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81화 (81/298)

# 81

81. 악의.

81.

수백에 달하는 잘린 귀가 사방으로 퍼드러졌다.

그 모습에 주변의 켈타이인들은 물론 드러스트조차 당황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었다. 대체 이걸 어디서? 드러스트는 회합장에 흩뿌려진 귀를 바라보다가 토우토릭스 뒤편에 서 있는 자를 확인했다. 자루를 집어 던진 사람 말이다.

저놈은? 저놈은 또 어떻게 살아 있단 말인가? 테세우스를 보는 순간, 뺨의 상처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놈을 죽이는 일이 지체되길래 따로 병력을 빼 이동했다. 남은 전사들에게는 놈의 시신을 토막내서 가져오라 명했었다. 모니치족이 이번 일에 은밀히 가담했기에 회합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숫자의 병력이 포위를 뚫고 이동했으니 더 지체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가장 우려되는 건 저들이 우회로를 택하는 일이다.

그러니 바짝 추격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끔 몰이 사냥을 해야 했다. 잠시 내버려 둔 것은 눈앞의 건방진 놈을 죽이고자 함도 있었지만 회합장으로 향하는 최단거리를 택하게끔 유예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놈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고 따라서 놈을 죽이기 위한 4백에 달하는 전사들을 남기고 자신은 남은 전사들을 모두 데리고 토우토릭스를 추격했다.

그런데 저놈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드러스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4백에 달하는 전사를 홀로 모조리 죽였단 말인가? 놈의 용맹이 대단하긴 했지만 이게 무슨? 그들 가운데는 궁수도 백여 명이나 달했다. 방패로 놈의 진격을 저지하고 뒤에서 화살만 날려도 놈을 죽여도 죽였을 것이다. 드러스트는 너무 황당무계한 결과에 눈앞의 잔혹한 전리품을 보고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곳에 주둔한 메투리치족 숫자만 오백에 달한다. 저놈 말대로 같은 숫자의 전사가 격돌했다면 회합장에 당도한 저들의 수가 말이 되는가? 우리 부족은 검조차 휘두르지 못하는 병신들만 가득한 곳이라 여기는 건가? 천 명! 천 명이 넘는 메투리치족이 회합장으로 가는 길목에 매복하여 우리를 습격했다. 간신히 그 포위망을 탈출했을 때 아군의 병력은 삼백 남짓. 그런데 또 다시 오백은 족히 넘어 보이는 놈들이 우리를 습격했고 말까지 타고 추격한 저들은 우리의 후미를 완전히 짓이겨 놓았다.”

토우토릭스는 전사들의 죽음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한 토우토릭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소리쳤다.

“근 이천에 달하는 병력이 우리 솔리치족이 회합장으로 향하는 길 가운데 매복하고 있었다. 심지어 저들은 우리를 말살하기 위해 말까지 준비해뒀다. 이건 우발적인 계획 따위가 아니다. 그렇지 않나? 모니치의 니니안! 말해봐라! 너희 두 놈이 작당한 것이 아니냐? 나머지 모든 이유는 그저 핑계일 뿐이다!”

이 일에 과연 두 놈뿐일까? 토우토릭스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드러나지 않은 자들이 분명히 더 있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함부로 매도하면 자신의 주장에 신뢰성이 떨어지고 무엇보다 숨어있는 적이 저들을 드러내놓고 지지하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토우토릭스는 분노로 마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만 언급했다. 일단은 드러난 눈앞의 적부터 상대한다.

“이 수백 개의 귀가 그 일을 보증한다!”

그러자 회합장은 소란에 휩싸였다. 토우토릭스의 말이 맞다면 이는 중대한 범죄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때 토우토릭스에게 지목당한 모니치의 니니안이 외쳤다.

“그토록 궁지에 몰렸다면 죽인 전사의 전리품을 챙길 여유 역시 당연히 없었을 터,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귀를 챙길 수 있었지?”

토우토릭스는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보아디케아! 당신들도 보아디케아를 기억할 것이오! 카르페타니 연맹이 추방시킨 그 보아디케아 말이오!”

드루이드의 총 수장인 페들미드가 소란에 휩싸인 좌중으로 다소 조용하게 만든 다음 입을 열었다.

“보아디케아. 기억하네. 하지만 추방당한 자의 이름은 왜 거론하는 것이지? 당신들 솔리치 부족 역시 동의했던 일이다.”

토우토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그렇소. 하지만 카르페타니 연맹은 그날의 중재를 솔리치족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메투리치족은 멸족했고 연맹이 거대한 전화에 휩싸였을 거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오.”

그러자 모니치 부족장 니니안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귀를 어찌 얻었는지 말하라니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군. 왜? 수십 년 전에 죽인 메투리치 전사의 귀를 소금에 절여 놓기라도 했단 소리냐?”

“우하하하하!”

“하하하”

부족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거론하자 드러스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니니안을 바라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역시 드러스트를 노려봤다. 니니안의 눈에는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느냐라는 거센 질책이 담겨있었다. 그 말고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질책 섞인 눈빛에 드러스트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토우토릭스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창백한 안색을 가진 사람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사백의 메투리치를! 마치 파리처럼 쳐죽인 자는 보아디케아의 이름을 물려받은 솔리치의 에드다! 그는 메투리치족과의 전투에서 솔리치족을 탈출 시키기 위해 홀로 남아 저들과 싸웠고 심지어 그 전리품으로 당신들이 보는 귀를 베어왔다. 믿지 못하겠다면 직접 보라! 귀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베어진 지 며칠이나 지난 것인지? 직접 확인하면 될 일 아니더냐? 쿨럭 쿨럭”

그렇게 외친 토우토릭스는 결국 다시 다량의 피를 토해냈다. 그가 쓰러지려고 하자 테세우스는 급히 그를 부축했다. 부축을 받은 토우토릭스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면.. 면목이 없네. 보아디케아에게도 자네에게도.. 염치없지만 뒷일을 부탁하네. 부디 보아디케아의 부족을 버리지 말아 주게.”

토우토릭스는 부축한 테세우스의 손을 꽉 잡으며 간절하게 바라봤다. 그 모습에 테세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토우토릭스는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섰다.

“정말이다. 정말이야.”

“이건 며칠 되지 않은 전리품이 맞다!”

“이럴 수가? 정말로 홀로 사백의 전사를 베었단 말인가?”

“흥! 허풍이다. 다른 자들이 죽인 것을 한 놈이 죽였다고 말한 것에 불과해!”

“그걸 어찌 믿겠나? 특히나 죽어가는 자의 말 따위!”

토우토릭스의 말을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관련된 사실을 아는 자들은 그 사실을 믿든 믿지 않든 토우토릭스를 매도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물론 토우토릭스에게 지목당한 니니안과 드러스트를 제외하고는 과하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드루이드의 수장 페들미드가 극심한 소란 가운데 토우토릭스에게 말했다.

“황혼의 저편으로 가기 전에 남길 말이 있다면 해보게.”

말할 것은 너무나 많았다. 죽음에 다다르고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들의 태도만으로도 누가 솔리치족을 도모하고자 결의한 것인지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주전파에 속하는 부족들은 대부분, 은연 중에 이일에 동의한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주화파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부족들도 그러한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눈앞의 페들미드조차.

토우토릭스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피가 보이는구려. 에수스의 미소가 카르페타니를 향하고 있으니 당신의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는 것이오?”

“에수스 역시 우리의 신이다.”

“역시. 역시 그랬던가? 유언을 남기겠소.”

페들미드가 손을 높이 들자 소란이 다시 잦아들었다. 굳건한 대지를 자신의 두 다리로 지탱하고 선 토우토릭스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나 솔리치의 부족장 토우토릭스! 보아디케아의 이름을 이은 에드에게 나의 모든 권한을 승계한다. 부족회의와 드루이드의 정당한 의식이 실행되어 새로운 부족장이 선출되기 전까지 그는 솔리치의 부족장이다. 이는 나의 정당한 권한이다!”

페들미드를 바라보며 외치자 그는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정하네.”

토우토릭스는 되었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이우디케아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것은 테세우스를, 그러니까 에드를 자신에게 보낸 사람이 바로 이우디케아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솔리치부족은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지만 토우토릭스는 테세우스를 믿었다. 그는 보아디케아와 인연이 있는 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부.. 부탁하네.”

토우토릭스는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테세우스는 그를 급히 부축했지만 이미 그의 명이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강가에서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었다. 신출귀몰한 솜씨로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죽이고 탈취한 말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했지만 지금까지 살아있었던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쨌든 토우토릭스의 죽음으로 또 다시 회합장은 큰 소란에 휩싸였다.

‘일이 참. 희한하게 돌아가는구나.’

회의를 참관하려고 했을 뿐, 회의를 주도하는 입장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졸지에 그런 위치에 서게 되었다.

자신이 일으킨 분란으로 인해 토우토릭스가 죽은 건 아니다. 이미 저들은 솔리치족을 함정에 넣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향이 아예 없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따라서 테세우스는 그의 죽음에 무거움을 느꼈다.

‘솔리치 부족이라..’

수많은 부족들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이 세르토리우스의 아들인 테세우스의 입장에선 신경 쓸 가치도 별로 없는 부족에 가깝다. 그럼에도 테세우스에게 솔리치족이라는 이름이 조금 더 각별하게 다가온 것은 이곳에 벨리키와 지금 죽은 토우토릭스의 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이리라.

테세우스는 이우디케아를 바라봤다. 이우디케아는 테세우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휘하 드루이드와 바티즈를 데리고 그에게 다가왔다.

“장례를 준비해 주십시오.”

이우디케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토우토릭스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이우디케아는 토우토릭스의 몸에서 솔리치족장의 증표 중 하나인 목걸이를 거둬 테세우스에게 건넸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그것을 목에 착용한 후 토우토릭스의 피로 얼룩진 그 자리 위에 우뚝 섰다.

솔리치족을 제외한 26명의 부족장들이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꼈다. 대부분 적의 어린 시선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합장 내부엔 무기를 들고 들어올 수 없게 되어있다. 오크나무로 둘러싸인 신성한 곳이 아닌가? 약속도 약속이지만 저주받을 것이 두려워서라도 무기를 들고 진입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런 고로 테세우스도 무기를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우디케아를 호위한 50여 명의 솔리치 전사들이 이곳에 당도해 있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무기를 맡겼다.

그가 무기에 대해 떠올린 것은 순간적이나마 살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저들을 모조리 죽인다면 카르페타니를 수월하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책이다. 하나를 얻고 열을 잃는 행위에 불과해.’

이를 통해 카르페타니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이 같은 행위는 다른 연맹의 진노를 사게 만들 것이니 하책이다. 그리되면 철혈의 통치로 저들을 무조건 쓸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로마가 아니라 켈타이족과 전투를 치르느라 모든 진을 빼게 될 것이다. 이들이 단합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수효는 엄청나다. 고작 카르페타니 연맹을 무너뜨리고자 켈타이족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이곳의 부족장은 여느 왕국의 왕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켈타이 사회의 근간은 드루이드다. 부족장의 권한이 막강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하책이야.’

테세우스가 자리에 서자 드루이드 수장 페들미드가 입을 열었다.

“솔리치의 부족장께서는 더 주장할 것이 있습니까?”

테세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치 부족장, 니니안과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를 훑어봤다.

“물론입니다. 전대 부족장 토우토릭스가 주장한 점에 대해 두 부족장은 반박할 것이 있습니까?”

그들이 묵묵부답으로 응수하자 테세우스가 강렬한 눈빛으로 외쳤다.

“모니치! 메투리치! 너희 두 부족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그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면 너희 땅에 너희 이름은 한 자락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너희가 보인 악의와 적의를 모조리 되갚아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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