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 오그미우스.
83.
세찬 바람에 나뭇잎이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허공에 너울지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그 모든 것을 가르며 빠르게 앞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차! 차!”
달리는 말을 계속 재촉하여 앞으로 질주하던 테세우스는 섬뜩한 기세에 급히 몸을 옆으로 뒤틀었다.
쐐에에엑
그러자 당장에라도 테세우스를 꿰뚫을 것처럼 쇄도하던 화살이 쏜살같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테세우스는 몸을 뒤튼 그 자세 그대로 활줄에 화살을 걸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즉시 화살을 날렸다. 몸을 뒤틀자마자 거의 동시에 이뤄진 일이었다.
테세우스가 쏘아낸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추격해오던 메투리치족의 미간을 꿰뚫어 버렸다. 그냥 쏜 화살도 피하기란 요원한 일이거늘,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추격해오던 중이었으니 그 모습은 숫제 화살에 제 머리를 들이민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푸아아악
콰득 콰득
미간이 꿰뚫린 메투리치족은 사선으로 바닥에 떨어졌고 주변에서 함께 달리던 동료의 말에 밟혀 그 뼈마디마저 완전히 작살났다.
히이이잉
그렇게 떨어지는 시신을 정면으로 부딪친 말 역시 울음소리와 함께 고통에 비틀거렸다.
하지만 메투리치족은 동료의 죽음이나 말의 고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죽음의 화살이 허공을 격하며 더 쇄도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화살에 또다시 동료전사의 목숨이 끊어졌다.
앞으로 달리면서 뒤를 보고 화살을 쏘다니.. 심지어 그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저놈의 화살에 벌써 몇 명의 전사가 명을 달리했는지 모를 지경, 자연히 추격병들의 눈에는 진득한 분노와 살의가 가득했다.
하지만 화살은 소모품이다. 아마 지금의 화살이 마지막 화살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메투리치족들은 일말의 망설임조차 내버리고 더욱 빠르게 말을 달렸다.
“차!”
두두두
*
이우디케아의 호위를 총괄했던 마에도크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들이 우리를 사지로 몰고 있습니다. 몰이 사냥이 분명합니다.”
자신들은 40명 정도에 불과한데 추격해오는 적들은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주로 메투리치족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저들이 선두에 섰을 뿐, 간간이 다른 부족의 전사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회합장 주변에 있던 기병이라는 기병은 모조리 몰려온 것으로 보였다.
나머지 기병은 우회로 등을 통해 자신들을 앞질러 길목을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자신들은 놈들의 사나운 추격에 방향이 틀어진 것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현재 별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테세우스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방책을 세웠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변화하는 상황을 빠르게 읽고 대처했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급함은 거의 모든 일에 독이 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속절없이 무너진다. 최대한 서둘러야 한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었는데 후방의 솔리치족인들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자신과 대화한 토우토릭스가 그 점을 대비하게는 했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라 이끄는 자가 없다면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할 가능성이 높았다.
족장의 단호한 명령이라 따르기는 하지만 솔리치 족은 카르페타니 연맹이 자신들을 적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저들이 배반한 것이 아니기에) 무엇보다 승산이 없는 전투라 일단 대화를 통해 일을 진행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카르페타니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따라서 솔리치족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저들의 칼에 무참하게 도륙당할 것이 눈에 선했다.
솔리치족의 숫자는 최소 5천여 명에 달할 것이다. 카르페타니는 연맹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그 모두를 쳐죽일 것이 분명하다. 그 피를 제물 삼아 침략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굳히겠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실 산재한 문제는 카르페타니 연맹뿐이 아니다. 베토네스 연맹인들 솔리치족을 반기겠는가? 자신들의 땅을 가진 부족의 가입이라고 해도 저어되는 부분이 있었다. 심지어 솔리치족은 카르페타니로부터 도망친 피난민들에 불과하다.
혹 전사들은 반길지 모른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저들을 먹고 입을 생필품은?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자신들의 땅에 대규모 인원이 들어서는 걸 달가워할 리가 없다. 베토네스 연맹이 안정된 상황이라면 카르페타니 연맹과 중재하여 이 문제에 대한 타협점을 찾겠지만 베토네스 연맹은 현재 자신들의 불화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타 연맹의 부족까지 신경 쓸 여유나 이유가 어디 있을까? 고작 타 연맹에 속했던 부족 하나 때문에 카르페타니와 불화를 자초할 까닭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베토네스 연맹에 속한 부족들과도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베토네스 연맹에 가담하고 그들을 이용할 계획은 앞으로의 일이 순조롭게 풀려야만 가능한 계획이라는 소리다.
테세우스는 녹음(綠陰)의 푸른 숲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달리고 달려도 산과 숲밖에 나오지 않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로군. 하지만 일단 저놈들부터 어떻게 처리해야겠군.’
솔리치 전사를 이끄는 자의 이름이 마에도크라고 했던가? 틀린 말이 아니다. 이대로 쫓기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저들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발을 디디는 일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다그닥 다그닥
말이 숲길을 박차는 소리가 테세우스의 고막을 자극했다.
‘날씨를 이용하는 건 불가. 숲 전체에 물이 잔뜩 오른 계절이니 화공은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지형지물을 이용하기엔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이러한 전략은 미리미리 치밀하게 준비했어야 사용 가능한 전략이다. 이 상황에서 남은 건 하나다. 군을 이끄는 장수의 유능함. 그것을 통해 저들을 기만한다.’
생각을 정리한 테세우스는 말머리의 방향을 뒤틀며 외쳤다.
“방향을 틀어라!”
“알겠습니다.”
마에도크를 비롯한 솔리치 전사들은 테세우스를 쫓아 그 즉시 방향을 틀었다.
두두두
숲에도 길이 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이동하려니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곳곳에 장애물이 가득했다.
“이랴!”
밑둥치가 썩어 쓰러진 나무를 발견한 테세우스는 그대로 말을 뛰어오르게 해서 넘어갔다.
토우토릭스는 생전에 이우디케아를 존경했기에 당연히 그를 호위하기 위한 자들을 뛰어난 자들로 선별하여 맡겼다. 따라서 테세우스와 함께하는 40여 명의 솔리치 전사들도 뛰어난 기마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월하게 그것을 넘어갔다.
테세우스는 점점 더 울창한 숲으로 진입했기에 잠시나마 추격하던 자들의 시야에서 몸을 감출 수 있었다.
“마에도크!”
“예!”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 평탄한 길을 찾아라! 단 솔리치 방향의 반대편으로 역주행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지금까지처럼 우회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족장님께서는!”
“긴말할 여유가 없다! 가라!”
“알겠습니다.”
마에도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전사들에게 소리쳐 더욱 속도를 붙여서 숲을 빠져나갔다. 반면 테세우스는 완전히 옆으로 빠져서 수풀 가운데 말과 함께 몸을 숨겼다.
푸르르륵 푸륵
“워. 워. 잠시만. 잠시만 조용히 하거라.”
테세우스는 말의 목을 부드럽게 쓸면서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 그의 귓가로 말발굽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적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놈들을 찾아라! 훙! 제깟 놈들이 이런 식으로 몸을 숨겨봤자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이상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너희들은 이곳을 벗어나서 솔리치로 향하는 지역의 길을 막아라.”
“알겠습니다.”
‘지금!’
테세우스는 적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를 향해 그 즉시 말을 달렸다. 테세우스의 말은 그가 이끄는 대로 충실하게 수풀을 가르며 빠르게 적장을 향해 쇄도했다.
*
잠시 말을 멈추고 명령을 내리던 메투리치의 용맹한 전사 세이실은 수풀을 가르고 무언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것을 발견했다.
“읏! 쏴라!”
거대한 표범이나 호랑이가 자신을 덮치는 것처럼 보였던 세이실은 급히 주변의 궁수들에게 외쳤다. 세이실의 명령에 궁수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화살을 쐈다.
쐐에에엑 쐐에에엑
그러나 그 화살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모조리 잘려나갔다.
창 차창
“저.. 적이다! 적이 커허허헉!”
그렇게 외치던 전사는 그대로 테세우스의 검에 목이 달아났다.
테세우스는 야차같은 눈빛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냈다.
“크아아악!”
“아아악!”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맹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맹수보다 더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놈은? 분명?”
메투리치 부족장, 드러스트를 호위하던 책임자가 바로 세이실 자신이었다. 그랬던 그이기에 테세우스가 어떤 실력을 지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으드득. 네놈! 네놈이었구나.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
대체 전사들을 어떻게 훈련시켰길래 고작 한 놈에게 4백에 달하는 전사들이 당했느냐며 추궁당했던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금 이렇게 자신이 놈들을 추격하는 위치에 선 것은 전처럼 드러스트가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좌천된 것에 불과했다. 그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놈을 죽일 기회를 달라 주청했기에 그나마 이 자리에라도 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세이실은 두려움보다는 테세우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치밀어올랐다.
다른 부족들보다 메투리치족이 선두에서 솔리치족을 쫓는 이유는 바로 이런저런 이유로 테세우스와 솔리치족에게 얻은 치욕을 손수 갚기 위함이었다.
세이실은 궁수들에게 다시 외쳤다.
“뭐하는 것이냐? 계속 쏴라!”
세이실의 명령에 여러 차례 궁수들이 화살을 쏘았지만 테세우스는 놀랍게도 그 모든 화살을 검으로 모조리 쳐냈다.
채채챙
그 모습에 메투리치 전사들은 움찔하는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해야 거의 코앞에서 쏜 화살을, 그것도 검으로 모조리 쳐낼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의 표정에는 경탄보다는 테세우스에 대한 공포가 가득했다. 화살조차 모조리 검으로 쳐낸 저자가 지금 자신들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이실은 분통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들! 나를 따르라! 놈이 솔리치족의 족장이다. 놈을 죽이면 드러스트께서 후한 보상을 내리실 것이다!”
세이실은 자신의 검과 방패를 앞세운 채 테세우스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러자 메투리치 전사들 역시 용기를 얻고 함성을 지르며 테세우스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
‘병력이 잠시 나눠진 지금, 적장을 죽이고 다시 아군에 합류한다.’
적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어도 4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면 곤란하다.
테세우스는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메투리치족의 검을 걷어냄과 동시에 저들의 가슴과 팔을 단번에 베어냈다.
촤아아악
붉은 피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찢어질 듯한 비명이 뒤따랐지만 테세우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또 다른 자의 피와 비명을 탐했다.
촤아아악 촤아악
마치 그의 검끝을 따라 피의 선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뒤따르는 저들의 단말마는 죽음의 춤을 추게 만드는 음악과 같았다.
“이노옴!”
세이실은 그런 테세우스에게 훌쩍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테세우스는 자신을 노리는 세이실의 검을 받아냈다. 제법 육중한 일격이었다.
테세우스는 자유로이 놀고 있는 왼손의 검으로 그의 목을 향해 찔러넣었다.
쿠우웅
콰직
그러나 그 일격은 세이실의 방패에 의해 막혔다. 대신 세이실의 방패가 형편없이 부서졌다.
그 충격에 낙마할 뻔한 세이실은 황당한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무슨 힘이 이토록 강력하단 말인가?
간단한 찌르기에 불과했는데 방패가 거의 반토막이 날 지경으로 박살났다.
“크흑!”
말을 뒤를 물려 충격을 완화한 세이실은 침음을 삼키며 재차 달려들었다. 자신이 잘못 훈련시킨 것이 아니다. 눈앞의 놈이 터무니없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세이실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는 것은 앞으로 말라 죽겠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 죽던가? 아니면 다시 모든 영광을 쟁취하던가? 둘 중 하나였다. 세이실은 고함을 치며 재차 테세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
그의 행동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서려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