”
“죽어라! 이 애송이 새끼야!”
메투리치 전사는 테세우스를 향해 방패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의 전사들은 날카로운 무기로 테세우스를 당장에라도 찍어버릴 것처럼 크게 치켜들었다. 테세우스가 방패 공격을 막아내고 비틀거리는 사이, 그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함이었다.
그게 저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말했듯 계획은 계획에 불과하다.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고 그 계획 그대로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테세우스를 상대로 그런 계획이란 없는 것과 같았다.
테세우스는 휘둘러지는 방패를 그대로 잡아 뜯었다.
“어어어억!”
그의 강력한 힘에 방패를 휘둘렀던 메투리치 전사가 균형을 잃고 딸려 나왔고 테세우스는 그대로 왼손의 검으로 그를 참수해버렸다.
촤아아악
목이 말끔하게 잘리고 붉은 핏줄기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 이놈이!”
“죽어라!”
메투리치 전사들이 광분하며 테세우스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게 패착이었다. 테세우스를 잡으려면 정교한 진형을 유지한 채로 먼저 그의 힘을 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베어 넘기기 좋게 달려든다면 테세우스가 베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저들은 저마다 자신의 살인기술에 자신이 있었겠지만 테세우스에 비할 수 있는 기예를 가진 자는 이 전장 어디에도 없었다.
팔과 다리, 몸과 머리를 비롯한 모든 곳이 적의 표적이 되었지만 테세우스는 간발의 차로 그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며 도리어 저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놓았다.
퍼어어억
사아악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이른 살인기예였다.
메투리치 전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단칼에 즉사한 것이다.
“저.. 저?”
그것은 시작이었을 뿐이다. 저들이 제 아무리 광기에 휩싸인 광전사라고는 하나 진정한 광전사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잠깐 숨을 돌릴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수십이 넘는 메투리치족이 죽어 나자빠졌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에 테세우스의 전투는 주변 모든 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테세우스가 발을 내딛자 그를 앞에 두고 있던 메투리치족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거침없이 자신들을 도륙하며 그 전리품으로 동료들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테세우스에게 말이다.
“보아디케아! 오늘 그의 이름을 위해 나를 가로막는 메투리치족은 모조리 쳐죽일 것이다!”
테세우스가 켈타이 언어로 전장이 흔들릴 것 같은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솔리치 진형은 물론 메투리치 진형 역시 웅성거렸다.
“보아디케아?”
“보아디케아가 누구지?”
그 말에 가장 먼저 적개심을 드러낸 것은 바로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였다.
“보아디케아? 보아디케아!! 네놈이 그의 아들이라도 되는 것이냐? 오냐! 과거 메투리치족의 수치를 네놈을 죽임으로써 모조리 지워낼 것이다!”
보아디케아라는 솔리치족에게 메투리치 부족장과 그의 후계자마저 죽은 사실을 드러스트가 모를 수 없었다. 물론 그들과 어떤 혈연관계도 아니지만 그 일은 메투리치족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내용 중 하나였다. 만약 카르페타니 연맹에서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메투리치족은 솔리치족에게 멸족당할 수도 있었다.
드러스트의 외침에 메투리치 전사들도 그 수치스러운 일을 떠올렸다.
“보아디케아라면?”
“보아디케아!!”
“죽여라!! 메투리치족의 수치를 지워버려라!”
주춤거리던 메투리치족의 기세는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저놈의 시신은 잘게 부숴서 잘근잘근 씹어 먹을 것이다! 뭣들 하느냐? 죽여라!”
드러스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메투리치족은 막혀있던 봇물이 터진 것마냥 테세우스를 향해 밀려들었다.
솔리치 내에서도 잊혀진 이름이지만 왕왕 거론되는 경우가 있었다. 과거 자신들이 저 강대한 메투리치족을 쓸어버렸다는 믿기 힘든 소문이 있었고 그 가운데 보아디케아라는 이름은 항상 거론되었다. 자랑스러운 이야기건만 함부로 거론할 수 없는 사실이 의문이었던 전사들은 테세우스의 외침에 대번에 그 이름을 떠올렸다.
“보아디케아?”
“그 보아디케아?”
이우디케아는 검을 잡을 수 없는 자들이나 기억하는 과거라고 말했으나 검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곧 이들이 부족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수치스러운 과거는 잊혀질지라도 자랑스러운 과거는 잊혀지기 어렵다. 아무 효력도 발휘할 수 없는 과거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랑스러운 과거는 그 자체로 긍지이자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벨리키와 연관된 자세한 내용은 민감한 내용이고 부끄러운 내용이라 잊혔을지언정 그래서 그와 관련된 과거 역시 쉬쉬했을지언정 승리한 사실마저 숨길 이유가 없었던 전사들의 입과 입을 통해 지금의 솔리치 전사들에게도 전해졌다.
토우토릭스는 비교적 상세하게 보아디케아와 연관된 과거를 알고 있었다. 부족장인 이상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토우토릭스는 줄곧 보아디케아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전사로서 그를 존경한 것이다.
이우디케아님이 왜 이방인 따위를 보증하냐고 했더니 에드, 저자가 보아디케아와 연관이 있던 자였단 말인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지금 저자로 인해 열린 셈이니까.
“족장! 저 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구해야 합니다!”
“놈들이 우리의 용맹한 전사를 죽이려고 합니다! 돌격 명령을!”
그때 휘하의 부하들이 테세우스의 위기를 보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토우토릭스도 보았다. 하지만 그는 보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그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죽이려고 몰려드는 메투리치족으로 인해 저들의 포위망이 매우 헐거워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 한 명 때문에 진형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토우토릭스는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갈등을 느꼈다. 이대로 저자를 돕는 것이 수순이나 그렇게 되면 아군은 이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회합장에 가야 한다. 그래야 저들이 후방의 부족들을 공격할 수 없다. 함부로 그런 짓을 벌였다간 다른 부족들의 합공에 잿더미로 변할 테니까. 회합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신성한 약속을 어기면 그 자체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다.
그러니 전략적 관점에선 포위망을 뚫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전사의 도의로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자신이 경멸하던 선대 부족장과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유야 어쨌든 그 결과가 같으니 결국은 같은 것이 아닌가?
짧은 순간, 수없이 갈등하던 토우토릭스는 에드, 즉 테세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테세우스는 포위망이 헐거운 곳을 쳐다보며 가볍게 손짓했다.
토우토릭스는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발을 굴렀다.
“젠장! 보아디케아! 보아디케아!!”
하지만 이내 곧 토우토릭스는 자신이 우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파악했다.
“우리는 저곳을 친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다! 부족을 구하는 길은 그것 외에는 없다! 가자! 보아디케아가 우리를 가호할 것이니!”
침울한 표정으로 전사들은 테세우스를 힐끔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
드러스트는 토우토릭스가 보아디케아를 외친 전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헐거워진 진형을 향해 돌격하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고도 코웃음을 쳤다.
“쥐새끼 같은 놈. 하지만 부족의 수치를 상징하는 놈부터 지우는 것이 우선이다. 네놈들은 어차피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해!”
보아디케아라는 이름은 전황이 뒤틀려도 개의치 않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 메투리치족에 한해서는 말이다. 놈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그래 봐야 한 놈이다. 몰아쳐서 단번에 놈을 죽이고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솔리치족을 차근히 사냥할 것이다. 회합장에 진입할 권한을 지닌 솔리치족을 모두 죽이면 그때는 저들의 부족으로 전사들을 보내 포동포동하게 살찐 전리품들을 챙기면 된다. 깔끔하지 않은가?
“크크크. 사냥할 맛이 나겠군. 사냥할 맛이.”
하지만 드러스트는 알지 못했다. 항우나 리처드 개개인만으로도 일천의 보병만으로 죽이기 어려운 존재였다는 것을. 하물며 테세우스는 그들을 합쳐놓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