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 오그미우스.
84.
하지만 기세로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위기 앞에 죽는 자도 없을 것이다.
성난 기세로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세이실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자신을 사선으로 베어오는 세이실의 검을 막음과 동시에 검을 슬쩍 휘감듯이 돌려서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리곤 말을 달려 그의 목도 마저 베어버렸다.
그 모든 행동에 단번에 이뤄진 일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이뤄졌다.
세이실이 죽자 메투리치족은 두려운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드는 것을 주저했다.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주춤거리는 메투리치족만 베어버리곤 솔리치 전사들이 지나간 방향으로 말을 빠르게 달렸다. 나머지 메투리치족은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두두두두
저 멀리 메투리치족이 눈에 들어왔다. 세이실이 추격하러 보낸 메투리치 전사들이었다. 테세우스는 양손의 검을 가로로 활짝 펼쳐 자신의 앞에서 달리던 전사들의 허리를 그대로 두 동강 내버렸다.
서걱
우두둑
“크아아악!”
“으아아악!”
“이.. 이놈이!”
옆에서 달리던 메투리치 전사들이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쐐에에엑
쐐에엑
양쪽에서 창이 교차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피할 수도 없는 상황, 이대로 창에 꿰뚫려 죽임을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교차하는 창을 양손으로 검을 슬쩍 비껴치며 절묘하게 몸을 뒤틀었다. 말 위에서는 취하기 힘든 자세였다. 균형을 완전히 잃고 낙마할 수 있는 자세 말이다.
스르릉 차아앙
양쪽에서 날아온 창의 창두가 테세우스의 양 검면을 긁으며 방향이 뒤틀리더니 도리어 두 자루의 창은 창을 날린 두 전사에게 틀어박혔다. 두 전사는 결국 서로가 서로를 죽인 셈이었다.
푸우욱
“커허헉!”
“크아아아악!”
“이이익!”
메투리치 전사들을 매우 당황했지만 자세가 완전히 틀어진 것을 확인했기에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들고 있던 창을 그의 허리를 향해 쓸어왔다. 이번에 무려 세 개의 창이 한꺼번에 테세우스를 찌를 것처럼 날아들었기에 어떻게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인체의 한계상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없는 각도에서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테세우스는 당황하지 않고 냉정한 눈빛으로 말의 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아니 심지어 자신을 향해 내질러진 창까지 밟고 높이 꽤 높이 뛰어올라 그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메투리치 전사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공에 솟구친 그를 향해 몇 발의 화살이 기다렸다는 듯 쏘아졌다.
테세우스는 경황이 없는 중에도 양손의 검을 휘둘러 그 모든 화살을 쳐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들은 창을 회수함과 동시에 다시 떨어져 내리는 테세우스를 찔러왔다. 그것을 발견한 테세우스는 그 즉시 몸을 빙글 돌리며 검으로 창대를 잘라버렸다.
콰드드득
창대가 나무로 만들어졌다지만 검으로 단번에 자를 수 있을 만큼 무르지 않았다. 게다가 체중을 지탱할 수 없는 허공이 아닌가? 다시 말해 테세우스는 오로지 팔의 힘으로만 그 일을 해냈다. 물론 몸의 회전력에 도움을 받은 부분도 있겠지만 그건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착
테세우스는 말 등 위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공중으로 박차고 날아올랐다. 또다시 그를 향해 공격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퍼버벅
히이이잉
결국 테세우스가 타고 있던 말은 화살과 창에 의해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테세우스는 분노한 눈으로 옆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전사의 목을 대번에 날려버리고 그의 시신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곤 그가 타고 있던 말 위에 올라선 다음 다시 그 주변에 위치한 전사를 향해 날아올라 이번에는 적의 상체를 사선으로 완전히 갈라버렸다. 붉은 단면과 함께 다량의 피가 바람에 흩날렸다. 마치 피로 이뤄진 비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미.. 미친!”
메투리치 전사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곡예도 이런 곡예가 따로 없었다. 달리는 말 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고? 험한 숲길이라 전력으로 달리진 못해도 이런 속도에서 떨어지면 치명상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테세우스의 담력에 메투리치 전사들은 기가 질린 나머지 그와 싸울 생각을 버리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제길. 검이 아니라 창이었다면..’
보다 먼 거리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니 타고 있던 말을 잃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마스커스든 방천화극이든 뭐든 일단 당장 쓸만한 창부터 제조해야겠어. 아쉬운 대로 일단 이거라도 써야겠군.’
생각도 잠시 테세우스는 말을 바꿔탄 테세우스는 저들이 쓰던 창을 들고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오른손의 검은 어느새 허리춤의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내 앞을 막는 자!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다!”
그의 신위와 기세에 겁에 질린 메투리치족은 그와 싸우기는커녕 그를 피해 분분히 물러섰다. 테세우스는 그런 그들을 유유히 뚫고 전방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마에도크 등과 합류했다.
그는 다시 현란하게 창을 내지르며 메투리치 전사들의 육체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렇게 꿰뚫린 자들은 대부분 즉사를 면치 못했다.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검을 든 그는 저들을 볏단을 베어버리듯 눈앞의 적이란 적을 모조리 베어 넘겼다.
촤아아악
그렇게 수십 명을 더 죽이자 저들은 감히 테세우스의 앞을 막지 못하고 물러서기 시작했다.
부우웅
테세우스가 창을 크게 휘두르자 창대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며 제 몸에 묻은 피를 얼마간 털어냈다.
이미 이 주변은 테세우스의 기세에 완벽하게 점령당했다. 서늘한 눈으로 저들을 쓸어보던 테세우스는 마에도크와 그 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달려라! 솔리치를 향해!”
“알겠습니다!”
테세우스의 믿지 못할 신위를 목격한 솔리치 전사들은 전황이 크게 불리하다는 사실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와 함께라면 이기지 못할 전투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자신들보다 많은 숫자를 자랑하고 있는 메투리치 전사들이건만 당장에라도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에도크는 토우토릭스가 왜 그를 새로운 부족장으로 삼았는지 확실하게 알았다. 보아디케아라는 자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가 부족의 용사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이은 에드라는 전사는 그야말로 오그미우스의 화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전사였다.
*
자욱한 연기가 사방을 덮고 있었다.
“테.. 테세우스님!”
마에도크는 망연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저 방향은 바로 솔리치족의 마을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도 표정을 굳혔지만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토우토릭스의 전령이 제때 당도했다면 말한대로 베토네스 지역쪽으로 이미 피신했을 것이다.”
테세우스는 그 말과 함께 주변을 서성이던 말의 고삐를 잡아채 불타오르고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이.. 이 미친놈들이!”
“으으으으!”
마을로 향한 솔리치족은 마을에 펼쳐진 잔혹한 광경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마을 광장에서 불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이.. 이 새끼들이!”
버드나무가지로 만든 거대한 사람 모양의 허수아비로 후대에 위커맨(Wiker man)이라 불리는 것이 마을의 광장에 서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테세우스와 함께한 솔리치 전사들은 그 광경에 광기에 찬 울음을 터트렸다. 이것은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자신들이 기쁜 마음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밤새도록 춤추며 먹고 마시며 축제를 만끽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거대한 모닥불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런 식으로.. 어찌 이런 식으로 사용했단 말인가? 저들도 켈타이인이다. 이 허수아비를 무슨 마음과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도 이리 잔혹하게 행했단 말인가?
불타오르는 위커맨 안에는 새까맣게 탄 사람의 시신들이 가득했다. 그 시신이 솔리치 부족민이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추측이었다. 이건 이런 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기쁨의 상징으로 불타오를 것이 처절한 고통의 상징이 되어버리다니..
가슴을 불태울 것처럼 타오르는 분노와 슬픔에 테세우스와 함께 사투를 거듭하며 살아남은 서른 명의 전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테세우스의 마음에도 그 모습이 화인처럼 담겼다.
테세우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마에도크의 어깨를 짚었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주변 흔적을 볼 때 토우토릭스의 전령이 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놈들의 진격속도가 훨씬 더 빨랐던 것으로 보인다.”
마에도크는 급히 마음을 추스르고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그의 두 눈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저희가.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테세우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복수.”
테세우스의 말에 주변에서 피눈물을 흘리던 전사들이 저마다 자신을 추스르고 일어서더니 형형한 눈빛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는 그들의 눈빛을 마주하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복수할 힘.”
“모든 것을 갈아서라도 놈들에게 복수할 겁니다.”
“목숨을 잃어도 좋습니다. 복수하게만 해주십시오!”
테세우스는 저들의 지독한 살의와 복수심에 가득찬 결의를 가만히 듣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살아남은 솔리치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저곳에서.. 후우.”
테세우스는 말을 잠시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잔혹하다지만 그보다 잔혹한 것은 인간이다. 참으로 악독하지 않은가?
“저곳에서 죽은 이들은 습격한 이들이 분풀이하기 위해 저지른 일로 보인다. 따라서 몸을 피한 솔리치족도 안전한 상황이라 장담할 수 없다. 서둘러 필요한 장비를 갖추고 우리는 저들의 흔적을 쫓는다. 그리고 죽인다. 가능하다면 모조리. 서둘러라. 우리를 쫓아오는 추격병들이나 본대와 합류하기 전에 저들을 죽이고 우리는 아군과 합류한다. 그 후에 복수전을 펼치겠다. 그러니 죽지 말고 살아남아라. 너희 목숨은 너희 것이 아니다. 솔리치를 위해 살아라.”
테세우스의 말이 끝나자 이미 온몸이 피로 뒤덮인 전사들이 낮고 강한 어조로 복창했다.
“솔리치를 위해.”
*
“크크크. 자꾸 생각나는군.”
“광장의 허수아비라면 나도 떠올라. 아주 장관이었지.”
그러자 잔혹한 웃음을 지은 전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도망친 놈들을 잡으면 여러 개 만들어서 한꺼번에 태워도 재밌을 것 같아.”
“큭큭큭. 그래서 이 방향으로 도망친 게 맞나? 쯔쯔. 멍청한 놈들. 베토네스 지역으로 도망치려면 최소한 우리 메투리치와 가까운 부족 쪽으로는 도망치지 말았어야지.”
“그걸 모르니까 이동했겠지. 어디 굴에 불을 피우면 토끼가 제 죽을 것을 알고 도망치던가? 제길. 갑자기 들이닥친 전사 놈들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많은 솔리치 족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걸 보면 토우토릭스가 뛰어난 족장이긴 한 모양이야. 제 목숨 부지하기도 바빴을 텐데 사람을 보내 준비를 시킨 것을 보면.”
“미리 알고 준비시킨 걸까?”
“글쎄. 미리 알았다면 축제준비보다는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겠지. 어쨌든 죽은 놈이다. 또 죽일 놈들이고. 아무튼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지?”
“물론이다. 그래야 우리가 배당받는 전리품이 더 많아질 테니.”
메투리치 전사로 보이는 자들이 저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대략 백여 명으로 보였다.
그때 기묘한 파공음이 숲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피이이잉 피이이잉
퍼어억 퍼어억
“크아아악!”
“크허헉!”
별다른 경계 없이 전방을 살피던 메투리치 전사들은 후방에서 날아온 화살에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다.
“저.. 적이다!”
“스.. 습격이다!”
부우우웅
“커헉!”
뒤를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던 메투리치 전사는 창에 입이 꿰뚫려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두두두두
메투리치 전사들이 기겁해서 뒤편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 말을 탄 전사들이 매서운 기세로 자신들을 쇄도하고 있었다.
“소.. 솔리치 놈들이!”
푸우욱
테세우스는 선두에서 뭐라 지껄이는 놈의 상체를 창으로 꿰뚫어 추켜올렸다가 옆으로 던져버리며 외쳤다. 테세우스의 창에 꿰뚫린 시체는 바닥에 떨어져 몇 번 꿈틀거리다 이내 곧 축 늘어졌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쳐죽여라.”
“와아아아!”
마에도크와 서른 명의 전사들은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광전사처럼 눈앞의 메투리치 전사를 베어 넘겼다.
전방에서 나타날 적만 주시하며 수색하고 있던 메투리치 전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후방공격에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하고 모조리 썰려 나갔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양손의 검을 휘둘러 메투리치 전사의 머리를 수집이라도 하듯 댕강댕강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야말로 폭풍처럼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